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문과 낙인찍기
    [정지된 역사] 방첩대 4. 베어드와 김수임
        2015년 11월 02일 1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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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관 : 누가 되었건 증오하는 사람에 대해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이 일상적이었나?

    캐롤 대위 : 만약 그렇게 말하는 게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면, 아마 재빨리 그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실제 그 사람이 진짜 공산주의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다.

    – 로버트 캐롤(Robert E. Carroll) 제25 CID 수석요원, 베어드 대령 조사보고서 가운데에서.

    종합1

    사진설명 : (왼쪽사진) “1999년 10월 29일, 성남지원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검을 나서고 있는 이근안”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0년 경찰이 된 이근안이 경찰의 대공수사에 입문한 것은 1972년 경찰청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은 때 부터였다. 신문에서 목사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가 과거 한때 했던 고문(!)에 대해서 후회하고 참회하며 목사 활동을 하는 줄 알았는데. . . 용산하면 용산역보다 대공 치안본부 분실이 먼저 떠오르게 만든 것은 바로 이근안이 주역이었던 고 김근태씨를 고문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고문을 했길래 ‘빨갱이들이 치를 떨까’라고 궁금해 하신 분들은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보시길. 1986년 ‘경찰의 날’에 오른쪽 사진 속의 인물과 닮은 대통령에게 훈장도 받았다고 한다.

    (오른쪽) “닥터 쿤(Doctor Edwin Wade Koons) 외 미국인 선교사들을 고문한 혐의로 체포된 용산 경찰서의 송갑진 형사” (출처 : NARA) 지난 20년간 한국, 아니 “조선총독부 경찰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해온 사람”을 대체 왜 미군이 잡아들였는지는 뻔하다.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그 고발자들이 미국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하지의 정치고문 역할을 맡고 있던 언더우드 목사님께서 이 용산경찰서의 악질 고문경찰을 고발해버린 것이다. 미군정이 들어서자 열심히 경찰활동을 했던 그는, 1946년 5월 17일 일본 수가모(Sugamo) 형무소에 전쟁범죄 혐의로 수감되었다. 1942년 12월 19일, 미 국무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선교사 세 명을 ‘물고문(water cure)’과 잔인하게 구타하는 등 무려 6차례 동안 고문을 했다. 그것도 불과 보름 동안에!”라면서 일본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원래 선교사란 그런 고생하라고 보낸 것인 줄을 잘 모르고 있었나부다. 고문을 받던 1942년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의 평균 나이는 56세였다.

    요즘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영화를 여러 편 보았다. 김무성씨께서 우리나라 영화계의 “90%는 좌파”가 틀림없는 것 같다고 말 할만도 한데, 암튼 암살도 봤고, 베테랑도 봤다. 베테랑은 자주 등장하는 형사 영화인데, 형사들 이야기보다 재벌들의 일상이 잔잔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데 우리가 살펴볼 경찰은 그와는 좀 다른 시절의 이야기다. 미군정기 한국경찰에 대한 미군들의 불신은 매우 높았다. 한데 그런 한국경찰이 제출하는 정보보고나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100% 신뢰한다. 그래도 이 이상한 신뢰관계에 대해서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 후회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한국의 경찰제도에 대해 비난하기도 했다. 지난번에 보았던 『베어드 대령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경찰은 그저 용의자를 줘패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윤리적인 압박을 통해서 얻는다. 육체적 압박이란 바로 철저한 고문(out and out torture)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물고문(water cure)은 아주 일상적인 수단이다. 전기고문과 뺀찌도 자주 이용된다.” 

    – 미군사고문단 참모장 윌리엄 라이트(William H.S. Wright) 대령

    “미군 한 명이 샷 건으로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한국경찰이 그 무기를 찾아냈고 포상도 했다. 나는 인천경찰을 방문했고 그들이 살인범을 잡았다고 말했다. 한데 우리가 수사해보니 그 한국인은 범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잔인함을 불사하는 한국경찰의 공통점(commonplace)를 잘 보여준다. (중략) 한국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감옥에 있는 경우가 무수히 많았다. 내가 본 것을 직접 보지 않는다면 정말 믿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발가벗겨진 채 벨트로 얻어터지는 걸 보았다. 그 사람의 몸에는 단 1인치도 상처가 없는 부분이 없어질 때까지 얻어맞았다.” 

    – 로버트 캐롤(Robert E. Carroll) 제25 CID 수석요원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와 고유의 잔인성(inherent brutality)은 오리엔탈 군대의 특징으로 보인다.” 

