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 그리고 암살들
[정지된 역사]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테러리즘"
    2015년 12월 30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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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는 테러리즘, 구타, 칼로 찌르기와 같은 것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인 그리고 유일한 방식인 것으로 생각한다.” – 미 방첩대, 『반월간보고서(1947년 12월 30일)』가운데서

“장덕수 암살사건의 용의자가 자백한 바에 따르면 김구가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증거로써 이 사실이 확인된다면 최고사령관은 김구를 살인죄로 미국 법원에 기소할 방침이다” – 1947년 12월 13일, 하지가 육군부로 보내는 전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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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서울, 한국. 1948년 5월 31일. 위 배너는 영어와 한글로 작성된 수백 개의 휘장 가운데 하나인데, 기쁨에 찬 한국인들이 오늘 서울 거리에 휘날린 것들이다. 이날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로 뽑힌 한국 의회의 첫 번째 회의를 축하했다. 이날 한국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정부를 가지게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를 벌였다.”(소장 : NARA)

서북청년단은 그 유명한 “경찰의 보조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미군정이 이렇게 썼으니 그대로 옮기는데, 이들은 “경찰서와 들어가는 입구는 다르지만 사무실은 같은 곳을 쓰기도 했던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 한 책(‘대한민국 정체성 총서’의 『서북청년회』)에서는 이 집단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놓았다.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단체”라거나 “이념과 확고한 행동목표를 가진 단체”였다든지, “경제적 평등주의를 내세웠던 단체”라고 말이다.

도대체 뭘 보고 이런 표현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북청년단의 단장 출신들이 고학력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서북청년단의 단장은 주로 일본 유학파거나 SKY 출신의 명문대를 나온 부잣집 아드님들이다. 그래서 뭐? 머리 좋고 성격이 나쁘면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골치가 아프다는 사실을 잘 모르시나보다. 또 이념적으로 확고하게 ‘적들은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는 이념과 행동목표를 가진 것도 분명하다. 썬글라스를 쓴 아저씨처럼, 잘 차려입은, 모던한, 젠틀하면서도, 왠지 지적인 그런 모습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서북청년단은 미국이 지목한 ‘테러단체’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한 단체였다. 그리고 실제 테러를 저지른 단체로는 가장 자주 등장했던, 미군이 주목했던 단체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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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알 카포네가의 시카고 수프 가게 앞에 실업자들이 줄을 늘어서 있다. 1931년” (출처 : NARA) “교양 있고, 지적이며, 균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알 카포네가 1931년경 시카고의 한 가게를 사서 실업자를 위한 무료 스프와 도넛을 판매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도넛을 알 카포네가 구운 것은 아니고 그가 돈을 내고, 선전을 크게 했다는 의미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이란 신문에서는 “1931년 12월까지 알 카포네의 무료 수프가게에서는 12만 명에게 무료 수프를 제공했다”며 크게 선전하기도 했다.

테러리스트들을 “자애롭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묘사했던 것은 알 카포네가 그랬던 것처럼 정부에 반대해서(금주법과 같은 악법의 시대에!) 밀주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금서법(실제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의 시대 때 그랬다)이 있었을 적에 책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된다. 더 많은 위험이 따랐겠지만 금주법의 시대에 밀주를 만드는 일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고 일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가끔 알 카포네는 저 줄 선 사람들 옆을 지나가면서 악수를 하기도 했다. “알 카포네가 미국 의회보다 더 열정적으로 실업구제에 나서고 있다”는 칭송이 나올 법도 했다.

어쨌건 이런 시대 때, 루즈벨트가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만들기보다 무려 4년 전에 ‘공익사업’에 앞장선 알 카포네를 보고, 누군가 “지적인 수준이 높고,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균등사회를 지향하는 인간”이라고 했다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의 서북청년단에 관한 책을 보고 드는 느낌과 비슷한 것이다. . . . 아무튼 이 사진은 NARA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5층 화장실에 가면 항상 보게끔 해놓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1947년 12월은 “테러의 시기”였다. 1947년 12월이니 지금과는 헷갈리지 말자. 지금도 대통령 각하께서는 테러 어쩌고, 복면이 지랄이네 하시면서 “테러방지법이 없는 나라 운운”이라고, 마치 대한민국이 테러위험국가에 처한 것처럼 행동하시지만, 실제 1947년 12월 남한은 위험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했다. 물론 정확히 표현하자면 테러가 폭증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물론 그 전 시기에도 테러가 있었고, 우리가 놀랄만한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곤 했다. 거의 매일 시위 진압으로 경찰서가 불타고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시기였다.

