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시국인지라, 텍사스 일기 연재 글이 늦어졌다. 필자에게 원고 독촉을 하기가 어려운 시국이다. 그럼에도 진도는 나가야 하니 연재를 계속 이어간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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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남단의 대도시 샌 안토니오는 더운 지역입니다. 5월말인데도 불구하고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합니다. 물이 흐르는 인공운하 옆에서조차 그렇네요. 조카손녀가 탄 유모차를 아들이 밀고 다니는 바람에 녀석의 가방은 제가 대신 매었습니다. 관광선을 탄 다음(사진 1) 주위 산책로를 1시간 가량 걸어 다녔더니 모두들 허기가 졌습니다.
차를 주차해놓은 힐튼 호텔 1층 푸드코너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기로 합니다. 각각 흩어져 새우볶음밥, 스파게티, 볶음국수, 피자 등을 한가득 골라옵니다. 배가 터지게 먹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가방 좀 주세요.”
제가 되묻습니다. “응? 무슨 가방?”
식탁 주위와 의자 밑을 찾아봅니다. 안 보입니다. 분위기가 설국열차 달리는 들판처럼 싸하게 얼어붙습니다.
나 : “(버벅거리며) 그게…. 뭐더라…. 가방을 니가 나한테 줬었냐…?”
아들 : “아빠가 어깨에 매고 다니는 거 봤는데?”
다들 식사 주문하러 간 사이에 가방과 유모차를 내가 지키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사이에 아무래도 깜빡 존 모양입니다. 딸아이가 눈을 흘기면서 추궁합니다.
“누가 훔쳐간 거 아니에요?”
“그 글쎄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아이들이 후다닥 일어섭니다. 식당 홀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하러 사무실로 뛰어갑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아이들 왈, CC-TV에는 별 영상이 안 잡혀있답니다.
잔뜩 기가 죽은 나 :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었…냐?”
아들 : “배터리 충전기하고, 안경하고, 렌즈 통하고, 돈 하고….”
나 : “그, 그래 많이 들어있었네.”
그 순간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딸아이의 눈이 번쩍,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아까 우리 사진 찍은 곳에 놔두고 온 거 아녜요?!”
머리 속에 필름이 좌르르 30분 전으로 감깁니다. 밥 먹으러 호텔로 돌아오는 길목에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 있었지. 뭔가 싶어 가보니 동상이 있었지. 맞아, 성 안토니오(St. Anthony) 동상!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오는 카톨릭의 유명한 성인(聖人)입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으로 35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요(그래서 사진 2.에서처럼 언제나 청년의 모습입이다). 탁월한 설교와 함께 50번 이상의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리버워크 산책로에 세워진 성 안토니오 동상은 이곳에 놀러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 우리 일행도 사진을 안 찍을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천천히 슬로비디오로 장면이 떠오릅니다. 1) 식구들과 조카네를 동상 앞에 세운다. 2) 비장의 초 구닥다리 캐논 5D카메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는다 3) “이모부 제가 찍어드릴께요 여기 와 서세요”, 라고 조카가 말한다. 4) 카메라를 건네준다. 5) 매고 있던 아들 가방을 동상 오른쪽에 살포시 내려놓고 한껏 포즈를 잡는다. 6) 줄 서서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 6) 허기진 배를 채우러 룰루랄라~ 푸드코너로 향한다. 7) 홀로 남은 가방이 울부짖으며 외친다. “Help me!”…
성 안토니오는 스스로 세상을 떠난 도시 파도바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파도바의 성인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유명한 별명이 있지요. “잃어버린 물건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 젠장, 이렇게 위대한 분 앞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다니!
후다닥 성 안토니오 동상으로 달려갑니다. 가방을 흘리고 온 지 거의 1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그 자리에 놓여 있을까요. 일본에서 소지품 잃어버렸는데 반나절 후에도 그대로 있더란 이야기가 머리를 스쳐갑니다. 혹시 미국도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동상 옆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텍사스가 강력범죄에 비해 좀도둑이 더 많다는 소문이 틀린 게 아니었던 겁니다.