    – ‘미군포로의 행동’ 미 육군 심리전처 작성, 1954년 4월 2일.

    캐롤 대위는 “정말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살벌한 기억”들을 들추면서 “한국인들의 자백은 정말로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치를 떨었다. 이 사람은 베어드 휘하에 있던 CID(Criminal Investigation Detachment) 수사요원으로 각종 한국인과 관련된 수사들을 직접 지켜보던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자백이 이후 오랫동안 범죄를 확증하는 유일한 단서로 역할했음을 잘 모르고 계신 모양이다. 물론 김수임 재판에서도 그랬도. 마지막 문장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이 남긴 기록들 가운데 하나인데, 남북이 모두 오리엔탈 군대가 가진 특징을 잘 살려왔다고 지적한다. 아, 쪽팔려. . . 아무튼 김수임이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베어드와 김수임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었다. 물론 이런 비난의 가장 큰 책임은 한국경찰에 대한 불신에 있었을 터인데, 이런 전통은 비교적 오랫동안 전수되었다.

    2

    사진설명 : “모리스 펠즈(Morris Feldes) 일병과 조엘 다이어(Joel Dyer) 병장이 경주 인근에 붙어있는 철자가 잘못 붙어있는 구조물을 바라보고 있다. 1950년 8월” (출처 : NARA) 아마 유엔군, 사실 미군이 대부분이었지만 한국을 구원하러 들어온 미군이 세계최강(forcest!)이라는 필자의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다 보니 철자법이 틀렸나보다. 요즘 철없는(?) 애들이 미국이란 말보다 ‘천조국’이란 말을 더 잘 쓰긴 한데, 저걸 한 50년 쯤 뒤에 들었다면 누군가 비슷한 소릴 또 했겠지. 아무튼 . . . 이 포스터를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경찰은 민중의 지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찰과 긴밀히 협조했을 단체에서 만든 것은 분명하다. 뭐 청년방위대도 있고, 서북청년단도 있었으니 그 중 한 단체가 만들었지 싶다. 아무튼 당시 극우파들이 보기에도 지팽이는 사람을 때리는 데에 더 효과적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구호라고 하겠다. ‘民衆’이란 단어를 요즘은 뭐 별로 안 쓰지만, 저 당시에는 우파, 아니 극우파들이 종종 사용하는 애칭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3

    사진설명 : “경성형무소의 경찰 책임자였던 사카라 마루씨가 서울지역 부헌병감에게 일제 강점기 사용되었던 사형집행 올가미를 들어보이고 있다. 1945년 10월 30일.” (출처 : NARA) 사형집행 올가미의 모습이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간단하다. 한국이 식민지라서 저것도 간단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앞쪽에 천막을 가릴 수 있도록 해두었다. 해방 후 이 형무소를 인계받은 미군이 얼마나 많은 사형집행을 했을까? 나도 궁금은 한데 아마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로 미군 점령 당시 사형집행은 심문, 자백, 조서작성, 공판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루어졌다. 여운형이나 장덕수 같은 인물들이 그렇고, 또 제주도에서 3~5만명 가까운 사람들, 대구에서 발생한 1946년 10월 항쟁에서도 많은 인원들이 재판이 없이 사형 당했다. 실제 미군은 정치범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려놓고도 대부분 한국정부에 넘겨버렸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미국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자면, 한국 경찰의 능력 그러니까 성실함, 근면함, 낮은 임금에도 굴하지 않는 높은 사명감, 조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의지 등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한데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동양적인 전통”으로 인해 한국 경찰이 사용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완전히 불신했다. 1949년 주한미대사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북한 청년 한 명이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는 혐의로 체포됨(C-3). 코멘트 : 이러한 독극물 관련한 보고들이 다수 접수되고 있지만 실제 사실이 확인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최근 춘천에서 경찰이 방송을 통해서 마을 우물에 독을 풀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이 방송으로 남한의 모든 우물에 독극물에서 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우물이 오염되고 있다는 루머 선풍이 일고 있다.”

    – JOINT WEEKA 25호, 1949년 12월 2일.

    유사시에 적(?)이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우물에 독을 푼다는 사실이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미 군정기였다. 물론 무차별 살상과 관련한 루머는 아주 오랜 예전부터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이런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단 한 번도 실제 우물에 독을 풀어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은 못들은 것 같다. C-3란 아마 ‘그럭저럭 믿을 만함’ 정도 수준의 정보신뢰도를 나타낸다. 이 정보 역시 한국경찰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이 말고도 1946년 말부터 나타나는 각종 ‘우물에 독을 탔다더라’류의 정보들과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정보사령부의 비슷한 류의 정보는 하나같이 거짓된 정보였다. 필자도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이 비슷한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을 신고하라는 교육을 받았더랬다.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데에는 타고난 소질이 있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은 취약했나보다.

