중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이며,
왜 중국 노동자운동과 연대해야 하나
[반론] 김정호 씨의 아전인수격 에세이를 비판하며
    2019년 02월 18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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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중국 자쓰 공장의 분규에 대한 김정호 씨의 기고 글에 대한 반론이다. 그런데 김정호 글에 대한 반박과 비판을 넘어, 한국의 진보운동, 사회운동이 중국 사회의 변화와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자의 고민들이 담겨 있다. 긴 글이지만 나누지 않는다. 관심과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 부분의 레디앙에 대한 비판적 충고에도 감사드린다. 더 의미 있는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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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정호(존칭 생략)는 레디앙에 두 편의 글을 기고했다. 하나는 8월 24일 선전시 파출소 앞에서 벌어진 대대적 연행 사건에 대한 <신화사(新华社)> 보도를 번역한 글(관련 글 링크)이고, 다른 하나는 “자쓰(佳士) 공장 분규와 중국 노동문제 관련 보도”라는 제목의 에세이(관련 글 링크)다. 나는 두 글을 종합해 김정호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앞의 보도는 매우 간단하게 비판할 수 있지만, 2월 15일에 기고한 장문의 글은 굉장히 다양한 쟁점과 주장을 중구난방으로 담고 있기에 비판이 쉽지 않다. 부득이 이 글 역시 장문이 될 수밖에 없다.

선전시에서 체포된 자쓰 노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학생 및 활동가들

매체비평 관점에서 본 <신화사> 보도의 문제

<신화사> 보도의 가장 큰 문제는 의도적으로 편집된 사실 관계들만을 보도한다는 점이다. 첫째, 자쓰 공장 노동자들이 맨 처음 투쟁을 시작한 이유가 담겨져 있지 않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6월부터 8월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5월 이전에 이 공장 노동자들이 겪은 삶들로부터 전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어떤 이유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는지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아예 실려 있지 않다.

둘째, 7월 말 자쓰 공장 안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 이유와 과정 역시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치 유성기업에서 노동조합과 경찰 간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조선일보>나 <매일경제> 등이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노조가 경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고만 보도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작성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이들이 굉장히 과격한 세력이고 비합리적인 주장만 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인식할 것이다.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 전 지상파 방송 등 노동운동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언론을 통해 ‘노동운동’을 접한 다수 독자들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심각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째, “라오동리(劳动力)”라는 노동NGO단체를 소위 ‘외부세력’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이 해온 긍정적인 실천들에 대해선 모두 무시하고, 비난 일색으로 소개했다. 이것의 효과는 명백하다. 제한된 사실만 보도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는 자쓰 사건의 부정적 여론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을 ‘빨갱이’, ‘적화세력’으로 보도했던 우리 언론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이를 객관적 보도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믿기지 않는다.

<신화사> 보도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집정당의 관점에서만 쓰여졌다는 점이다. 해당 보도는 사건의 전개를 꽤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서 ‘사실에 근거해 쓰인 객관적 보도’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만든다. 하지만 매체를 접할 때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과연 모든 것을 담고 있는지, 배제된 사실 관계는 없는지, 상대측의 견해 역시 담고 있는지이다. 해당 보도엔 그 모든 것이 없다.

나아가 <신화사> 보도에는 명확한 자기 관점이 있다. ‘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호는 이 관점에 대해 특별한 첨언 없이 그저 번역 소개했기에 나로서는 그가 이런 관점을 지지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위법성 여부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비난의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면, 그는 똑같은 관점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박근혜 정권 시기 2016년 12월에 벌어진 민주노총의 총궐기 시위는 가당치 않게도 ‘소요죄’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스크럼을 짜고 연좌 농성을 하는 게 전부인 중국 노동자들의 시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한국 노동운동의 전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14년 5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노동자들은 염호석 열사의 시신이 탈취된 바로 다음날 총파업을 선언하고 전 조합원 상경 투쟁을 하던 중 삼성전자 본관을 지키던 경찰과 큰 몸싸움을 벌인 적이 있는데 당시 사건으로 인해 지회장 등 여러 명이 연행된 바 있다. <신화사> 보도가 객관적인 것이라면, 김정호는 2014년 당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울분’을 ‘과격함’으로 바꿔 보도했던 보수언론들의 행태 역시 객관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김정호가 중국의 언론 현실에 대해 애써 모른 척하고 있거나 편협한 시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신화사>가 세계 5대 통신사로서 “상당한 역사와 드문 오보로 나름의 국제적 평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오래 살다가 균형 감각을 상실한 게 아닐까 싶다.

일단 중국에서는 관변언론의 ‘오보 검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신화사>의 이 보도에 대해 자쓰 투쟁을 지지하는 여러 사람들이 비판했지만 이런 입장에 대해선 전혀 소개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시되는 족족 강제 삭제되었다. 필자 역시 1년에 불과한 시간 동안 베이징에서 살면서 여러 ‘좌파 매체’들의 글이 강제 삭제되는 걸 목격했다. 비단 좌파 매체만이 아니다. 중국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죄다 지워진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에 따르면 2018년 중국은 2017년과 같은 176위를 기록했다. 수많은 언론인과 시민들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명령에 저항하다 구금됐고, ‘황금방패(金盾工程)’라 불리는 인터넷 감시·검열 시스템이 8억 명에 달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캠페인을 펼치는 해외 좌파 언론에도 접속할 수 없다. 중국 헌법 제35조에 명시된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무색할 정도다.