한데 특히 47년 12월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미군들이 그렇게 명명해놨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승만이 이런 테러를 앞장서서 지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장덕수의 암살에 대한 첫 번째 “용의자(finger man)”도 이승만이었고, 무시무시한 ‘서북청년회’에게 시위를 한 건이라도 더 많이 조장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입으로만 해야 한다고 했던 말은 취소하자. 아무튼. . .

이보다 넉 달 앞선 1947년 여름은 12월 “테러의 시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테러가 발생할 무렵이었다. 1947년 7월 19일에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11번째 암살 시도를 넘어선 그였지만, 12번째 암살 시도는 성공했다. 젊어서 씨름선수로 황소까지 타온 여운형이라도 권총을 피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 암살과 함께 남한에 이상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테러였다. 주한미군 최고사령관인 하지가 “미소공위는 실패할 게 분명”하다고, 별로 멀리 있지도 않은 군정장관 러치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의 미소공위 실패에 대해서 공감하던 러치는 편지를 쓰던 중에 들었던 놀라운 소식에 대해서도 썼다. “편지를 쓰는 지금 여운형이 암살당했다는 엄청난 뉴스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대단원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라고. 야전을 누비던 군인이었던(?) 아놀드 소장을 대신해서 점령과 통치에 “쓸만한 군인”이던 러치 장군이 보기에도 여운형의 암살은 이제 서서히 “끝을 향하는 대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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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 반탁전국학생총연맹본부. 1946년 1월경”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 삐라는 그리 길지도 않고 또 쓰는 용어나 예상하는 사건 등이 사뭇 날카롭기 때문에 읽어볼 만해서 골라왔다. “역적배 인민공화단 타도”에서 인민공화단이라고 쓴 것은 아마 ‘국’자를 쓰지 못하게 한 미군정 측의 입장을 십분 살려서 그렇게 썼을 것이다. 마적단, 화적단과 같은 놈들과 비슷하다는 의미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3번에 등장하는 용어를 잘 보자. “공산당, 공산분자 말살” 抹殺이라. 해방된 지 5개월 남짓 지났지만 말살이란 단어는 좌와 우에서 모두 사용하던 공용어가 됐다. 말살이란 말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바로 다음에 한글로도 잘 설명해 놨다. “1월 3일 데모한 자는 매국노다. 죽이자” 1월 3일 집회는 서울시 인민위원회가 주최한 집회를 말하는데, ‘반탁집회’로 알려졌다가 ‘모스크바 3상 결정 총체적 지지’로 바뀐 그 집회를 말한다. 5항은 노골적이었다. “이것을 지도한 놈들 우리 청년이 잡어 죽이자” 실제 얼마 전 송진우가 이 비슷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암살 당했다. “공산분자를 몰살하자” “악마, 박헌영, 허헌, 여운형 타살”. 해방 당시 남한 정국에서 유명한 암살 사건으로 희생된 세 명(송진우, 여운형, 장덕수)는 모두 김구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의해 타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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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여운형 장례식의 모습.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 사진은 로광욱씨가 국편에 기증한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로광욱씨도 사진 속에 보이는데 사진 제일 왼쪽 편에 찍혀있다. 윗 쪽에서는 두 번째 줄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여운형이 만든 근로인민당원이기도 했던 로광욱은 1953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치과의사가 되었는데, 이후 ‘종북..’ 아니 ‘친북인사’로 규정되어 대한민국 입국이 거절되기도 했었다. 물론 북한을 몇 번 방문하기는 했지만. 여운형은 실제 암살당하기 두 달 전에도 비슷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창덕궁 인근 도로를 좌회전하던 차량 앞에 세 명이 뛰어들어 여운형이 탄차를 향해 총단을 발사”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종종 이런 사건들을 겪은 미군정 측은 일종의 정치적 쇼맨십 정도로 판단했다. 한데 5월 달의 사건은 그와는 달라서 “실제 암살을 노리는 사건으로 보임”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경찰 사정권 이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며, 당시 경찰과 테러단체 간의 ‘밀고 땡기는’ 애정전선을 우려하던 미군 정보당국자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정보원들 역시 이제 단독정부로 가는 마당에 ‘좌우합작을 주장하던 인간들’ 그러니까 김규식과 여운형, 허헌, 안재홍 등에 대한 암살 음모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경보를 계속 제공하고 있었다. 어쨌건, 여운형을 암살하라던 훈계가 1년 반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제 “끝을 향한 대단원”으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참, 그것이 참이건 혹은 잘못된 정보이건 암살 모의는 대부분 ‘우익’들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1947년은 분단이냐 통일이냐를 두고 좌우익이 투쟁한 시기였지만, 냉정하게는 우익이 좌익을 점차 궁지로 몰아넣는 시기였다. 현대사를 전공하기 전에 내 머릿속에 든 가장 큰 의문점은 도대체 왜 좌익이 우익에게 열세에 놓였을까 라는 점이었다. 한국전쟁도 일어나기 전이었고, 정부권력을 못 잡은 것 빼고는 도대체 좌익이 우익에 비해 열세에 빠질 리가 없는 상황인데, 도대체 왜??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건. . .