    미국이 왜 한국인들을 필요로 했을까? 김수임이 다른 정보원까지 대략 11여명의 정보원망의 책임자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수임은 베어드를 알게 된 1946년 봄부터 1949년 9월까지 적어도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충실한 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 달에 최소 십 만원의 급료를 미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당시 한국 최초의 입법기관이라던 입법의원 월급이 3,500원 정도였고, 서울대 교수의 월급은 2,500원 그리고 임금인상을 주로 내걸었던 노동자들은 2,000원에서 3,0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던 것을 보면 베어드가 말한 “십 만원의 급료”(이것은 급료를 직접 전해주었던 베어드의 증언임)를 받았던 정보원들이 어느 정도의 수입이었는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국회의원과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저 정도면 딱 좋아 보이긴 하네. 뭐 저때는 혼란의 시기고 건국도 되기 이전의 시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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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우루과이, 몬테비디오. 몬테비디오에서 반공 시위를 주도하던 ‘헝가리의 자유전사’ 단원들이 소련 영사관 앞에 관을 가져다높았다. 우루과이로 망명온 이들은 망명국가들의 관을 갖다 놓았다. USIS/몬테비디오. 1947년 9월 9일.” (출처 : NARA) “공산주의자들은 살인마!!” “자유를 위해 죽은 사람들” “헝가리에 자유를”과 같은 구호들이다. 특정 공간을 이처럼 적대화 하는 조치들은 이념 대립 시기에 자주 볼 수 있는 광경 중 하나이다. 당시 유럽에서 미국과 힘겨루기 중에 있던 소련을 상대로 한 이런 공격은 우루과이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 정동에 있던 소련 영사관은 1946년 6월 ??일 정판사 사건으로 좌익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던 것과 발맞추어 곧바로 폐쇄조치 되었다. “우리도 평양에 영사관이 없잖아?”라는 하지의 변명과 함께.

    “나는 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확신했었고, 그런 종류의 인간이 미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24군단 참모장 토마스 헤렌(Thomas W. Herren) 소장, 1950년 9월 27일.

    주한미군의 넘버원이 하지였다면 헤렌은 넘버 투 쯤 된다. 주한미군 참모장으로 참모급들 그러니까 인사부에서부터 병참부에 이르는 주한미군 참모의 대장이던 이 양반이 보기에도 베어드가 너무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아도 베어드에 대해서는 각종 소문이 떠돌던 판이었다. 정보원을 상대로 이상한 행동(밤 10시쯤 정보원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퇴근한다든지, 짚차 등을 팔아서 돈을 챙긴다든지, PX에서 물건을 사서 한국인들에게 갖다 준다든지 하는)에 대한 보고가 1947년 10월경에 시작된 비밀조사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이 조사는 워싱턴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베어드가 국가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지는 “CIC에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내가 지시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지시는 “워싱턴으로부터” 아마 “육군부 장관으로부터”(당시에는 전쟁부War Department였다) 하달되었다. 하지만 왜 전쟁부에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 베어드의 부인께서 전쟁부에 ‘소원수리’ 같은 것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국 주둔 당시에도 미군에 소속된 여성들 사이에서 베어드의 추문은 유명했다. 그런 소문들이 베어드 대령의 부인에게도 전달되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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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1947년 3월 26일. 한국 언론사에 획일점이 될 날로써 조병옥 경무부장이 언론사 회견을 자청하였다. 새롭게 얻게 된 언론자유 문제를 토의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서울신문사(Seoul Press) 이원혁(Woh Hyk LEE), 조병옥 경무부장, 대동신문사 사장이자 입법의원 부의장을 맡고 있던 최동오, 경무부 대외홍보 담당 자문을 맡은 리차드 프레드릭씨. 일제시대 때는 경찰이 한국의 언론에 대해서 철저한 검열을 통해서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은 언론사 편집인들을 상대로 미국에서와 비슷할 정도로 완전한 언론자유가 주어질 것에 대해 설명했다.” (출처 : NARA) 1947년 3월 26일이라. . . 이 날은 주한미군정 공보부령 제1호가 발표된 날이기도 했다. 한데 공보부령이 사진 설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언론자유여! 만개하라~~”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정기간행물 허가정지에 관한 건’이라고 이름 붙은 이 법령은 정기간행물의 신규허가를 금하고,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도 휴간이 잦을 경우(일간 10일, 주간 3주, 월간 3개월) 아예 발행허가가 자동 취소되면서 언론에 대한 자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금지시키는 내용이 더 많았다. 물론 위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서울신문과 대동신문은 모두 우파쪽에 속한 편이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맨 왼쪽 인물(이 인물이 누군지는 설명이 없다)은 아마 좌익 인물(이 시기 이미 좌익 3대 신문이던 해방일보, 현대일보, 조선인민보는 모두 폐간된 상태였음)이 아닐까 싶다. ‘이 쉐끼들이. .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 회의를 주도한 조병옥은 해방 후 가장 앞장서서 좌익 척결에 나섰던 인물이다. 물론 미국인들 앞에서야 이 사진에서처럼 항상 고운 얼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건 24군단의 이 비밀 수사가 시작되면서 점령사령부의 헌병사령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 최고사령관, G-2 책임자인 로빈슨 대령, 수사를 비밀리에 진행했던 CIC 요원 두 명(미즐리 중위와 몰리나 대위)과 정보원 등 5명만이 알고 있던 비밀 수사였다. 당시 수사를 전후한 시점(1948년 2월경), 베어드의 이 미묘한 인간관계에 대해 의심하던 사람은 남한점령 최고사령부의 책임자, 하지 최고사령관, 헤렌 참모장, 벨 참모장보 모두였다. G-2의 책임자였던 로빈슨(Robinson) 대령과 월링턴(Wallington) 대령 역시 그랬고. 한데 베어드는 체포나 강제출국은커녕 보통 해외근무 기한으로 주어지는 2년을 훌쩍 넘겨 4년을 근무했다. 만약 김수임 관련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추가로 1년을 더 근무할 생각이었다. 1948년 2월경에 마무리된 최종 수사결과에서 “김수임이 공산주의자라는 물증은 없었으며, 베어드 역시 업무적으로 공산주의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프라이빗 라이프가 너무 “외로웠던 것”이 문제였다.