이런 검열과 통제는 중국 내에서도 심각하다. 일례로, 레디앙에도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여공의 ‘미투’ 운동을 펼칠 때: 공단지역은 ‘반성폭력 운동’의 불꽃으로 크게 불타올라야(女工米兔进行时:让反性骚扰这场大火,在工业区里越烧越旺)>라는 글(관련 글 링크)은 지난해 8월 <투떠우공사(土逗公社)>가 여성노동자 인터넷 플랫폼 <지엔자오부뤄(尖椒部落)>와 함께 몇 달간의 현장 조사를 거쳐 작성한 보고서인데, 이는 게시된 지 하루 만에 삭제되었고, 심지어 <투떠우공사>의 공공계정은 아예 삭제된 바 있다. 글 내용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지만 해당 보고서는 오늘날 중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겪는 성희롱·성폭력 현실에 대한 조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밝히고, 만약 중국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진다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한데 중국 당국은 이런 글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쓰 투쟁에 대한 노동자들의 입장은 어떻겠는가?

아마도 김정호는 자쓰 투쟁에 대한 목격자들의 진술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신화사>가 담고 있는 위쥔총 등 몇몇 노동자들의 ‘죄를 뉘우친다’는 진술은 극히 일부의 것인데, 연행된 채 엄청난 공포에 떠는 노동자가 진심으로 뉘우쳐 저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정말 믿는단 말인가? <신화사>는 왜 다른 입장을 가졌던 나머지 20여 명의 참가자들, 특히 여전히 풀려나지 않고 있는 자쓰 노동자들의 진술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을까? 당국에 불리했기 때문은 아닐까? 중국에 거주했던 한국인이라면 이런 의심은 매우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다. 이런 매체를 우리는 제대로 된 언론이라고 볼 수 있는가?

김정호는 자신이 <신화사>의 보도를 소개하는 것이 “독자 스스로 최소한 양쪽 입장을 골고루 섭렵함을 통해 판단의 균형추를 맞추는데 도움이 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라 밝힌 바 있다. 나는 이를 최대한 선의로 이해해보려 했다. 중국 당국이 국내에서 통제 불가능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어떤 방식으로 선전하는지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글을 보니 그는 중국 당국의 입장을 있는 굴뚝같이 믿고 있다.

즉, 언론 읽기에 대한 김정호의 관점은 순진하기 그지없다. 그가 과연 매체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견지할 줄 아는지도 의심스럽다. “5W1H에 충실하고 여러 정황을 소개”하고 있으면 죄다 믿어도 된단 말인가? 그렇게 따지면 국내에 <조선일보>처럼 믿을 만한 언론은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 언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예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필자는 김정호가 <환구시보>의 사설을 번역 소개하는 걸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양한 정보를 습득해 넓은 시야를 갖고 판단하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김정호가 <신화사>의 보도를 아무 조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믿는 걸 보니, 그의 관점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본주의의 구세주

2월 15일 게시된 <자쓰 공장 분규와 중국 노동문제 관련 보도>란 제목의 에세이에서 김정호는 중국의 국유은행 사례가 한국의 노동운동에게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모든 역사는 참조할 수 있는 것이니 관점을 갖고 참조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국유은행이 고용 유지를 위해 노동시간은 감축하고 인원 삭감은 하지 않으려 펼치는 변화는 참조할 수 있는 예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차고 넘친다. 딱 그 정도만 참고하겠다면 굳이 중국이 아니어도 좋다. 그와 같은 고용 유지가 국유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간기업에서도 노동조합이 투쟁력을 갖고 있고,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타협이 필요할 때 그와 같은 방식의 합의를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김정호의 주장은 그가 조사를 덜 한 탓으로 보인다.

김정호는 중국공상은행의 2016년 순이익이 47조원 초과해 삼성전자보다 많다는 점을 들며, 그것이 중국의 우수함인 것처럼 소개했다. 공상은행만이 아니라 오늘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에 비해 압도적인 수익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이뤄진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서 금융자본이 이처럼 산업자본을 앞질러 높은 수익을 기록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제라르 뒤메닐(Gerard Dumenil)과 도미니크 레비(Dominique Levy)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는 지난 20~30년 동안 금융 부문의 이윤율이 비금융 부문의 이윤율보다 훨씬 높았다. 이는 1970년대 후반 이전까지의 수치를 역전한 것이다.

금융에 대한 탈규제는 금융자본의 이윤율 상승을 이끌었다. 금융화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는 국민경제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제조업 상품의 생산이나 교역보다는 금융 상품과 금융 거래를 통한 이윤 창출의 계기와 규모가 훨씬 커졌다. 그렇게 해서 금융 부문은 실물 경제를 앞도하게 됐다. 이런 식의 금융 자본의 성장은 생산에 파괴적으로 작동해왔는데, 건물과 기계 등 자산을 대출금과 주식 등 유동성 자산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역시 금융화의 근본적 모순에서 기인한다.

