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비꽃의 이름 유래기②
    [푸른솔의 식물생태] 오랑캐 행위?
        2019년 01월 29일 0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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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제비꽃의 이름 유래기①”

    ​3. 제비꽃과 민속문화

    (1) 제비꽃에 대한 민속문화 기록이 없다?!

    오랑캐꽃이 본래의 고유 명칭이고 제비꽃이라는 이름은 일본 정서와 잇닿아(?) 있다는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제비꽃이라는 이름이 일본 정서와 잇닿아 있다는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주장은, 우리는 제비꽃과 관련한 자원식물(민속문화)에 대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일본은 제비꽃에 대한 유별난 정서가 있고 꽃씨름 문화의 대표적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들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내용을 추가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에 대한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 우리나라 전역에 흔하게 분포하는 여러해살이 제비꽃이지만, 19세기 이전 고전에는…(중략)…자원식물로서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 우리나라 일부 기록물에 나타나는 장수꽃, 씨름꽃, 외나물 등은 모두 일본 습속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일본에는 에도시대 이래로 하나수모우(花相撲)라는 아이들의 ‘꽃씨름’ 놀이가 있는데 그 대표재료가 바로 제비꽃이다.

    – 실제로 1937년 제비꽃이라는 한글명의 최초 기재에서도 물 찬 제비와 같이 예쁜꽃에서 비롯한다는 후학의 설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제비꽃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유별난 정서에 잇닿아 있어 보인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자연과 생태, 2016), 224~225쪽].

    ​과연 그러한가?

    사진11 서울제비꽃, 2016/4/16/ 경기도 남한산성; 잎이 보다 넓고 털이 많으며 인가 부근과 저지대 산지에서 주로 자란다

    사진12 호제비꽃, 2017/4/8/ 충남 아산; 잎이 길고 털이 많으며 인가부근에서 주로 자란다

    사진13 둥근털제비꽃, 2017/4/8/ 충남 광덕산; 잎과 열매가 둥글고 털이 많으며, 일찍 개화하는데 경기도에서 2월 중순경부터 개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14 졸방제비꽃, 2016/5/1/ 경기도 불곡산; 원줄기가 있고 원줄기에서 꽃과 잎이 달린다

    사진15 콩제비꽃, 2013/5/5/ 촬영자 숲속여행; 경기도 동구릉 : 원줄기가 있고 잎이 둥글다

    (2) 약용식물로 이용한 기록들

    – 동의보감(허준, 1613): 紫花地丁
    – 의림촬요(양해수, 1676): 紫花地丁
    – 마과회통(정약용, 1798): 紫花地丁
    – 물명고(유희, 1824) : 菫菜, 紫花地丁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如意草

    중국식물지(2018)는 한자명 紫花地丁(zi hua di ding)을 중국에 분포하는 제비꽃 종류인 Viola philippica Cav.(1800)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 한의학에서도 널리 제비꽃속 식물의 지상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청열해독의 효능을 가진 한약재로 활용하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안덕균, 『한국본초도감』, 교학사(개정증보판, 2014), 86쪽 참조].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는 紫花地丁(자화지정)을 한약재로 기록한 『동의보감』과 『의림촬요』에서 大薊(대계 : 엉겅퀴)의 일종이라고 하였으므로 자화지정이 정확히 어떤 식물을 지칭하는지에 대하여 혼선을 빚어 왔다. 1820년대 중엽에 저술된 유희의 『물명고』는 紫花地丁(자화지정)을 大薊(대계 : 엉겅퀴)와 분리하여 별도 식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물명고』는 제비꽃속 식물을 의미하는 菫菜(근채)를 별도로 기록하여 紫花地丁(자화지정)이 어떤 식물을 지칭하는지 또 다른 혼선이 있다. 이러한 식물명의 섞임(混淆; 혼효) 현상은 명칭과 약효를 근거로 명칭 위주로 국경과 지역을 넘어 전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던 종래 본초학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의림촬요』와 『마과회통』은 紫花地丁(자화지정)의 중요 약성을 解毒(해독)으로 기록함으로써 제비꽃 종류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남기기도 하였다.

    종래의 한의학에 관한 전통지식을 근대 식물분류학의 관점에서 재정리할 목적으로 저술된 『조선산야생약용식물』(1936)은 菫菜(근채; 제비꽃 종류)를 조선의 민간에서 생약으로 사용하는 약재로 기록하였다[하야시 야스하루·정태현 공저,『조선산야생약용식물』, (조선총독부임엄시험장, 1936), 246 쪽 참조]. 일본인 모리 다메조가 저술한 『조선식물명휘』(1922)도 紫花地丁(자화디졍)을 ‘藥'(약)으로 사용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약용식물로 기록한 옛문헌의 紫花地丁(자화지정)과 菫菜(근채)가 정확히 어떤 식물을 말하는 것인지는 다소 불명확하지만, 이를 제비꽃 종류로 보아 약용하였거나 이와 별도로 민간에서 제비꽃 종류를 해독성 약재로 활용하여 왔음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중국식물지(2018)에서 한반도에 분포하는 콩제비꽃과 유사하게 형태를 가진 Viola hamiltoniana D. Don(1825)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하는 如意草(여의초)를 기록하였다. 여의초에 대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는 “又治多年膿血惡瘡 採來陰乾擣末 雞子淸調敷 神效 卽瘰癧 無名腫毒 用蔥白與蜜同搗敷 神效”[여의초는 또 여러 해 묵은 피고름이 든 악성 종기도 치료할 수 있는데, 방법은 여의초를 캐다가 그늘에 말려서 가루로 만든 다음 달걀로 깨끗이 조제하여 환부에 바르면 신효를 본다. 그리고 연주창(瘰癧)이나 이름도 모르는 독성 종기에도, 파뿌리와 꿀을 여의초와 섞어 찧어 환부에 바르면 신효를 본다.]라고 하였다. 如意草(여의초)에 대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은 제비꽃 종류를 약용의 자원식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3) 구황식물로 식용한 기록들