아마 1946년 미소공위가 결렬된 시점부터 혹은 5월 15일 발표된 정판사 사건부터일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좌익을 몰아치기 시작했고, 이승만도 단독정부 비스무리한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차세대 대통령감이 누구냐는 여론 조사에서 우익 인사들이 좌익보다 3배나 많은 지지표를 받았고(이승만은 이 중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익들이 좌익단체를 하나 둘 씩 접수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도 들어오곤 했다. 물론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정당한 정치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좌익의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에 대해 하지는 “효과적인 시위군중에 대한 처리를 칭찬”하기도 했다.

자, 좌우익의 세력이 이제 서서히 균형을 맞춰가고 있을 무렵, 최고사령관인 하지가 “그래, 잘했어, 폭도들에게는 초강경대응을 해야만 해”라고 외치는 것,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듯도 한데. . . 이런 사태가 초래할 것은 결국 더 강경한 투쟁이고, 더 강경한 탄압이다. 그게 우리가 잘 아는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에서 발생한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갔던 소위 ‘10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6년 여름경에 시작된 좌익사냥이 거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1947년 3월 1일 기념식에서 증명되었다. 이 3.1절 기념식은 좌우익이 전국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충돌했던 사례였는데, 그 결과는? 좌익의 참패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부산에서 발생한 3.1절 기념시위였다. 해방 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총기사용으로 사망했다. 이날 무려 250발의 총알이 발포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TV에서 보던 아랍의 소규모 시가전이 대한민국에서 발생했다는 것과 진배없다.

“불법집회가 좌익에 의해 주최되었는데 10시에서 16시까지 8천여 명이 모였다. 집회를 마친 우익의 일부도 여기에 몰려들었다. 16시 2명의 광복청년단원이 연단에 뛰어 올라 스피커를 걷어차고 마이크를 뽑았다.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여 경찰 트럭에 탑승시킴. 트럭이 군중 사이로 빠져나가려하자 군중 일부가 투석을 개시. 형사 한명이 얼굴에 돌을 맞고 중상. 경찰이 투석한 자를 트럭에 태움. 다시 트럭이 출발하자 트럭 옆에 있던 군중들 속에서 약 10발의 총격이 트럭으로 가해짐. 옆에 있던 경찰이 서장의 명령 없이 허공을 향해 대응사격을 가함. 모든 증거에 따르면 경찰들의 일부는 허공이 아니라 군중을 향해 하향사격(lower)을 가함. 모두 250발의 총격이 가해짐. 총격 직후 군중들의 일부는 즉각 도주. 경찰이 즉각 집회장소를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으르렁거리는 군중들은 거리 주변으로 다시 결집. 5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함. 현재 상황은 고요하지만 긴장이 흐름.”(1947년 3월 2일 G-2 일일정보보고서)

부산의 3.1절 기념식은 좌우익이 함께 참여한 행사였지만, 좌익이 보기에 시비를 건 쪽은 우익청년들과 경찰들이었다. “평화롭게 마감될 수 있었던 집회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으로 우익들에 의해서 촉발(precipitated)된 것”이 분명했지만, 결국 희생자는 소위 ‘좌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날 전국에서 발생한 3.1절 기념식에서 “사망자 16명 부상자 22명”이 발생했다. 당일치 시위로 사망한 숫자로는 대구시위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았다. 3월 1일 시위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위 사망자가 대부분 경찰의 발포로 나왔다는 점이다. 경찰 등에 걸린 칼빈 소총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언제나 사용되곤 했다. 왜 항상 경찰 총수들이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곳에는 항상 이런 비극이 따르게 마련이다.