중국의 은행들이 이처럼 득세하는 이유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완결무결함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성장 전략을 재구성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금융시장에 편입되었고,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금융시장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공상은행은 2007년부터 마카오와 홍콩, 남아공, 태국, 미국 등의 은행을 공격적으로 인수했고, 이를 거점 삼아 40여 개국에 329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2013년에만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295억 위안(약 5조 원)에 달하는 영업수익을 이뤘다. 또 투자은행(IB), 카드 및 프라이빗뱅킹(PB) 부문에 적극 투자하면서 카드부문과 프라이빗뱅킹에서도 각각 285억 위안(약 4조 8천 500억 원), 182억 위안(약 3조 1천억 원)의 영업수익을 기록했다. 이 같은 선전에 힘입어 2014년 공상은행의 비이자 수익은 전년 대비 15% 증가했으며 전체 영업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1%에 달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공격적 인수합병이나 투자은행 투자를 통한 이와 같은 성장은 중국 시장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1970년대 이후 금융화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그 위기의 징후를 노출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세계 자본주의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이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중국은 고도의 성장을 거듭하며 미국에 견주는 경제대국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땐 혼돈에 빠진 세계 자본주의의 멱살을 끌고 구출해냈다. 당시 엄청난 무역흑자로 쌓은 외환보유고를 통해 금융위기 악화를 막고, 세계 경제 부양을 위한 밑천으로 쓴 것이다. 재작년 초 시진핑(习近平) 국가주석은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자유무역과 투자 개발에 헌신하고, 자유주의를 확대하며, 개방을 통한 소통에 나서야 한다”면서, “더 이상 보호주의로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구세주는 중국공산당이다.

한데 김정호는 중국이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라고 믿는 듯하다. 이른바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것이 그가 믿는 절대적 전제일 것이다. 물론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적 성격 역시 갖고 있다. 이를테면 농촌 지역에서 토지공유제가 아직 존재하고 국유기업이 경제의 주체라는 점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이유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불평등이 극심화된 발전을 겪어왔다. 오늘날 중국의 부유층들은 농민공이나 극빈층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점유하고 있으며, 생활양식이나 문화에 있어서 자본주의 문화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도농 소득 격차는 3배가 넘으며, 상당수의 농민들은 적은 보상을 받고 지방정부에 토지를 빼앗겼고, 이 토지는 다시 지방정부가 설립한 농기업 의해 용도가 변경되거나, 부동산이나 공장용지로 매각됐다. 2000년대 이후 10년 간 5분의 2의 농지가 비농업적 용도로 전환됐고, 거의 4분의 1의 가족농지가 대단위 농지로 바뀌었다. 2010년 기준 농촌 마을 10개 중 1개가 농민의 뜻에 반해 해마다 농지를 잃었다.

부동산에 대한 사유재산권 역시 점차적으로 강화되어왔다. 2007년 시행된 <물권법>은 개인에게 “합법적인 수입, 주택, 생활용품, 생산도구, 원자재 등 부동산 및 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규정하고, 개인의 합법적인 저축, 투자 및 수익의 보호와 더불어 국가는 개인의 상속권과 기타 합법적인 권익을 보호한다고 규정했다. 2016년 3월 시행된 <물권법 적용에 관한 사법해석>에 따르면, “당사자가 증거를 들어 부동산 등기부의 기재된 내용과 실제 권리 상태가 일치하지 아니한다는 사실과 해당 부동산 물권의 실제적 권리자임을 증명할 수 있어 그 향유하는 물권의 확인을 요청한다면 이를 지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어렵게 돌고 돌아 소유권 인정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셈이다.

주택용지 역시 70년의 토지사용권이 만료되었을 경우 기간이 자동 연장되게 됐다. 따라서 주택건물에 대해 소유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주택의 부지인 토지에 대해 토지사용권 기간이 만료되어 주택을 소유할 수 없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게 됐다. 나아가 상속까지 가능하니, 이는 사실상 주택소유자에게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체제의 모순을 억누르는 가운데 중산층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현 공산당 엘리트들이 이런 자본의 길을 역진하긴 불가능해 보인다.

제 논에 물대기

지난해 중국의 은행들은 2018년 세계 은행 순위 1~4위를 점하는 등 막대한 성과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세계 1000대 은행에 진입한 중국 은행들의 기본자본 규모는 전년 대비 20%(3370억달러) 늘어난 2조 570억달러를 기록했다. 순이익으로만 따지면 전세계 은행 순이익의 3분의 1수준에 달한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국유은행들은 부채 축소(deleveraging) 정책의 역풍을 겪고 있다. 여기에 미·중 무역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증시와 위안화 가치는 동반 급락하고 있다. 지난 1월 중국 증시는 고점 대비 20% 이상 떨어졌고, 위안화 가치 역시 1년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금융위기설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과연 중국이 계속해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존재한다. 한동안 천문학인 수익률을 자랑하던 중국 은행들은 국내 경제성장의 둔화, 막대한 지방재정 부채로 인해 위기설에 시달린 바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 부동산 버블이 심각하고, 지방정부의 재정이 악화되고 있으며, 그림자 금융(전통적인 은행부문이 아니면서 상업은행과 유사한 자금중개기능을 수행함에도 은행과 같은 엄격한 감독·규제를 받지 않는 비은행 금융기관 및 금융활동에 의한 신용중개)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을 이유로 이른바 ‘부채 함정’에 빠졌다고 말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책으로 대규모 투자를 통한 신용공급을 확대하면서 부채가 늘어났고, 특히 지방의 국유기업마저 은행 대출로 투자에 나서면서, 철강·석탄·시멘트 등 중화학공업분야에 과잉투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수요가 감소하면서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고, 이제는 과잉생산이 심각한 문제가 된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실제 현재 중국의 지방도시 곳곳에는 멈춰있는 현장들을 너무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란저우~우루무치 노선 고속철도