    – 물명고(유희, 1824) : 菫菜
    – 임원경제지(서유구, 1827) : 菫菫菜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 如意草

    유희가 저술한 『물명고』(1824)는 菫菜(근채)에 대하여 “食之甘滑”(이를 먹으면 달고 부드럽다)고 하여, 식용으로 쓸 수 있음을 기록하였다. 또한 서유구가 1827년 저술한 『임원경제지』의 인제지(仁濟志)는 잎을 먹을 수 있는 128종의 구황식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菫菫菜(근근채)에 대하여, “菫菫菜 生田野苗初搨地生 葉似鈹箭頭而葉帶甚長 葉間攢葶開紫花結三辨蒴兒 中有子如芥子茶褐色味甘 抹苗葉煠熟水浸淘淨油鹽調食”(근근채는 밭과 들에 자라는데 싹이 처음에는 땅에 붙어서 자란다. 잎은 파전두(鈹箭頭; 뾰족한 화살촉의 끝을 말함-필자 주)와 비슷한데 잎의 띠가 매우 길다. 잎 사이에 옹이 같은 것이 모여 있고 자주색으로 꽃이 피며 삼변으로 된 삭과가 맺힌다. 가운데에 겨자 크기만한 종자가 있고 다갈색이고 맛이 달다. 싹과 잎을 채취하여 데친 후 물에 깨끗이 씻어 기름과 소금으로 조리해서 먹는다)라고 기록하였다.

    菫菫菜(근근채)는 본래 중국 명나라의 주숙(朱櫹:?∼1425)이 편찬한 『구황본초』(救荒本草, 1406)에 근거한 명칭으로서, 현재 중국에서는 널리 제비꽃속(Viola) 식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王錦秀·汤彦承 译注, 株橚 著, 『救荒本草 译注』, 上海古籍出版社(2015), 111쪽 참조].

    또한 종래의 식용식물에 관한 전통지식을 근대 식물분류학의 관점에서 재정리하고자 저술된 『조선산야생식용식물』(1942)은 菫菫菜(근근채)를 현재의 제비꽃(V. mandshurica)으로 보고 식용식물로 기록하였다[하야시 야스하루·정태현 공저,『조선산야생식용식물』, (조선총독부임엄시험장, 1942), 162 쪽 참조]. 일본인 우에키 호미키가 저술한 『조선의 구황식물』(1919), 모리 다메조가 저술한 『조선식물명휘』(1922)와 무라다 시게마로가 저술한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1932)도 제비꽃을 식용하는 식물로 기록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如意草(여의초)에 대하여 “若値大軍大荒無糧絶食之時 采來將松柏葉一切靑草 只用此葉包褁 到口細嚼 雖百草俱變爲美味 食之可以延生 此草不擇地而生 細尋可得”[만약 큰 전쟁이나 큰 흉년을 만나 식량이 없어 먹을 것이 떨어진 때에는, 여의초를 캔 다음 솔 잎과 잣나무 잎이나 일체 푸른 풀을 가져다 여의초로 싸서 입 안에 넣고 잘 씹으면, 아무 풀이라도 모두 아름다운 맛으로 변하므로 여의초를 먹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여의초는 땅을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자라 자세히 찾아보면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如意草(여의초)에 대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 역시 제비꽃 종류를 식용의 자원식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4) 제례의식을 위한 식물로 이용한 기록들

    – 동춘당문집(송준길, 1680) : 菫
    – 사계전서(김장생, 1685) : 菫
    – 예기보주(김재로, 1785) : 菫
    – 순암집(안정복, 18세기 말엽) : 菫菜​
    – 상변통고(유장원, 1830) : 菫

    옛문헌은 혼례 후 시부모가 돌아가셨을 경우에 신부가 들어간 지 석 달 만에 전채(奠菜 : 제사 때 채소 바치기)라는 예를 행하는데 이때 菫(근) 또는 菫菜(근채)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菫(근) 또는 菫菜(근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중국에서도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 해당 식물의 종류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18세기 말엽 저술된 『순암집』은 ‘按菫與芹通’[살펴보건대, 근(菫)은 근(芹)과 통한다]고 하였으므로 전채에 미나리(芹)를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서 菫(근) 또는 菫菜(근채)는 제비꽃 종류를 지칭하기도 하였으므로, 위 문헌의 菫(근) 또는 菫菜(근채)를 제비꽃 종류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제비꽃 종류를 이러한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이를 제비꽃으로 해석하는 견해로는 한국콘텐트진흥원의 ‘제비꽃’ 부분 참조].

