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아인슈타인이 산 황우석에게
        2006년 03월 29일 02: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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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껏해야 과학은 (사회윤리적)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 우리는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사회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단지 전문가뿐이라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불리는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당대 과학자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반세기 전에 이런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과학은 시민사회가 참견해서는 안 되는 어떤 ‘성역’이 결코 아니며 과학과 과학자의 전문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언제든지 제2의 황우석 사태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사회는 아인슈타인의 지적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근원”

    과학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는 같은 글에서 아인슈타인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다. …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거장 아인슈타인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글의 제목은 아예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이다. 이 글은 1949년 5월 미국의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실렸다.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천재 과학자로만 알려져 있는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며 매카시즘(1950년대 초반 미국의 반공주의 열풍) 이전부터 미국 정보당국의 표적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순수과학자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병역거부, 핵무기 개발 중지를 주장한 전투적 평화주의자로, 자본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신념을 공공연히 밝히며 살았다.

    CIA 표적이 된 천재과학자

       
    ▲ 유년기의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울름 지방에서 유태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 종합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1902년 스위스 특허청에서 3급 기술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아인슈타인은 1905년 26세의 나이에 그의 세 가지 대표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브라운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열의 분자운동론, 빛이 마치 입자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물질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광양자설과 질량에너지등가원리(E=mc²)로 잘 알려진 특수상대성이론이 바로 그 세 가지다.

    과학계에서 1905년이 ‘기적의 해’로 불리고 아인슈타인이 ‘천재’로 불리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수상대성이론 발견 100년이자 아인슈타인 사망 50주기였던 지난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물리의 해’로 전 세계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됐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4월 18일 그가 말년을 보낸 프린스턴에서 시작된 빛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세계 빛의 축제’가 진행되기도 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지만 그의 이론은 1919년 영국의 관측대에서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빛의 굴절을 실험으로 측정하면서 확증됐다.

    “과학자들은 무기개발 동참 말라”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의 화려한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과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과학적 업적을 통해 얻은 지위를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과학 외적인 분야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활동은 그의 학설이 인정받기 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유럽문화를 지지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유럽인에게 보내는 선언문> 서명에 참여했다.

    또 종전이후 아인슈타인은 전범문제 연구를 위해 모인 ‘독일 6인 지식인 위원회’에 합류하고 1922년에는 국제연맹의 지적협력위원회에 참가했다. 패전국 독일이 국제연맹 가입국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활동은 독일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아인슈타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31년 국제반전주의자협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아인슈타인은 전세계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동참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 "집단적인 삶이 가장 부정적으로 표현된 군대를 혐오한다"며 평화주의자들에게 병역거부에 나설 것을 주장하고 "전세계 노동자들이 전쟁의 도구로 전락되는 일이 없도록 연합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히틀러 집권 2주 전 미국 망명

    이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아인슈타인은 1932년 독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에 "독일국민이 무시무시한 파시스트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힘을 합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공동 서명했다.

    하지만 경고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그해 7월 나치당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회원으로 가입해있던 프러시아과학아카데미를 탈퇴하고 1933년 1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하고 2주 뒤 히틀러는 독일 총통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 가운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러시아공산당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지만 1917년 10월 혁명의 목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레닌에 대해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온 정열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한 사람으로서 존경한다"고 말했다.

    미 극우세력, “아인슈타인은 세상 최고 사기꾼”

    그는 1950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된 적이 한번도 없지만 내가 공산주의자라 해도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의 이같은 태도는 매카시즘의 표적이 됐다. 2차대전 후 미 하원의 극우파들은 “이 세상 최고의 사기꾼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수년 전부터 공산주의자로 활약해 왔다”며 “지금 그가 퍼뜨리고 있는 허튼 소리는 공산당 노선의 이행일 뿐”이라는 악선동을 퍼부었다.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마녀사냥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하원 반미활동 위원회’의 조사로 인해 미국 사회의 민주적인 특성이 이미 상당히 훼손됐다"고 지적했을 뿐 아니라 간첩혐의를 받은 동료 과학자들의 사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53년에는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의 마녀사냥에 맞서 동료 과학자를 비롯한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증언을 거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싸우는 평화주의자”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아인슈타인은 그가 스스로를 규정했듯이 "호전적인 평화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93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루즈벨트에게 독일에 맞서 원자폭탄을 제조해야 한다는 편지에 서명한 과오를 저질렀다.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남달랐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히틀러 정권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 사용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2차대전 후 아인슈타인은 이를 "내 생전에 저지른 한가지 실수"라며 죽는 날까지 후회했다. 그는 마치 유언을 남기듯 1955년 4월 11일 숨을 거두기 며칠 전에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작성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인류라는 생물의 씨앗을 근절시켜 버릴 사태를 불러일으킬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단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생을 마감했다.

    아인슈타인 vs FBI
    22년간 수집된 ‘아인슈타인 파일’ 1800쪽

    1924년부터 1972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48년 동안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지낸 에드거 후버. 공산주의자 검거로 악명이 높았던 후버 국장은 아인슈타인의 미국생활 22년 동안 아인슈타인이 주고받은 편지를 검열하고, 전화를 감청하고, 그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수집했다.

    무려 1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FBI의 ‘아인슈타인 파일’은 미국의 정보당국이 이 천재과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얼마나 면밀히 감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파일에서 FBI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1947년부터 1954년까지 34개 공산주의 단체의 회원, 후원자 또는 관련자였다”고 지목하고 있다.

    또 후버 국장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미국 내 주요 공산주의운동을 후원”했고 “독일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1923~1929년 기간동안에도 아인슈타인의 집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이자 회합장소로 알려져 있었다”고 썼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미 당국의 수사는 그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히틀러가 집권을 앞둔 1932년 망명을 결심한 아인슈타인은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제안 받아 미국에 입국비자를 신청한다. 이때 ‘여성애국자협회’라는 이름의 한 극우단체는 국무부에 “아인슈타인이 반전주의자이며 공산당,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 단체 등에 가입했다”는 내용의 16페이지짜리 투서를 보냈다.

    투서를 받은 국무부가 베를린의 미 영사관을 통해 아인슈타인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자 아인슈타인은 격분을 참지 못했다. 당시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조사라니? 나는 그런 멍청한 질문들에 답할 생각이 없다. 내가 (입국을)요청한 것이 아니라 당신네 나라에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당신네 나라에 용의자 신분으로 입국해야 한다면 나는 전혀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화를 냈다. 언론에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당황한 국무부는 바로 다음날 아인슈타인 가족의 비자를 발급했다.

    아인슈타인이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군과 싸우는 공화파 정부를 지지한 것을 비롯해 일련의 정치적 활동이 FBI에 의해 기록됐다. 2차 대전 이후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면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FBI에 의한 감시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는 1948년 어느 날 열린 파티에서 주미 폴란드 대사에게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미국은 더 이상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며 우리의 이 대화도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방에는 도청장치가 돼 있고 우리 집은 면밀히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의 대화내용 역시 FBI 파일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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