김정호의 말처럼 중국 정부가 은행을 동원해 고속철도 등 인프라에 적극적인 투자를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막대한 부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시선 역시 많다. 더구나 고속철도 역시 잘못된 수요 예측으로 인한 과잉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1400억 위안이 투입된 란저우~우루무치 노선은 계획 당시 하루 320편이 운영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고작 8편에 그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철로총공사의 부채는 5조 위안(약 820조원)을 넘어섰다.

중국의 사회안정 기반 역시 조금 나아졌다고는 볼 수 있으되, 모순이 해결되어가고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요컨대 부동산 버블로 인한 집값 상승은 대다수 인민들의 주거권을 위협하고 있다. 베이징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높은 집값은 여전히 가장 심각한 문제다. 농민공들의 경우 제대로 쉴만한 거처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늘날 중화권의 수많은 매체들에서도 접할 수 있는 현실이다. 존재하는 현실을 없는 것처럼 얘기해선 안 된다.

김정호 글의 진정한 문제는 이런 위기의 징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비교할 수 없는 양자를 지극히 단순한 수치로 비교하면서 그것이 훨씬 우수한 것처럼 제 논에 물대기식으로 오도한다는 것이다.

받아쓰기

김정호는 자신의 몇 가지 경험에 비추어 자쓰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시각도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 자신의 협소한 경험에 근거해 섣불리 확신을 가져선 안 된다. 모든 사안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은 항상 중요하지만, 거꾸로 자신이 “조사 없이 발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 언론들의 중국 보도에 대한 김정호의 불만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참세상> 기자에게 “핀잔을 줬다”고 표현한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중국 바깥에서 중국 사회를 볼 때, 우리는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서구 사회가 비난하듯이 중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뭉뚱그려 비난하는 건 별로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역사적 분석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서구 언론들의 보도를 그대로 베껴 보도하면서, 공연한 반중국 정서를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판빙빙(范冰冰)이 추이융위안(崔永元)에 의한 ‘세금 탈루 폭로’ 이후 당국의 조사가 시작되어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국내 언론들은 판빙빙이 부당하게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당시 나는 이런 식의 섣부른 보도 관습은 매우 잘못됐다고 여겼다. 뒤이어 밝혀진 실상은 판빙빙이 각종 수법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탈세를 저지른 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스타-자본가 판빙빙은 지난해 어렵지 않게 이 세금을 완납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들은 자신의 보도 행태에 대한 반성이 없다. 나는 이런 행태들에 대해선 응당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 문제에 대한 한국 좌파의 태도를 지적하는 김정호의 시각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국내의 좌파 연구자들이 대부분 90년대 후반 국유기업 개혁 시기 동북지방에서 벌어진 대량해고나 폭스콘 등 사례만 가지고 인용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엔 결코 그렇지 않다. 2017년 발표된 중국 노동연구 관련 논문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연구는 「‘사회’로 확장되는 중국 공회 : 광둥성 공회의 체제 개혁을 중심으로」라는 문건이었다. 이 연구는 광둥성총공회가 급증하는 농민공 쟁의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꾀하려 했는지 현지조사를 통해 소개하고, 동시에 당국이 제도 밖의 NGO들에 대한 통제를 어떤 방식으로 강화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파업 등 쟁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된 바 있다.

폭스콘에 대해서만 해도, 2011년 연쇄 자살 사건만이 아니라,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언급된 자료들이 있다. 지난해 국내에 번역된 『중국 신노동자의 미래』에서 저자 뤼투(吕途)는 18세의 여공 왕미려가 “폭스콘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에요”라고 말한 것을 소개하며 상세하게 이곳의 상황을 소개한 바 있다. 레디앙을 통해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중국에서 여성노동자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란 글에서는 폭스콘의 여공들이 겪은 공장 내 성폭력과 이에 맞선 운동을 소개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번역 소개된 바 있는 ‘단전매’의 기사 <‘나쁨’과 ‘매우 나쁨’ 사이 : 중국 신세대 농민공의 삶>(관련 글 링크)에서는 폭스콘 공장에 다녔던 노동자의 말을 빌어 그의 삶이 쳇바퀴 구르듯 반복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소개한 바 있다. 김정호는 스스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사 없이 발언권 없다