    ​(5) 소원성취를 상징하고 기원하는 식물로 이용한 기록들

    사진16 김홍도, 『황묘농접(黃猫弄蝶』, 간송미술관제공; 전면에 제비꽃 종류가 그려져 있다.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如意草

    『오주연문장전산고』는 “​如意草形 不過三寸餘 葉多似撥菜葉 又似杏子葉 中間挺出一枝 狀如意鉤 因名如意草”[​잎이 많아 발채(撥菜) 잎과 같고 또 행자(杏子; 은행나무) 잎과도 같으며, 중간에서 가지 하나가 뻗어나와 모양이 여의구(如意鉤)처럼 생겼기 때문에 여의초라고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여 그 유래를 밝혀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의 자구(字句)를 그대로 읽으면 如意草(여의초)는 ‘뜻(意)대로 이루어지다(如)’를 뜻을 포함하고 있어 소원성취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김홍도(1745~1806)가 그린 황묘농접도는 그 정면에 제비꽃(‘호제비꽃’ 또는 ‘서울제비꽃’으로 추정된다)을 그려 놓았다. 제비꽃을 如意草(여의초)라고 부르기도 하였므로 그 자구에 근거하여 소원성취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은 物理書(물리서) 등 중국기록에 의존한 것이므로 그 저술 이전에도 여의초라는 이름은 조선에도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위 황묘농접도에서 고양와 나비 그림은 묘질도(耄耋圖)라고 하여 각 70세와 80세의 의미를, 돌은 수석(壽石)은 장수의 의미를, 패랭이꽃은 석죽화(石竹花)로 한자어의 발음을 근거로 축하하다는 의미를, 제비꽃은 여의초(如意草)로 뜻하는 대로 소원성취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림 전체는 뜻하시는 대로 장수하기를 축원한다는 뜻에서 그려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 초화놀이의 수단으로 이용한 기록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과 달리 일제강점기 이전에 저술된 우리의 여러 옛 문헌에도 초화(草花)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중 제비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몇 종류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풀각시/각시놀이>

    – 동국세시기(홍석모, 1849) : 閣氏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 閣氏遊

    어린 아이들이 막대기나 수수깡의 한쪽 끝에 풀로 색시 머리 땋듯이 곱게 땋아서 인형을 만들어 노는 놀이는 풀각시 또는 각시놀이(각시놀음)이라고 한다. 19세기에 저술된 『동국세시기』와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그러한 놀이가 조선의 풍습으로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특히 동국세시기는 음력 3월(三月)의 세시풍속으로 각시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女娘採取靑草 盈把者作髻削 木而加之 着以紅裳 謂之閣氏 設褥席枕屛以爲戱” [어린 처녀들은 풀을 뜯어 한 줌 되면 이것을 가지고 쪽머리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그것에 붙인 다음 붉은 치마를 입히는데 이것을 각시(閣氏)라고 한다. 이들은 이부자리, 베개, 머리병풍 등을 차려놓고 각시놀음을 한다.]라고 하였다.

    음력 3월이면 각종 제비꽃이 인가 부근에서도 만발할 때이었으므로, 위 문헌은 직접적으로 제비꽃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풀각시 놀이에 제비꽃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1941)에서도 ‘草人形'(풀인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를 비롯하여 다수의 지역에 이러한 놀이문화가 존재하였음을 기록한 바 있다.

    <풀싸움/풀내기>

    ​- 동국이상국집(이규보, 1241) : 鬪草戲
    – 가정집(이곡, 1364) : 鬪百草
    ​- 동문선(서거정, 1478) : 鬪草
    – 충암집(김정, 1552) : 鬪百草
    ​- 성수부부고(허균, 1611) : 鬪百草/鬪草
    – 상촌집(신흠, 1630) : 鬪草
    ​- 석주집(권필, 1631) : 鬪草
    – 낙전당집(신익성, 1654) : 鬪草
    ​- 청장관전서(이덕무, 1795) : 鬪草
    – 순암집(안정복, 18세기 말엽) : 鬪草
    – 태을암집(신국빈, 1799) : 鬪百草
    – 홍재전서(정조, 1814) : 鬪草
    – 연경재전집(성행응, 1839) : 鬪草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 鬪草
    – 송남잡지(조재삼, 1855) : 鬪草
    ​- 슈양의ㅅ.(연세대본, 연대미상) : 플ㅂ사흠
    – 홍루몽(번역본, 1884) : 플ㅄ.흠/플ㅄ.홈
    – 운양집(김윤식, 1914) : 拈鬪

    풀싸움은 옛문헌에서 鬪草戲(투초희), 鬪百草(투백초), 염투(拈鬪) 또는 鬪草(투초)라고 불리우던 놀이로 주로 봄이나 여름에 패를 지어 풀을 뜯어 모아 많은 종류를 뜯어 오거나 뜯어 온 풀 종류를 맞추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구한말에 기록된 문헌에는 한글로 풀싸움(플ㅂ사흠, 플ㅄ.흠, 플ㅄ.홈)이라는 명칭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놀이 문화는 중국에서 7세기초 저술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五月五日有鬪百草趾戱(단오에 여러 가지 풀싸움 놀이를 벌인다)”라는 내용을 기록한 이래 고려 후기의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하여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문집과 시문집에서 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1914년 저술된 『운양집』은 “閑來拈鬪學兒戱 多識群芳譜裏名”(한가로이 학동들 놀이처럼 풀싸움을 하니 책에 실린 여러 방초 이름을 많이 알게 되리)라고 기록하였는데, 이에 비추어 보면 주위에 있는 많은 풀 종류들을 풀싸움에 사용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봄에 행하는 풀싸움에는 인가 주변에서 제비꽃을 흔히 볼 수 있으므로 옛 문헌에서 직접적으로 제비꽃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풀싸움 놀이에 제비꽃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저술한 『조선의 향토오락』(1941)에서도 일본어로 쿠사쿠라베(草くらべ)라 하고 한글로 ‘풀네기/풀내기’라고 불리우는 놀이를 조선의 다수 지역에서 행하고 있음을 기록하였다.