아들 녀석, 신중한 성품 탓에 내색은 안 하지만 낙망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돈은 몇 푼 들어있지 않았고 휴대폰 충전기는 다시 사면 됩니다. 문제는 안경입니다. 오랫동안 쓰던 정든 물건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안경 구입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경점 간다고 덜렁 맞춰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반드시 안과의사한테서 처방전을 받아와야 합니다. 그 귀찮고 까다로운 절차와 비용을 생각하니 저도 맥이 탁 풀립니다.
가방 뒤진 후 별게 없으니 근처에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옆의 노점상에게 누가 가방 버리는 것 못 봤냐 물어봅니다. 고개를 흔드네요. 동상 옆 길 좌우를 100미터 가량 왕복하면서 풀 섶을 샅샅이 뒤집니다. 쓰레기통까지 일일이 열어봅니다. 없습니다. 확실히 누가 가져간 겁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리버워크 산책로. 시멘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데, 흰 수염 기르고 마음씨 좋게 생긴 구역 담당 할아버지 경찰이 앞을 지나갑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들 녀석이 그에게 다가갑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뭔 소리 주고받는지 잘 안 들립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들 녀석이 환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게 아닌가요.
“아빠 찾은 것 같아!”
경찰 이야기인즉슨, 1시간 쯤 전에 누가 긴급 신고를 했다는 겁니다. 성 안토니오 동상 옆에 시커멓게 생긴 수상한 가방이 놓여있다고. 폭탄인 것 같다고! 관할 경찰에 비상이 걸린 건 당연한 일. 일단 동상 일대에 관광객 출입을 전면 차단시켰답니다. 폭발물 처리반이 가방을 조심스레 수거했답니다. 그리고 경찰서로 가져간 가방을 엑스레이 투시기로 철저히 검사했다는 겁니다(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음식을 먹고 있었으니 ㅠ ㅠ).
뭐가 나올 리가 있나요. 몇 십 달러 현금과 동그란 안경 하나. 장방형의 자그만 예비 배터리. 그리고 콘택트렌즈 통 뿐. 그제야 경찰들이 휴! 한숨을 쉬고 가방을 열어보았다 합니다. 샌안토니오 경찰들 오늘 용궁 근처까지 갔다 되돌아왔습니다.^^ 물론 저도 다행입니다. 앞으로 사흘 동안 내내 식구들 잔소리를 들을 뻔 했으니.
아들 녀석이 경찰서에서 가방을 찾아오는 동안 해프닝의 의미를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미국이란 나라의 심리적 횡단면을 단칼에 잘라 보여주는 시범케이스란 겁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악령처럼 사로잡고 있는 테러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에서 주인 잃은 가방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마 2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1) 누가 가방을 잃어버렸구나.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 2) 안에 뭐가 들었을까? 혹시 값비싼 게 있으면 흐흐흐…
근데 일요일 오후 리버워크에 놀러온 미국인 관광객들은 달랐습니다. 검은 색 가방을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폭탄’을 떠올린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가방 주위에 접근하지 않고 부리나케 경찰에 신고부터 한 겁니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소동은 시민의식이 투철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1년의 9.11 테러가 던진 엄청난 충격(사진 3). 그 후 십 수 년 동안 정부와 언론에 의해 광범위하게 증폭되고 심화된 공포심이 이제는 시민들 무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 버린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입국 심사가 가장 까다로운 나라입니다. 명목상으로는 불법이민을 막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인권모독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신체투시기 등의 그 엄혹한 검사는 기실 테러 방지를 위한 용도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영토(territory)를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 마음속에서 두려움까지 완전히 제거하진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는 1852년 발간된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 Der 18te Brumaire des Louis Napoleon>란 소논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진행된다고. 어쩌면 미국이 겪은 9.11 참극과 오늘 우리 가족이 샌 안토니오에서 겪은 코미디 같은 사건이야말로, 그가 언급한 역사적 반복의 사소하지만 현재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사람 수백 명이 벌벌 떨었건 말았건 간에, 오스틴으로 돌아오는 차 안의 한국인들은 몹시 행복했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심정이 이러할까. 성 안토니오는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계시어 저에게 가호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가장의 위신을 간신히 되돌려받은 남자는 운전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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