김정호의 편협한 시각은 비단 중국 시장경제에 대한 예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쓰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자쓰 사건 이후 연행된 이는 100명에 가깝고, 2월 1일 기준 풀려나지 않고 있던 숫자는 54명이다. 여기엔 가택 연금 상태의 약간 명이 포함된다. 김정호는 이들 대부분이 풀려났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8월 24일 당일 연행된 이들에 한 해서일 뿐, 이후 지속적으로 연행된 이들, 특히 상당수의 북경대와 인민대 학생들을 포함하면 여전히 54명이 갇혀 있다. 스스로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아마 대부분 풀려났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 인터넷을 통해 조금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분명한 사실을 아니라고 해선 안 된다. 김정호는 최근 국내 진보언론들이 중국이 마치 “무법천지”인 것처럼 연상하게 한다고 불평하지만, 이들이 연행되는 과정은 실제로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연행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고지’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기도 했다. 북경대학 마르크스주의학회(北京大学马克思主义学会) 소속의 한 대학생이 연행될 땐 대낮에 카페에서 친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일방적으로 여러 차례 두들겨 맞고 끌려가기도 했다. 이는 이 사건과 무관한 동료 학생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그 학생은 이 사실을 목격한 후 너무 놀라고 경악한 나머지 자신의 위챗을 통해 이 사건을 고발했다. 하지만 그 친구 혹은 다른 이들이 공유해 올린 이 글은 올리는 족족 삭제되었다.

나아가 구속된 이들은 6개월이 가깝도록 행방이 묘연하기도 했다. 5개월이 지나서야 자신이 ‘유죄’라고 말한 학생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변호사 접견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어디에 있는지 그 부모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광둥성 경찰서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추측이 있을 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제37조는 “중국공민은 인민검찰원의 승인이나 결정 또는 인민법원의 결정이 없이는 체포되지 않고, 불법 구금 및 그 밖의 방법으로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규정하지만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서구 언론이 중국의 어떤 “경악한 일”에 대해 보도할 때 항상 그것에 허구적 상상이 개입되진 않았는지, 서구적 편견이나 혹은 단순히 반중공적인 종교집단에 의해 폭로된 과장된 사실이 아닌지 살핀다. 중국 관련 서구 언론의 보도에 대해선 그런 노력을 반드시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때문에 다각도로 조사했고, 직접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따라서 <신화사> 보도를 읊은 김정호보단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김정호가 말했듯, “둘 중 어느 한 쪽의 입장은 거짓”이다. 나는 자쓰 사건에 관해선 그가 심각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본다. ‘조사 없이 발언 없다(没有调查,就没有发言权)’.

김정호의 오독

김정호의 말처럼 중국이 실제 ‘노동탄압 국가’라면, 훨씬 많은 수천수만의 노동운동 탄압 사례가 줄줄이 보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정보를 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 내에선 언론 통제가 심각하고, 해외에서 정보 확보를 위해 방문하면, ‘외부세력의 개입’이라고 의심받기 일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중국 사회의 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 저항의 양상이 어떠한지는 가늠해볼 수 있다. 필자는 그것의 가장 유용한 통로가 <중국노공통신(China Labour Bulletin)>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중국 바깥의 지원을 통해 성장하긴 했지만 중국 쟁의 상황에 대해 가장 신속하게 다양한 정보가 유통되기 때문이다. <중국노공통신>이 운영하는 텔레그램 채널엔 매일같이 새로운 쟁의 소식이 올라온다. 대부분 임금 체불이나, 노동자 동의 없이 공장을 폐쇄하면서 벌어진 저항이다.

심지어 김정호는 중국의 높은 공회 조직률을 들어, “중국이 노조하기 좋은 나라”라고 까지 강변한다. 그의 말처럼 중국 노동자들은 합법적 절차를 거쳐 공회를 설립할 수 있으며, 나아가 중화전국총공회(이하 ‘전총’) 역시 최근 공회 조직율을 높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공회에서 진정 노동자를 위해 복무하는 대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광둥성을 제외한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각 기업공회의 대표는 노동자의 직접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다. 광둥성에서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다. 이는 2015년 혼다자동차 파업 이후 신세대 농민공들이 ‘민주적인 공회’에 대한 거센 요구를 하자 이뤄진 개혁이다. 하지만 최근 광둥성의 각 공장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이 잇따라 해고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이것의 전국적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기업 단위에서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수 없는 공회를 제대로 된 공회라고 부르긴 어려워 보인다.

중국노공통신의 중국 파업 지도

나아가 이렇게 존재하는 공회들조차 제대로 선거를 치르지도 않는다. 선전시에서 가장 큰 공장인 폭스콘에서 기업공회는 몇 년 째 선거를 제대로 치룬 적이 없다. 어떤 노동자들은 공회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문을 갖기 시작했지만, 회사 측의 적극적인 협력자 역할을 해온 공회 지도부는 선거 시행 공고조차 한 적이 없다.