    옛문헌에서 鬪草(투초)에 대하여 그 설명이 자세하지 않아 놀이의 구체적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중국에서 전래되어 고려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에 비추어 사용한 풀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이나 놀이의 형태도 많은 변형을 거쳤을 것이므로 아래에서 언급하는 꽃싸움이나 그 유사한 놀이들도 함께 지칭하는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17세기 저술된 『석주집』은 “國俗 才兒有鬪草之戲 與中國所云者不同”[국속(國俗)에 아이들이 풀싸움을 하는 놀이가 있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하여 중국의 것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되었음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꽃싸움/꽃씨름>

    사진17 제비꽃을 이용한 꽃싸움의 도해도

    – 성수부부고(허균, 1611) : 鬪草
    – 낙전당집(신익성, 1654) : 鬪草
    – 님의 침묵(한용운, 1926) : 꽃싸움

    꽃싸움(또는 꽃씨름)은 (i) 여러 가지 꽃을 꺾어 모아 가지고 수효를 대 보아 많고 적음을 내기하는 장난 또는 (ii) 꽃이나 꽃술을 맞걸어 당겨서 끊어지고 안 끊어지는 것으로 이기고 짐을 내기하는 장난을 말한다(표준국어대사전 중 ‘꽃싸움’ 참조). 이 중 전자는 앞서 언급한 풀싸움과 중복된다. 제비꽃을 이용한 꽃싸움(꽃씨름)은 후자를 말하는데 꽃자루(화경)을 잘라 서로 걸고 양쪽에서 각각 잡아 당겨 꽃이 끊겨서 떨어지는 쪽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짓는 놀이이다. 제비꽃 이외에도 진달래의 꽃술이나 질경이의 줄기 등이나 서로 걸어 끊어질 수 있는 여러 풀들이 이러한 놀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일본에는 에도시대 이래로 하나수모우(花相撲)라는 아이들의 ‘꽃씨름’ 놀이가 있는데 그 대표 재료가 바로 제비꽃”이라고 보고 그에 따라 씨름꽃, 장수꽃 및 제비꽃이 모두 일본의 정서에 닿아 있는 이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그러나 일본의 민속인 하나즈모우(はなずもう)는 꽃씨름 놀이가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정말로 일본의 꽃씨름의 문화의 영향 때문에 씨름꽃, 장수꽃과 제비꽃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을까? 우리의 민속문화에는 제비꽃의 꽃자루(화경)으로 꽃싸움(꽃씨름)을 하는 놀이가 없었을까?

    사진18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1941), 18쪽

    ​​1941년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의 민속문화를 조사한 『조선의 향토오락』을 살펴보면, 경기도 비롯한 각 지역에 제비꽃의 꽃자루를 이용하여 꽃싸움(花戰)을 벌이는 놀이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당시 조선에도 제비꽃을 이용한 꽃싸움(꽃씨름)이 존재하였음을 기록으로 명확히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앞서 소개한 풀싸움이나 꽃싸움에 대한 용어를 草合(초합), 鬪草(투초) 또는 草相撲(초상박)으로 사용할 뿐 화전(花戰)이라고는 하지 않으므로(이에 대하여는 三省堂大辭林 제공 Weblio 참조), 위 문헌에서 화전(花戰)은 당시 조선의 민속인 꽃싸움(꽃씨름)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당시 조선의 민속을 조사할 때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을 동원하였고 당시 조선의 행정기관의 관료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므로, 조사대상자에 의한 자료 왜곡의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무랴야마 지준의 조선 민속 자료 조사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김희영, 『무라야먀 지준의 조선인식』, 민속원(2014) 참조]. 따라서 여기서는 『조선의 향토오락』의 위 기록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본의 풍속이 스며들었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정도로 정리를 해 두기로 한다.

    사진19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넥서스Books; 개정판, 2004), 251쪽에서 재인용

    1930년에 학생지에 기록된 위 동시는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오랑캐라는 토속어가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 조선인 학생이 지은 시라는 것을 넉넉히 추론할 수 있다. 즉, 조선의 학생이 조선의 문화로 제비꽃의 꽃송이로 ‘ㅅ곳쌈'(꽃싸움)을 한 것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은 이미 식민지배가 시작된 지 20년이 경과하였고, 어린 학생의 눈에 반영된 것이므로 일본인이 하는 민속놀이가 학생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이 역시 일본의 풍습이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잠정적으로 생각하여 보자.