부산에 이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제주도에서는 “시민을 죽인 경찰을 사형시켜라”는 조건과 함께 경찰을 아예 해체해 버리자는 요구사항도 나왔다. 경찰과 관련된 역사서들을 최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 참 재미있게 읽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분들이 국정교과서도 아마 잘 쓰실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 .

이 시기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점 우익들이 뭉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지금까지 시위는 좌익들과 경찰 그리고 군정 간의 싸움이었지만, 이제는 좌익과 우익청년단 간의 투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굶주린 북한인들의 엑소더스”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신해서 남한의 “좌파”들을 흠씬 두들겨 패기로 한 서북청년단원들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은 “지난 2개월 간 테러활동을 통해 확연히 돋보이는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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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남대문에 있던 남조선노동당 건물. 1937년 3월 1일. 총알이 이 건물에서 날아들었다.” (출처 : NARA) 이 3층짜리 건물이 남조선노동당의 본부 건물인지 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사진에 대한 설명에서는 남로당의 본부로 되어 있다. 좌익이 주도한 3.1절 기념식이 남산에서 벌어졌고, 집회가 끝난 이후 이 남로당 본부가 있던 건물 주변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 한데 이 주장은 우익단원들의 생각이었다. “학생연맹, 서북청년단, 학생총연합 등의 단체가 주도하여 살해당한 우익들의 복수를 위해 공격할 준비를 세우고 있음. 코멘트 : 남대문 사건 조사결과 사망원인에 대해 어떤 다른 핑계나 비난이 있을 수 없지만 우익들은 좌익의 본부 좌측에 위치한 건물에서 좌익들이 먼저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 벌어진 사건으로 사람들을 수색하고 또 체포한 것은 대부분 좌익원들이라는 점이다. 당시 사건에 대한 수사 책임은 미군정이 쥐고 있었지만, 당일 현장에서 좌익을 체포하고 남로당 본부를 수색했던 것은 경찰이었다. 3월 1일 집회와 관련하여 미군정은 한국경찰에 대해 엄항섭 등 우익원 5명을 체포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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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국의 시위. 한국인들이 시위 장소를 피하고 있다. 경찰이 계속해서 스나이퍼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있음. 서울, 1947년 3월 1일.” (출처 : NARA) 위의 남로당 본부 건물 사진이 찍혔던 시간과 크게 차이가 없는 시점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이 군중들은 좌익 시위대가 아니고 우익 시위대의 일부로 보이는데, 당시 경찰은 우익집회에 참가한 시위행렬이 남대문으로 향하자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위협 총격을 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데 사진 설명에 “스나이퍼”라고 콕 찝어서 설명한 것은 남로당 본부 건물에서 총을 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 좌익이 우익의 불법시위행렬에 대해서 이렇게 총으로 쏘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당시 좌우익들은 모두 자유롭게(!) 총기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만하다. 물론 미군정에서는 이런 불법총기를 항상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당시 총기는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일종의 ‘암살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도로변에 황급히 몸을 숙이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사진 한가운데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먼 곳을 바라보는 형사의 포즈가 아주 인상적인 사진이다.

그리고 암살이라는 용어가 정보계통 보고서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암살할 사람은 너무 많았다. 모르긴 해도 일기장이나 편지에 대고 ‘나는 죽고 싶어’ 혹은 ‘누구누구 죽어라!!’라고 써놓는 것을 다 포함한다면 지금도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까지 모두 암살 음모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일이고. 정보단체가 암살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한 것들만 모아놓고 보아도 1947년 봄부터 그 분량이 점점 많아진다. 암살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너도 나도 자원하며 청년단체로 모여들었고. 이제는 나머지 한 가지, 암살을 명령하는 사람만 생기면 된다. 미군정에서는 이제 슬슬 이런 정보들을 믿을만한 정보라고 보고서에 싣기 시작했다.