노동자가 공회에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 역시 대다수 공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일하면서 겪는 부당한 일을 공회에 호소했을 때 묵살되거나 무마되었다는 사례들에 대해 김정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이 역시 극소수 사례에 불과하니 중국은 노동탄압 국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중국의 노동자들 상당수는 ‘공회’를 탄압기구라고까지 인식하진 않는다. 나아가 이런 공회를 넘어 ‘독립노조’를 설립하자는 요구를 광범위하게 갖고 있지도 않다. 필자 역시 과연 지금이 ‘독립노조’를 설립할 권리를 요구할 있는 정세인지 의문스러우며, 그것에 대한 중국 밖의 바람이 중국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공회가 노동자들의 조직이 아님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잘 해야 노동자와 사측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무색무취한 공간이거나, 혹은 사측과 생산량 협의를 통해 노동자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묵살하는 조직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필자는 중국의 노동자운동이 “어용노조인 공회에 맞선 독립노조 건설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자쓰 노동자들의 요구 역시 독립노조 건설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공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데 이들에게 돌아온 건 갑작스런 공회 설립 거부와 핵심 주동자에 대한 일방적 해고 통보, 탄압이었다.

모름지기 연구는 현실의 사실들에 근거해야 한다. 김정호가 법률 문구와 가입률이란 수치만을 근거로 중국이 노동탄압 국가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은 현실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려면 엄청난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저항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사례들을 수집하면서, 이들의 현실이 드러내는 진상을 파악함으로써, 중국 노동자운동 및 한국 내 국제주의 실천의 진테제를 도출하는 것이다.

김정호는 중국공산당을 대단히 크게 신뢰하는 모양이다. 중국공산당의 현능주의 정치가 가진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소개한 바 있고, 필자 역시 관심이 많은 영역이다. 하지만 공산당이 “각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공산주의 이념에 투철한 사람들을 입당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주장이나, 여전히 중국공산당이 민주집중제에 의거한 통치 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선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필자가 만난 청년 당원들의 경우 실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함에도 그저 앞으로의 출세를 위해 가입하는 케이스가 압도적이었다. 청년들에게 공산당 가입은 출세의 통로로 인식될 뿐이지, 김정호가 말하는 신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당원이 누구인가? 바로 43조원의 재산을 가진 자본가 마윈이다. 당원의 직업 분포만 보더라도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당인지, 자본가의 정당인지 의심스럽다. 2001년 장쩌민(江澤民)의 ‘삼개대표론(三个代表论)’ 이후 노동자 당원 수는 지속적으로 줄고, 자본가 및 관리자층의 당원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관리자층의 숫자는 이미 노동자 당원 숫자를 280만 명 이상 앞질렀다. 만약 전체 인구 중 자본가 및 관리자층이 차지하는 비중과 노동자 비중을 고려해 따진다면 그 정도는 훨씬 심각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필자가 만난 좌파 활동가나 청년들은 중국공산당은 이미 정치엘리트들과 자본가 및 관리자 등 엘리트들의 집정당이 된 지 오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부의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뭐라고 말할까? 언제까지 이런 현실을 무시할 것인가?

이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김정호와 공유하는 바가 있다면, 파업의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노동자계급에게 무조건 유리할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파업들의 경우, 점차 ‘공회 투표권’ 등 요구가 확대되고 있으나, 여전히도 임금 체불이나 사회 보장 등 아주 초보적인 요구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의 한계 역시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의 활동가들이 언급하는 것 중 하나는 노동자운동이 경제주의적인 요구 안에 갇히고 비정치적이며 실용주의적 제한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함께 성장하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집단적인 성장과 더불어 보다 나은 사회를 상상하고 꿈 꿀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노동자운동은 보다 정치화되면서 공회는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성장은 단순히 임금 상승에 머무를 수 없다. 믿고 기다리면 당의 엘리트들이 대신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스스로 사유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해석하고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당이 부여한 의무에 충성하면 언젠가 일방적으로 어떤 혜택들을 분배해주겠다는 식의 통치는 공산주의 운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국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의 좌절과 모순 이후 품게 된 이와 같은 모순과 오류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형용모순의 탑을 쌓는 데 일조해왔다.

불행히도 김정호의 시선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기이한 신뢰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중국의 낙후된 노동자운동이 보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사회가 이미 ‘변혁’을 이루었다고 보고, 앞으로는 ‘건설’이 남아있다고 다분히 단계론적이고 덩샤오핑적인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와 같은 혁신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한 그의 관점이 한국의 노동자운동에 사소한 영향이라도 끼칠까 우려스럽다.

이견과 갈등으로 분열된 중국 좌파

김정호는 일부 마오(주의) 좌파들의 미숙함에 대한 비판에 덧붙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필자 역시 ‘유토피아(乌有之乡)’라는 노회한 마오 좌파 집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자쓰 사건의 핵심에 놓인 청년 마오 좌파들은 유토피아와 거의 무관하다. ‘유토피아’나 자신이 학교에서 잠시 만난 몇몇 골방 좌파에 대한 인상을 빌미로 오늘날 중국의 청년 좌파들에 대해 재단하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보라. ‘유토피아’ 등 옛 마오 좌파들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건 이들이 현실에서의 실천과는 거의 무관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농민공 집단에 대해서도 거의 무관심했고, 연안지역에서 증대하는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도 개입을 하지 않았다. 청년 마오 좌파들이 이들과 분별정립해 등장한 이유는 이런 식의 태도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은 ‘유토피아’ 등 노좌파들이 ‘말’로만 급진적 말을 읊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마오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설사 청년 마오 좌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좌파라고 해서, 그들이 보는 중국 사회의 어떤 현실까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들이 서구 NGO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운동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거나, 스스로 농민공들과 연대해 함께 노동자운동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진의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 북경대와 인민대 학생들은 지난 몇 년간 대학 내에서 청소·경비 노동자들과 연대했고, 이들의 실태를 조사해 발표하거나, 이들과의 다과회 등을 열기도 했다. 그런 연대를 학교를 넘어 공단지역까지 확대하려 했던 게 이들이 가진 꿈이었다.