    꽃싸움

             ​- 한 용 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꽃이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고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해동서관(1926)]

    위 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1925년 저술하고 1926년에 출간된 『님의 침묵』에 실린 것이다. 진달래(두견화)의 꽃술을 따서 서로 걸고 꽃싸움(꽃씨름)을 하는 놀이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진달래 꽃술로 꽃싸움(꽃씨름)을 했다면 제비꽃 종류는 진달래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으므로 제비꽃의 꽃자루로 꽃싸움(꽃씨름)을 하는 풍속도 당연히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도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일본의 정서와 습속에 잇닿아(?) 있었기 때문에 저런 시를 적었을까?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옛문헌으로 돌아가 허균이 저술한 『성수부부고 』(1611)와 신익성이 저술한 『낙전당집』(1654)의 풀싸움(鬪草)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禁中佳節値三三(금중이라 삼월 삼질 좋은 철을 만나 하니)
    諸殿宮娥試薄衫(여러 전의 궁아들은 엷은 옷을 입어보네)
    爭向上林來鬪草(상림원을 향해 가서 다투어 투초하니)
    就中先取翠宜男(그 중에도 맨 먼저 원추리를 취하누나)[허균, 『성수부부고 』(1611)에서]

    其二 夏(두 번째, 여름)

    燕乳雕梁畔(제비는 채색 들보 가에서 새끼 먹이고)
    蜂喧玉砌陰(벌들은 옥섬돌 그늘에서 시끄럽다)
    宜男新鬪草(새로 돋은 원추리로 풀싸움을 하고)
    刺繡倦停針(자수 놓던 손 곤하여 바늘을 쉰다)[신익성, 『낙전당집 』(1654)에서]

    허균의 성수부부고는 중국시를 선별하여 뽑은 글이고, 낙전당집은 개인 시문집이다. 둘 다 의남초(원추리)로 풀싸움(鬪草)을 하는 것을 시로 읊고 있는데 시에 나타난 계절은 음력 삼월삼짓과 초여름이므로 이때 새로 돋은 원추리는 잎이 꽤 길게 자란 때이다. 이때 할 수 있는 풀싸움(鬪草)은 무엇일까? 긴 잎으로 고리를 걸고 서로 당겨 풀이 누가 먼저 끊어지는지를 겨루는 놀이는 불가능하였을까? 원추리로 그런 꽃싸움(꽃씨름)을 하였다면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당시는 일본의 정서와 잇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추론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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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일본의 ​하나즈모우(はなずもう, 花相撲)와 꽃싸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는 에도시대 이래로 하나수모우(花相撲)라는 아이들의 ‘꽃씨름’ 놀이가 있는데 그 대표재료가 바로 제비꽃이다.”라 하고 있다. 그런데 민중서림에서 발간하여 Naver에서 제공하는 일본어사전은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와 전혀 다르게 はなずもう(花相撲)에 대하여 “(정식대회 이외로) 임시로 흥행하는 (일본) 씨름 대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나즈모우는 임시로 흥행하는 일본 씨름을 말하는 것으로 임시대회이기 때문에 입장료나 상금 등을 꽃으로 행하는 것에서 유래한 일본의 풍습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었을 뿐 아이들의 놀이와는 관련이 없다. 일본 三省堂大辭林(삼성당대사림)에서 제공하는 Weblio와 기타 일본의 사전들도 이와 같이 해설하고 있다.

    사진20 三省堂大辭林編, 『 Weblio』中 はなずもう(하나즈모우) 참조

    일본은 중국의 鬪草(투초) 그리고 우리의 풀싸움과 같은 놀이를 옛부터 草合(초합), 鬪草(투초) 또는 草相撲(초상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명칭의 어원은 문헌상 기록에 의존하자면 모두 고대 중국의 鬪草(투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중국과 한국은 각자 상황에 맞게 풀종류와 놀이가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어린이들의 단순한 풀싸움을 의미하였다면, 일본에서는 궁중에서 그 놀이를 벌이면서 복잡하게 의식화하여 장소를 화려하게 꾸민 것은 물론이고 노래를 불렀으며 끝에 잔치까지 벌이고 꽃을 따로 재배하여 아름다움을 다투기까지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러한 취지의 견해로 김광언,『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2004) 중 “풀싸움” 부분 참조].

    따라서 일본에서 아이들이 제비꽃의 꽃자루를 고리로 걸고 어느 쪽의 꽃이 먼저 떨어지는 놀이가 있다고 해서 중국과 한국에 그런 놀이가 일본의 정서에 잇닿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놀이 형태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놀이 문화의 기본적 개념은 옛 문헌에 근거하여 보면 오히려 중국과 한국을 통해 일본에 전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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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놀이>

    제비꽃의 꽃자루와 함께 꽃을 따서 꽃자루를 두 줄기를 쪼개어 그 끝을 매고 동그랗게 만들어 그것을 손가락에 끼우면 꽃반지가 된다[제비꽃을 이용한 이러한 놀이에 대하여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넥서스Books; 개정판, 2004), 264쪽 참조]. 이러한 놀이는 『동국세시기』 등에 기록된 풀각시 놀이에 속하여 함께 행하여졌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수목원에서 조사한 제비꽃에 대한 식물명 방언 중 경기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반지꽃”, “반지꽃나물” 및 “반지나물”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러한 놀이가 행하여졌던 상황의 결과로 보인다[본글 제비꽃의 이름 유래기(1) 중 <사진8> 참조].

    또한 제비꽃이 수정한 후 열매가 익어 터지기 전에 씨앗이 흰색이면 쌀밥으로 하고 갈색이면 보리밥으로 하여 쌀밥을 많이 터뜨린 쪽이 이긴 것으로 하는 쌀밥·보리밥 놀이가 있다 [제비꽃을 이용한 이러한 놀이에 대하여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넥서스Books; 개정판, 2004), 258쪽 참조]. 국립수목원에서 조사한 제비꽃에 대한 식물명 방언 중 충청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보리밥쌀밥”, “발풀꽃”과 “쌀나무” 그리고 경기도에서 발견되는 “쌀밥보리밥”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러한 놀이가 행하여졌던 상황의 결과로 보인다[본글 제비꽃의 이름 유래기(1) 중 <사진8> 참조].