“최근 김구의 지지자들이 김성수를 암살하려 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는데도, 김성수는 김구가 2인자가 될 만 하다고 말했다.” – 1947년 3월 20일, 러치 군정장관이 브라운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임시정부의 특별행동대는 김석황이 대장이고 신일준이 부대장이다. 이 그룹은 좌익과 군정 멤버들에 대한 암살을 계획했다. 한데 포고문 1호와 축하행사 계획안이 발각되면서 계획을 강제로 포기해야만 했다. 중경임정 그룹의 행동대인 이 그룹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의 행동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 1947년 3월 17일, G-2 일일보고서

“북한에서 남한으로 침투하는 전복세력이 증가한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입수되고 있음. (중략) 이들은 암살프로그램을 교육받고 현재 암살대상자들의 집을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 1947년 3월 19일, G-2 일일보고서

“좌익 무리들이 서민호 도지사를 암살하고자 지하단체를 조직했다고 한다.” – 1947년 3월 29일, G-2 일일보고서

“경찰보고에 따르면 정보원의 보고로는 좌익들이 남한에서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이기 때문에 김포공항에서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 1947년 4월 18일, G-2 일일보고서

“극우를 지도하는 김석황은 (a) 여운형, 김규식, 허헌을 암살하고 (b)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들을 암살할 계획 (c) 조병옥과 장택상을 암살할 계획이다.” – 1947년 5월 24일, G-2 일일보고서

몇 개를 골라서 갖고 왔지만, 이 무렵 경찰과 CIC 산하 정보원들이 주로 하는 일은 누가 누구를 언제 어떻게 죽이려고 한다는 암살음모를 빼내오기 바빴다. 경찰이 주로 좌익단체의 음모를, 미군정은 우익단체의 암살음모를 수집했다. 좌익과 우익이 모두 암살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나왔지만, 흥미롭게도 좌익이 우익인사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경찰 측의 정보망으로 통해서 접수된 것이다. “모호한 암살계획에 대한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지만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는다”고 따끔히 지적한 것은 잘한 일이다. 경찰은 별다른 계획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다.

암살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북한에서 계속 암살자들을 양성하여 남한 측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 간첩, 아니 이건 지금 쓰는 말이고 당시에는 월남하는 인구가 많아서 “엑소더스”라고까지 정보원들이 표현할 때였으니 그저 월남인이라고 하자, 이런 월남인들 가운데에서 상당한 숫자가 북한의 비밀공작을 지령 받고 내려오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이 중에 몇몇은 단순한 정보수집이 아니고 암살이라는 무시무시한 목적을 갖고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고.

한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입수된 정보들, 이는 대부분 북한에서 활동하던 미군 정보계통의 정보원을 통해 수집한 정보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다. 왜냐고? 북한이 테러나 암살 등의 음모로 적을 제거한 사례는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해방정국 당시 북한의 좌파들이 그랬다는 말이다. 휴. . . . 아무튼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좌익 역시 테러행위를 오래 전부터(?) 공개적인 당 강령에서 빼버렸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할 짓이라는 것이다. 실제 북한이 암살모의훈련을 시키고 암살을 위해서 간첩들을 파견했는지와 별개로 당시 남한에서 이런 것은 ‘공공연한 북한 혹은 소련의 음모’ 가운데 하나로 통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좌익과 우익 모두를 상대로 암살자들을 키우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많은 암살 관련 정보들을 가지고 암살이 횡행한 시대쯤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정작 해방 공간에서 암살은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4건만이 발생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그리고 김구. 물론 박일원(박헌영의 비서역)과 같은 전향한 좌익에 대한 암살이라기보다 일종의 ‘보복’ 공격도 있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암살은 이 네 가지 정도다. 나는 이 숫자가 결코 그렇게 많은 숫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공부를 하면서도 속으로 죽였으면…하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는 판인데. . .