중국에는 북경대학 마르크스주의 그룹만이 아니라 다양한 좌파 그룹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논쟁하고 경쟁하며 매우 제한적인 한계 안팎에서 운동적 실천을 벌이고 있다. 김정호는 이들 민간영역의 좌파들이 자신감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작은 비판만 해도 바로 삭제 검열을 당하는 상황에서 과연 김정호라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필자 역시 중국의 좌파 운동 혹은 자생적인 노동자운동이 한국보다도 더 뒤쳐져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혁명의 역사를 거친 후, 기나긴 운동 탄압과 자본의 길을 거치면서 ‘경험’은 실종되어가고 있다. 북경대학 마르크스주의 학회의 경우 마오 좌파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든지 ‘이견’을 가질 수 있다. 필자 역시 이에 대해 내가 가진 의문을 정중하게 언급했고, 심지어 그들의 선전 방식이 너무 세련되지 못해서 청년들을 설득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는 사소한 조언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열린 마음으로 듣고 반박하거나, 자신들의 약점에 대해 담담하게 인정했다.

나는 운동은 여러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개방적이고 정당하게 논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직접 만나서 조용히 토론하는 게 아니라면, 이런 개방과 논쟁이 쉽지 않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즉, 다른 사회에 대해 비평할 때에는 이런 객관적 조건이 만드는 명징한 차이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실제 어떤 좌파 그룹들은 북경대학 마르크스주의 출신 그룹의 투쟁이 너무 맹동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어떤 지지 활동도 하지 않는다. 비록 주장 자체는 옳지만 자신들의 실력이 극히 미비하니 “때가 아니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다. 나는 이런 식의 정세 판단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엄혹한 탄압에 대해서는 함께 연대하고 돕는 게 마땅하겠지만, 탄압을 피하고 싶어 하는 심정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좌파들도 어떤 그룹의 부족함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서로 논쟁하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 크게 잘못됐다.

적과 아군을 나누기 어려워진 시대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것은 혁명에 있어 첫 번째 문제이다.”(마오쩌둥). 김정호가 마오쩌둥의 말을 빌어 말했듯 사회운동에서 적과 아를 구분하는 건 때때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일은 김정호의 시대보다는 훨씬 어려워졌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우리는 이런 ‘이해’와 ‘판단’을 보다 정확하고 계급적인 이해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어서만이 아니라, 막대한 국력과 자본력, 인구가 가진 막대한 힘,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 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나라다. 나아가 중국은 우리와 인접한 두 나라 중 하나이며,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 역시 매우 크다. 한국의 많은 자본이 중국으로 진출하기도 했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물건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사회운동의 전략전술을 고민할 때 그것의 객관적 정세 조건이 면밀하게 고려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면, 중국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우리는 중국만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 각국 사회운동들의 국제연대는 매우 위축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자본은 매우 자유롭게 동아시아 각국으로 이동하고 있고,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의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오고 있지만, 사회운동의 국제연대가 이토록 미미하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본에 의한 계급투쟁 국면에 있어서, 노동자운동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태다.

2006년 인도 카라카치에서 열린 아시아사회포럼

나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보다 똑바로 중국 사회를 인식하고, 자신의 시선으로 아시아적 정세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뉴욕타임즈>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를 베낀 보도들만을 보고 아시아 정세를 인식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대륙과 타이완, 홍콩 등 중화권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계급적인 시야를 갖고, 어떤 국제주의적 연대를 통해 대안적인 아시아, 혹은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고 실천할지 고민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겐 그런 전략이 전무하다.

국제연대 실천의 조건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각국 민중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동아시아 국제연대라는 과제에 있어서, 대중이데올로기 만연한 민족주의, 근대적 의미의 국가관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는 중대한 과제다. 주지하다시피 ‘민족’의 상당한 영역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라는 레토릭이 만든 신화와 달리, 근대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지만, 기실 오늘날 각국 민중들에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사회적·역사적·경제적·정치적 요인을 복합적으로 안고 있다. 한국 사람들 상당수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과 한족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맹신하기 때문에 근거 없는 ‘혐오’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고, 중국인들의 경우 강화되는 ‘중화주의’적 선전 속에서 타국민들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점차 커지고 있다. 최근 홍콩에서 벌어진 우산 혁명의 주요한 감정적 근거는 대륙인에 대한 ‘혐오’이기도 했으며, 나아가 중산층이 지닌 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나아가 최근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반중 시위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연대를 상상할 때 이런 조건들을 총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점증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국경을 넘어선 계급적 단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국제연대의 기초적인 네트워킹을 어렵게 한다. 나아가 자본에 의해 동아시아에 구축된 분업 구조와 공급 사슬은 노동자들을 국경을 넘어 이동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런 조건에서 국적을 넘어선 연대 이념을 대중화하지 못하면, 노동의 이주나 국가 간 대립이 빚는 각종 갈등들을 제대로 대면하기 어렵다. 각국 노동자계급은 타국민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내면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순을 응시하지 못하도록 방해받는다.