    제비꽃과 관련하여 이러한 다양한 놀이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앞서 살펴 본 풀각시, 풀싸움 그리고 꽃싸움(꽃씨름) 놀이가 한반도에서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사진21 서울제비꽃의 씨앗, 2017/6/17/ 경기도 마석; 쌀밥·보리밥 놀이에 갈색 씨앗은 보리밥이다

    사진22 졸방제비꽃의 씨앗, 2013/6/23/ 경기도 청계산, 쌀밥·보리밥 놀이에 흰색 씨앗은 쌀밥이다

    (7) 소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제비꽃에 대한 민속문화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한국식물태보감에서 19세기 이전 고전에는 자원식물로서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 우리의 제비꽃에 대하여 옛 문헌에도 약용, 식용뿐만 아니라 장수를 기원하거나 꽃싸움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민속문화에 이용한 기록이 현존하고 있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의 꽃싸움에 대한 시와 기타 기록에 비추어 제비꽃을 이용한 꽃싸움(꽃씨름) 놀이는 한반도에서도 행하여지던 민속문화로 이해된다.
    – 일본이 하나즈모(花相撲)는 꽃씨름을 하는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 꽃싸움(꽃씨름)을 포함한 풀싸움 문화는 동북아 3국에 모두 존재하므로 일본의 놀이를 근거로 제비꽃이 일본 정서와 습속에 잇닿아 있는 이름으로 볼 수는 없다.

    4. 제비꽃 이름의 유래

    일제강점기하에서 근대 식물분류학과 종래의 전통적 지식을 결합하고자 하였던 『조선식물향명집』(1937)은 V. mandshurica(옛 학명 : V. chinensis)에 종에 대한 조선명으로 오랑캐꽃, 장수꽃, 씨름꽃 그리고 제비꽃을 기록한 바 있다. 위에서 살펴 본 제비꽃에 대한 옛 명칭과 방언 그리고 민속문화를 참고로 하여 이러한 이름의 유래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씨름꽃의 유래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꽃이나 꽃술을 맞걸어 당겨서 끊어지고 안 끊어지는 것으로 이기고 짐을 내기하는 장난을 꽃싸움 또는 꽃씨름이라고 한다. 제비꽃을 꽃을 꺾어 이와 같은 놀이 도구로 사용한 것에서 씨름꽃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취지로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넥서스Books; 개정판, 2004), 251쪽 참조.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일본의 하나즈모우(はなずもう, 花相撲)를 근거로 씨름꽃을 일본의 정서에 잇닿아 있는 이름으로 보고 있으나, 하나즈모우(はなずもう, 花相撲)는 일본씨름 대회의 한 방식을 의미할 뿐 아이들의 꽃싸움(꽃씨름)과는 관련이 없고, 일본에 제비꽃으로 꽃싸움을 하는 문화가 있고 그것이 화려하게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한국명 씨름꽃이 일본의 정서에 따라 창출한 이름으로 보는 것은 논리 비약일 뿐만아니라 한국 문화성의 독자성과 고유성은 전혀 살피지 않은 주장이다.

    게다가 씨름꽃은 오랑캐꽃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이미 1937년 이전에 동아일보에도 등장하는 이름이고, 지역 방언에 씨름꽃, 씨름꽃나무 그리고 씨름꽃나물과 같은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는 것에 있어 비추어 보면 한국에서도 독자적 향토성을 가지고 고유하게 등장한 이름이라는 점을 추론케 한다[<사진8> 참조]. 게다가 국립국어원의 방언 조사에 의하면 제주도에는 “말싸움고장”이라는 이름이 현재에도 남아 있는데, 이는 말(馬)+싸움(鬪)+고장(꽃;花)의 합성어로 말로 싸움을 하는 꽃이라는 뜻이므로 씨름꽃과 그 뜻이 통한다. 이러한 이름은 씨름꽃이 한반도의 고유한 문화에서 형성된 이름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2) 오랑캐꽃 및 장수꽃의 유래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은 한불자전(1880)에 처음 등장하고 일본 또는 일본인이 기록한 조선식물 조사에 관한 자료에서 꾸준히 기록되었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오랑캐꽃이 본래의 고유 명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역시 제비꽃에 대한 여러 방언 중의 하나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리고 한국식물생태보감은 유래와 관련하여 “오랑캐가 사는 땅에 흔한 야생화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비꽃은 실제로 중국에서도 만주지역에서만 흔하게 분포한다”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이러한 취지로 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자연과 생태, 2017), 224쪽 참조].