한데 이 네 사건 모두 ‘우익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계획에 따라서 집행된 암살사건이었다. 모두 김구나 임시정부 산하의 청년단체와 관련이 있기도 했고. 좌익들이 그 많은 암살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정작 좌익이 주도하여 암살 사건을 처리했다는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좌익은 생각으로만 암살을 많이 저질렀지 사실 별로 살인을 한 경우도 없는데 말이지. 어쨌건 당시 신문을 뒤져보면 체포된 “암살모의단”은 대부분 좌익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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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4년 AP 통신사가 미군 헌병 민비 잉글랜드 일병이 개 줄로 묶은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이 사진이 공개된 것은 미국의 유명한 인권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y Union) 측에서 “(포로를 학대하는) 사진 공개는 수감자 학대가 정부의 책임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방에서 진실을 밝히는데 꼭 필요하다”며 사진 공개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사진 말고도 이라크 포로들을 발가벗겨 놓고 촬영한 사진과 이후 추가 보도에서 확인된 고문으로 사망한 포로의 시신사진들도 함께 발굴되었다. 전쟁 중이고 대통령이 전쟁광이며, 9.11 때문에 일으킨 전쟁이기에, 미군들이 중동사람만 봐도 난리를 피우는 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니 뭐 사진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한데 이 사진이 공개된 이유가 흥미를 끈다. 시민자유연맹이란 단체는 미국에서 시민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고 넘어가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의 땔깜”으로나 사용됨직한 그런 반국가단체(?)라 할만하다. 한데 이 단체는 미 군정기에도 이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남한에서 말이지. 1947년 5월 28일, 로저 볼드윈이라는, ACLU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이 사람이 한국을 방문(47년 5월 12부터 23일까지)하여 듣고 보고 느낀 점을 하지에게 찬찬히 설명하는 문건을 보냈다. 제발 반공주의 짓 좀 그만하라고. 도대체 “해방된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며.

볼드윈이 “어떻게 해방된 지역에서 이런 일들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라고 혹평한 서신이 하지에게 전달된 무렵, 남한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공격은 노골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목숨을 노리는 10번째 암살 시도가 이 무렵에 진행되었고, 좌익은 3월 1일 대대적인 체포에 이어서 1947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소위 ‘8월 공세’가 진행되었다. 이제 “(8월 15일) 남한 전역에서 공산주의 단체들에 대한 전면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는 러치가 말한 ‘대단원의 마지막 공세’라고 할 만했다. 무슨 대단원인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답변이라도 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무렵, 그간 좌익에 비해 열세에 빠져있던 미군정과 우익들의 기를 살려줄 일들이 여러 군데에서 진행되었다. 서북청년단은 각 지방에 지부 설립을 독촉하기 위해서 서울본부에서 지방 파견단을 보내고 있었다. 미군 정보과에는 대전과 전남, 충청북도에서 “서북청년단 조직가들이 도착하여 혼란 상황에 빠져들었다”는 보고가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서북청년단원들을 억압하는 것은 곧 우익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들이 경찰이나 할 수 있는 활동들, 납치나 감금, 폭행, 가끔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고를 치고 있음에도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경찰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각 지방의 하부 단위 조직에 이르기까지 좌익이 우익보다 낫다고 말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제주도 정도를 제외한다면 이제 거의 좌우 관계는 역전되었다.

독립운동조차 무력이 아닌 말과 외교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왔던 이승만조차 이제 그딴 것은 집어치우고 “대규모의 파업과 거리시위가 필요”하며 여기에 앞장서는 “서북청년단원의 폭력행위에 대해서도 크게 고무”하던 차였다.

이 무렵 테러와 관련된 신문기사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마디로 테러 때문에 역전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우익들을 기쁘게 만든 것은 경성전기회사 노동조합 선거에서 대한노총의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 이것은 오래오래 기억할 만했다. 노동조합은 좌익의 본거지 아니었나? 노조를 우익이 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좌익이 갈 곳은 감옥이나 무덤 외에는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실제 선거는 이 무렵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고 있었다. ‘선거’는 마치 지금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졌다. 정권교체이기도 했고, 민주주의이기도 했고, 헌법의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도 한 선거는, 선거를 제외한 다른 방식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한데 선거라는 방식을 가장 먼저 내놓은 사람이 누구였을까? 이승만이었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 문제도 남한에서 제일 먼저 제기했고, 미소공위 따위는 집어치우고 선거를 통해서 빨리 대통령을 뽑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 12월 1일부터 1947년 4월 27일간 무려 다섯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은 선거야 말로 대한민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며,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처럼 보였다. “Election Now!(하루라도 빠른 선거를)”는 이승만이 이때부터 자주 써먹었던 유용한 구호였다. 미군정의 골칫거리 이승만이 선점한 선거라는 쟁점은 이제 남한에서 대세를 이루게 된다.