헌데 동아시아 사회운동의 국제연대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공장’이자 ‘금융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좌파와 사회운동들이 축적해온 네트워크망에 비해 매우 미약하다. 반면 자본은 구조조정이라는 무기를 등에 업고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들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구미의 휴대폰 공장과 광주의 냉장고 공장 물량을 철수해 베트남으로 집중하며 베트남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고, LG전자 역시 베트남에 대규모 생산단지를 조성했다. 보다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결과다. 많은 중간재(부품)가 일본이나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되고, 이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조립 공장을 거쳐 완성품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는 다시 북미와 유럽 등 시장으로 수출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베트남의 사정, 특히 베트남 노동자들의 사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을 방문한 이건희와 베트남 노동자

이는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첫째, 언론 통제가 심각하고, 둘째, 중국 내 노동운동의 미약함과 탄압 때문에 발전이 더디며, 셋째, 국제연대에 입각한 교류와 실천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 이후의 조건 속에서 각국 민중의 불만은 점증하는 사회 불안정과 함께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는 예멘에서 온 난민만이 아니라, 다른 곳 어딘가에서 와서 이 땅에서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정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 수많은 경계들을 나누며 적대하고 있다. 계급 내의 적대와 국경을 경계로 한 적대가 겹쳐진 채 모순이 늘고 있다. 사회운동이 당면한 갈등과 불만을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대응하고, 국제주의적 실천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일국의 범주를 넘어서는 다양한 사안들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가

누가 적인가? 국경을 넘나들며 노동자들을 ‘바닥을 향한 경주’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보다 좋은 착취를 구상하는 한중일의 자본가들이, 동아시아 민중 모두의 적이다. 누가 아군인가? 지금은 비록 혐오하고 적대하지만, 이해하고-교류하고-단결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이 우리의 아군이다.

중국은 적인가 아군인가? 중국에서 중국의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2억9천만 농민공 이하 노동자계급과 모든 민중들이 ‘미래’의 아군이다. 개인주의·자유주의 정서가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중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중국의 지식-청년들이 우리의 아군이다. 비록 자유주의자이지만, 자신의 노동과 삶 속에서 언제든 급진화될 수도, 후퇴할 수도 있는 여타 청년들이 우리의 아군이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은 동아시아 민중의 아군인가 적인가? 좌파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을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탄압하는 집정당은 우리의 적이다. 반면 그런 가운데서도 농촌 토지의 사유화를 막으려 애쓰고, 농민공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쓰고, 조용히 숨어서라도 중국공산당의 민주적 개혁을 꿈꾸는 집정당 내의 어떤 진지한 그룹들은 아군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중국공산당을 쇄신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낮은 수준의 교류와 이해를 시도하는 단계인 이상, 이 기적에 가까운 가능성과 노동자운동 성장을 통한 대중운동적 가능성 모두를 고려하며 관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가능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파가 여전히 국제연대에 대해 미약한 관심을 보이면서, 아무런 실천적 도전과 투자를 감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미약한 수준에만 머무를 것이다. 그것의 끝은 아시아 좌파 모두의 불행이다.

점증하는 모순 속에서도 중국 사회에 여전히 ‘희망’이 있는 이유는 관방이 아닌 민간 영역에서 성장해온 좌파들과 사회운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집정당의 붕괴 속에서 보다 급속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김정호가 여전히 사회주의자라면, 그는 모순들을 부정하며 애써 억누르는 방식으로만 대응하는 관방의 편에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이처럼 중국 사회 모순의 현장 곳곳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사회운동들의 편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마치며

끝으로 <레디앙>이 사회운동의 관점이 결여된, 덩샤오핑적인 입장을 게재하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 모든 매체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기 색깔과 포지션이 있다. 매체의 편집 기능은 컨텐츠를 기획 및 수집하고 해당 매체의 색깔에 맞게 산출해내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레디앙>이 개방적이고 논쟁적인 매체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색깔의 진폭에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하며, 사실 관계에 대한 검증이 불명확한 콘텐츠는 게이트키핑을 해야 한다. 중국에서 십수년을 공부했기 때문에 발언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충분한 조사를 통해 분석을 함으로써 발언권이 생기는 것이다.

김정호는 실명으로 얼마든 주장해도 무방한 글을 썼지만, 필자는 결코 실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신세다. 김정호는 내가 중국에 있더라도 얼마든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쓸 수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건 김정호 외에는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허언에 불과하다. 나는 당장 쫓겨날 걱정을 하며 이런 글을 써야 한다.

필자는 김정호의 주장에 빠르게 반박해야 했기 때문에, 아직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많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담아야 했다. 이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실천과 인식 확대를 통해 이 난점을 극복해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국제주의적 관점이 보다 성숙해지길 기원한다. 국제주의는 단지 타국의 운동을 돕는 일이거나 어느 ‘부문’이 아니라, 역사적·사상적 상호참조를 통해 일국 내에 갇혀 있을 때 빠질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돌파하기 위한 정세적이고 사회운동적·이념적 실천이자, 관점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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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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