    ​아마도 제비꽃의 학명이 Viola mandshurica로 종소명에 만주지역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에 착안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의 소장으로 근무하다 경성제대의 약학부 교수가 되는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 1891~1958)가 저술한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1917)에서 ‘오랑ᄏᆡᄭᅩᆺ’은 경성지역에서 주로 부르는 명칭으로 기록하였고, 수원농림전문학교(서울대 농과대학의 전신)의 교수이었던 우에키 호미키(植木秀幹)가 저술한 『조선의 구황식물』(1919)에도 ‘오랑ᄏᆡᄭᅩᆺ’은 경기와 강원 지역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실제로 제비꽃은 전국에 분포하고, 근대 식물분류학에 따른 종분류 방법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이 형성되었으므로 학명을 인식할 수도 없고 만주에 분포한다는 것을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조사할 수는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중요한 약재식물로 인식된 경우가 아닌 한 그러한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은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이 특정한 식물학자가 창조하여 명명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민중들이 만들어 불렀던 이름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앞서 살핀 것처럼 제비꽃 종류는 약용과 식용식물로 이용한 기록은 있으나 그 기록이 광범위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문헌의 기록은 놀이문화와 관련이 있다. 즉 꽃싸움(꽃씨름)의 중요한 도구이었으며 꽃싸움을 할 때 고리를 만들어 꽃을 먼저 떨어지는 쪽이 지므로 그 꽃의 모양에서 착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시인 이용악(1914~1971)이 1939년에 발표한 ‘오랑캐꽃’이라는 시는 오랑캐꽃의 유래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어찌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이용악, 『오랑캐꽃』, 아문각(1947) 참조]. 즉, 꽃불(거)이 독특한 모양을 취하는 꽃이 마치 먼 옛날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오랑캐의 모습처럼 생겼다는 형태에서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이러한 취지의 견해로 허북구·박석근, 『한국의 야생화 200』(중앙생활사, 2008), 181면 참조]. 제비꽃으로 꽃싸움(꽃씨름)을 행했던 문화는 이러한 이름이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23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조선총독부, 1917), 21쪽

    오랑캐꽃을 위와 같이 이해를 하면,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장수꽃’이라는 이름의 ‘장수’도 장수(將帥)로서 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랑캐꽃과 유사한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제비꽃은 무병 장수를 축원하는 상징으로도 사용하였고 그러한 내용은 김홍도의 그림에도 나타나 있으므로 장수(長壽)의 의미로 오래 살게 하는 꽃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을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장수꽃도 방언 조사에서 “장수꽃”과 더불어 함남 지역에서 “장쉬꽃”이라는 토착화된 발음 형태가 보이는 것에 비추어 『조선식물향명집』의 기록은 사정요지에 나타난 바처럼 지역 방언을 채록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장구한 나물 문화를 갖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물로서 격이 떨어지는, 그러나 나물 소쿠리에 늘 들어앉는 존재가 제비꽃이다. 나물 소쿠리의 질서를 깨트리는 녀석, 그것이 오랑캐꽃이다. ‘불알이 다섯 달린 개’를 뜻하는 오랑견(五郞犬)의 이물교혼(異物交婚)의 설화에서처럼, 이민족(異民族)을 멸시하고 낮잡아 이르는 오랑캐가 제비꽃 이름 속에 틈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비꽃과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19세기와 20세기는 탐관오리와 일제의 착취와 수탈에 의하여 굶주린 사람이 넘쳐나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나물로 보고 먹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엽 저술된 『물명고』는 맹독성 식물인 놋젓가락나물(A. volubile var. pubescens)을 ‘놋져나물’이라는 이름으로 식용한다는 취지로 기록하였고, 20세기 중엽 저술된 『조선산야생식용식물』(1942)는 역시 맹독성 식물인 천남성(A. amurense)의 어린잎을 역시 식용하는 식물로 기록한 바 있다. 식물명이 탄생한 연대를 추적하고 그 시대의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 당시에 사용되던 용어의 의미 등을 고려하지 않고 단시 현재의 시각과 뜻에 근거하여 과거에 탄생한 이름을 유래를 찾는 것은 흔히들 ‘민간어원설’이라고 한다. 그러한 유래가 실제 현실을 반영할 리는 만무하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은 이해되지 못할 복잡한 한자어를 섞어 쓰며 오랑캐꽃의 또 다른 유래를 설명하고 있지만, 장구한 나물 문화가 있다고 전제한 그 장구한 나물 문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시기의 어떤 풍속을 말하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3) 제비꽃의 유래

    제비꽃은 꽃이 물찬 제비와 같이 예쁘다거나 튀어 나온 꽃뿔(거)의 모양이 제비를 닮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론된다. 뒤통수의 뾰족한 머리털을 제비초리라고 한다. 제비초리에 대하여 17세기의 『역어유해』(1690)는 ‘ 져븨초리’ 19세기의 『 물명고(1824)는 ‘졉의쵸리’로 기록한 바 있다. 제비꽃은 꽃불(거)의 나온 모양이 바로 제비초리와 닮아 있다[이러한 취지의 견해로 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래』(일조각, 2005), 453면; 백문식, 『우리말 어원사전』(박이정, 2014), 441면 참조]. 전통적 식물명은 그 이름을 만들고 사용한 사람들이 해당 식물을 인식하였던 생활문화와 직접적인 관련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 것에 비추어 제비꽃이라는 이름도 그에 대한 놀이 문화의 기록이 광범위하게 실존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옛 이름에서 제비가 들어가는 식물명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러한 식물명들의 ‘제비’도 잎이나 꽃의 형태 등이 제비를 연상시키는 것과 관련 있는 이름들로 추론된다.