6월 중순경 미군정이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남한만”의 즉각 선거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76.6%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1947년 4월 21일, 주한미군은 “미군에 대한 공격이나 남한의 시민사회의 주요한 시설 등에 대한 공격 등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계획의 하나로 ‘얼러트 플랜’(Alert Plan)을 만들었다.

이 말은 바로 두 달 전 하지가 미국 기자들과 나눈 대담 말미에 던져 놓았던 말, “맨 앞에는 경찰이 있고, 그 뒤는 국방경비대, 그리고 마지막에는 군대가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면 비록 비상계획으로 “늘 하던 일” 가운데 하나인 문서상의 계획일 뿐이지만 아직 철군이 확정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비상계엄에 준하는 군사작전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쯤 되면 ‘대단원의 종말’이라고 할 만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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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국가기록사진관 1954년도 10월 2일, 미군철수에 반대하여 미 대사관을 기습 공격한 한국 상이군인들의 시위 모습이다. 누워계시는 폼을 보아하니 저 자리에 오랫동안 계실 모양인데. . .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은 종전과 함께 한국에서 철수를 시작했는데, 문제는 미군이 돌아갈 때마다 한국에 큰 선물을 주고 가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곱게 가기는 어렵겠다. 이 시위는 이승만을 비롯 국회와 정부 내각이 한마음이 되어, 다시 말해 ‘일치단결’하였기 때문에 이뤄진 미국 공관에 대한 공격으로 대성공을 이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직후 환영회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유화적인 정책만 쓴다면 결국에 가서는 미국은 고립되고 말 것이다. 우리 자유진영은 싸움을 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룩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미군 철수를 간접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일찍이 본인이 잘 증명해 주신 바가 있었으니 일관되기는 하네.

아무튼 이 당시 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 브릭스 주한미대사가 “두 번 다시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일 따위로 양국 정부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면 그냥. . .당장에 중지시키도록 해요!”라고 이승만과 변영태 외무장관 앞에서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이승만 자신도 “두 번 다시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며, 변영태 장관에게 대신해서 대답하게 했다나 어쨌다나. 싸움을 안 하면 안 된다는 분이 거 참 쉽게도 양보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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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89년 2월 15일, 광주시 동구 황금동 광주 미국문화원 앞에서 벌어진 시위로 문화원이 불타고 있다. 출처는 『나의 취재기 21』에 수록된 사진이다. “직감적으로 ‘광주 미 문화원에 기습시위가 곧 있을 예정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 문화원 주변은 특수훈련을 받은 ‘백골단’이라는 경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 문화원 주변에는 무전기를 든 경찰들이 거리 곳곳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전 8시께 와..하면서 무슨 함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미 문화원 주변 골목길 곳곳에 숨어있던 남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고 미 문화원을 향해 던지는 것이 보였다. .. 약 10여분 만에 경찰들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학생들에게 장악되었다. 수 차례의 기습시위에도 지켜졌던 미 문화원이 학생들에게 점령되어 우리나라 및 외국이 언론에 보낸 후 커다란 뉴스거리가 되었다.”

광주 미문화원은 이보다 9년 전 인 1980년 12월 9일 밤에도 화재가 일어났었다. “전기누전으로 추정된다는 1단짜리 신문기사가 실렸다”고 당시 사람들은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전남대 2학년 임종수씨 등 5명이 미문화원담장을 넘어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미국 소유 재산에 대한 테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 날이 두 번째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최초의 반미시위는 요 앞 사진에 나온 미군철수 반대 시위대였다. 그 뒤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해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미문화원은 곧잘 점령시위, 미국식으로 표현하자면 테러리즘의 타킷이 되곤 했다.