    제비붓꽃<Iris laevigata Fisch.(1839)>

    – 진명집(권헌, 1849) : 燕子花
    –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85?): 杜若/燕子花
    – 화하만필(문일평, 1934) : 燕子花/제비꽃
    – 조선식물향명집(정태현외 3인, 1937) : 제비붓꽃

    제비꿀<Thesium chinense Turcz.(1837)>

    – 향약채취월령(유호통 등, 1431) : 夏枯草/鷰蜜
    – 향약집성방(유호통 등, 1433) : 夏枯草/鷰矣蜜
    – 동의보감(허준, ​1613) : 夏枯草/져븨ᄭᅮᆯ
    – 산림경제(홍만선, 1715) : 夏枯草/져븨ᄭᅮᆯ
    ​- 물명고(유희, 1824), 夏枯草/저비ᄭᅮᆯ
    – 의종손익(황도연, 1868) : 夏枯草/져븨ᄭᅮᆯ
    – 방약합편(황필수, 1884) : 夏枯草/져븨ᄭᅮᆯ

    제비쑥 <Artemisia japonica Thunb.(1784)>

    – 동의보감(허준, 1613) : 草蒿/져븨ᄡᅮᆨ
    – 벽온신방(안경창, 1653) :​草蒿/ 져븨ᄡᅮᆨ
    – 물명고(유희, 1824) : 牡蒿/졉의쑥

    그외 『조선식물향명집』(1937)은 “제비고깔”, “제비꼬리고사리”, “제비난초”, “제비동자꽃”과 “제비옥잠”을 기록하였는데, 이 역시 식물의 꽃이나 잎의 형태가 제비를 연상시키는 것과 관련 있는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제비가 오는 때와 꽃피는 시기가 일치하는 점에 착안하여 유래한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으나(허북구·박석근, 『한국의 야생화 200』(중앙생활사, 2008), 180면 참조], 제비꽃은 종별로 개화시기가 차이가 있고 제비가 도래 이전에 먼저 피는 종류도 많기 때문에 개화시기와 연관해서 제비꽃의 유래를 살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비꽃에 앞서 기록된 오랑캐꽃의 유래에 비추어도 제비꽃은 꽃의 모습과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추론할 수 있다.

    5.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제비꽃이라는 이름의 역사와 제비꽃을 둘러싼 민속 문화를 살펴보면서 제비꽃과 그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의 유래를 추론하여 보았다. 우리는 근대화의 시기에 국권의 빼앗겼으며, 해방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전통지식과 현대를 잇는 중요한 조사 작업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와 전통과 현대를 연결시키는 많은 매개고리들이 사라진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 전에 등장하여 문헌상 기록이 많지 않은 식물명의 정확한 유래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필자의 주장 역시 하나의 추론이고 정확한 것으로 확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요지에서 적절하게 지적하였듯이 어떤 식물에 대한 이름은 지역별로 여러 이름이 있기도 했고, 어떤 식물명은 하나의 이름으로 여러 식물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식물명은 전통지식에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도 있었다. 식물명에 대한 국명은 국제식물명명규약(International Code of Nomenclature for algae, fungi, and plants, 2012)에 따른 선취권의 적용을 받지 않으므로 하나의 식물에 여러 이름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이름이 보편성을 획득하면 다른 이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한 여러 이름 중에 개인마다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이름이 다를 수 있고, 제비꽃이라는 이름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하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자유스럽고 어떤 측면에서는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이름에 대하여 제대로 된 조사 작업조차 없고, 정확한 근거도 없이 일제 강점하에서 형성된 일본의 습속과 정서에서 닿아 있는 이름으로 낙인을 찍으며, 국권이 찬탈된 시기에 근대 과학을 배우면서 종래의 전통을 잊지 않고자 한 노력조차 일본식 이름에 끼운 맞춘 식물명을 기록한 것이라거나 일본의 정서와 습속에 잇닿도록 한 것으로 폄하한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이라는 하나의 문헌과 그 저자들에 대한 대한 왜곡과 폄훼에 머무르지 않는다. 살펴본 것처럼 역사학자로서의 독립운동가나 저항적 민족시인조차,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전통을 잇고 있는 뭇 백성들조차 일본의 정서와 습속을 잇닿게 한 것으로 왜곡하고 전통과 현대를 단절시키고 공동체를 자학하는 길로 이끌게 된다.

    이글은 한국식물생태보감에서 주장하는 (i) 제비꽃이라는 이름이 『조선식물향명집』에 불쑥 등장한 이름이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ii) 19세기 이전의 고전에는 제비꽃을 자원식물로서의 기록이 보이지 않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니며, (iii) 오랑캐꽃이 제비꽃에 대한 본래 고유명칭이고 제비꽃은 일본의 정서와 습속에 잇닿은 영문도 모르는 이름도 아니라는 것을 여러 자료를 통해 실증하고자 하였다.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의 분야를 식물사회학이라고 부르든 식물생태학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또 다른 명칭으로 그것을 개념화하든지와 관련 없이 그것이 학문이고 과학이기 위해서는, 다수의 구체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여 여기서 발견된 사실로부터 일반화된 결론이나 일반적 원리를 도출하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체적 문헌과 사실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이 고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정을 어떻게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협소한 자료만으로 어떤 문헌의 이름이 최초라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민속문화가 가지는 독자성과 고유성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에 관한 어설프고 가벼운 지식만으로 옛 사람의 문화와 그속에 등장한 이름을 어떻게 일본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필자의 얕은 지식으로는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왜 이러한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 질 수 있는지 알기 어렵고 짐작조차 쉽지 않다. 단지 한국식물생태보감에서 “오랑캐 행위를 해서 오랑캐가 되는 것이지, 남이 우리를 오랑캐라 부른다고 해서 오랑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을 곱씹어 볼 뿐이다. 도대체 무엇이 오랑캐 짓거리(행위)인지 반추가 필요하지 않은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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