11-12

(사진설명)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은 직후인 1982년 3월 18일 문부식, 김현장, 최인순, 김은숙 등이 부산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사건도 있었다. 이 사진들의 출처는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찾은 것이다. 당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불장난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이가 “살해되는 테러”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당시 대학생들이 경고하기 위해서 작게 불을 지르려던 것이었지만, 신나의 위력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한다. 순식간에 불이 옮겨 붙는다. 사람 죽는 일은 둘째치고 미문화원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라는 해방 후 처음 겪는 반미사건을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에서는 난리가 났다. 다행히 당시 주미대사였던 유병현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홀드리지(국무부 차관보)가 이번 사건을 “일종의 정신착란 또는 도착, 그런 작태 아니었느냐? 이렇게 표현하는데, 한미 간에 그 결과에 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라면서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에 이 사건은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3천만원 현상금이 나붙었고, ‘방화 커플’들에 대해서 특별히(?)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쳐 수사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 시간에 나왔으니 특별히 설명은 안하지만 성고문이나 뭐 그런 거 기억하겠지?

“김구는 자신이 30, 40명을 암살했다고 내게 개인적으로 말한 적이 있는 늙은 혁명가이다. 그는 이제 암살행위를 멈추었고, 영웅이 되어 있다. 옛날의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신들이 싫어하는 인간을 암살하는 것으로 자질을 증명하곤 했다.”

– 1947년 2월 17일, 하지의 미국기자들 환영행사에서

김구에 대한 인상은 원래부터 저랬다. 그저 암살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별명도 그와 비슷한 것들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였다. 알 카포네, 블랙 타이거, 화이트 타이거 등등. 여운형의 마지막, 그러니까 좌우 균형을 통해서 통일정부수립에 희망을 걸었던 세력이 1947년 여름에 비로소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면, 이제 우익 아니 극우 세력으로 미국이 이승만과 더불어 싫어했던 김구가 제거된 상황을 훑어봐야 된다. 김구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안가에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갈 뻔 한 셈이었다.

원래 김구는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키는 컸지만 얼굴도 이승만보다 훨씬 더 동양적으로 생겼고, 또 피부도 거무틔틔하다. 어릴 때 앓았던 곰보 자국이 남아있었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학벌은 어릴 때 서당에 다닌 게 전부다. 아 근데 이런 분들이 꼭 한 가지는 잘하게 마련이다. 그가 그 유명한 암살 교시자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김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30, 40명을 그냥 죽여 버렸다는 것은 너무했다. 세, 네 명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하지만 저런 말을 남한의 최고사령관께서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발설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은 하지가, 아니 주한미군정이 김구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일 뿐이었다. 다만 인기가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김구가 약서를 써놓고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무자격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또 그 누구도 정부로 활동하지 않겠습니다”란 각서를 쓰고, 도장도 찍고 해서 조국에 들어왔지만, 어디 화장실 드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은 다르다. 물론 변비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빼고는.

김구는 한국에 들어와서는 의기양양하게 “임정의 주석”이란 칭호를 달고 다녔다. 미국인들에게도 그랬다. 미군 점령당국자들과 만나서도 “조국의 인민들이 나를 그리고 우리들을 정식 정부(legitimate government)로 환영하고 있다고 그래요”라면서 “그러니 미국인들도 우리를 그렇게 대접해야만 할 것”이라고 으스댔다. 3.1절 임정을 선포할려고 정부포고까지 만들어뒀던 1947년 3월 10일 쯤의 이야기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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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47년 3월 13일. 중국에 있던 한국 임시정부의 수장인 김구 씨와 윌버(Wilbur) 장군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출처 : NARA) 김구는 공식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고, 또 한국에서는 이승만과 함께 우익의 2인자 역을 맡고 있었지만 미군 정보계통에서는 언제나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던 요주의 인물이었다. 저 꽉 쥔 왼 주먹을 보라. 웃으면서 한 대 맞으면 얼마나 아픈 줄 맞아본 사람만 안다. 1947년 3월 초반이면 임시정부측이 정식정부로 포고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다. 이승만도 미국에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김구의 위상이 훨씬 나아졌다”고 바라보는 미국인들도 있었다. 게다가 한민당 계열과는 지난 찬반탁 국면 때부터 여러모로 좋지 못했었다. 또 한민당은 말 많은 친일정당 어쩌고 하는 모함에도 빠져있지 않았나? 김성수도 문제가 많고 장택상도 맘에 별로 들지 않는 인물이라는 말이 김구의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임정 측의 특별행동대(Special Action Group) 대장인 김석황이 이런 저런 인물들을 주변에 모아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문제는 이런 점들을 정보원 등을 통해서 미군정이 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결정적인 시점이 온다면 결국 이런 것들이 모두 증거가 될 것이다.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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