    미국은 아다시피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생활을 엄격히 구분한다. 베어드가 이 공사 관계를 헷갈려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적으로 너무 김수임을 편애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론을 두고 모든 사람이 베어드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혼관련 문제 따위로 당시 정신없이 바빴던 우리를 골치 아프게 했던” 사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일만 잘하면 오케이라는 공식이 여기서도 발휘된다. 모든 국민이 안다면 모를까, 불과 5명만이 알고 있던 이 문제를, 굳이 5.10 선거를 앞둔 정신없는 와중에 그것도 헌병 책임자를 교체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한 가지 기억해 둘게 있다면, 당시 CIC는 김수임이 1946년에서 1947년 여름 사이 월북한 이강국이라는 공산주의자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공산주의의 스파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결론내린 점이다. 김수임과 이강국에 대한 파일이 CIC에 상당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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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1951년 10월 22일. 제1 병참고에서 세 명의 여성 운전수들이 자신들의 짚차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 한국” (출처 : NARA) 한국전쟁 당시 몇 안 되는 여성 운전수들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이 여성들은 전쟁에 참전한 몇 안 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다. 김수임은 두 가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하나는 크라이슬러 1937년형이었고, 나머지는 위에 나오는 군용 짚차다. 색깔은 크라이슬러는 검은색이었고 짚차는 하얀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울에서 자동차 그것도 미군들이 타고 다니던 짚차를 여성이 직접 뒷 자석에 앉아있는 것을 보는 일이란 흔치 않았을 것이다. 모윤숙을 비롯한 낙랑클럽 회원들쯤 되면 몰라도. 김수임이 미군 짚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녔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던 점이었다. 이강국을 38선까지 태워다 준 자동차는 이 짚 차가 아니고 승용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진의 여성들과는 달리 영어를 잘했던 김수임도 운전면허가 없었는데, 이강국을 월북시켰던 당시 운전을 해주었던 최영태 역시 김수임과 같이 재판을 받고 2년형에 처해졌다. 김수임은 6월 28일, 한국군이 서울을 비우기 직전에 즉결처형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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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한국경찰에 소속된 형사가 공산당 당원을 수색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출처 : NARA) 내가 이 사진을 본 지 물론 중간에 잠시 쉰 적도 있지만 한 2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누가 형사고 누가 공산당원인지 판단이 안 선다. 행색을 봐서는 오른쪽에 서 있는 분이 옷도 깔끔하고, 구두도 좀 더 새것을 신었고, 또 넥타이까지 맸으니 좀 더 형사일 가능성이 높은데. . . 한데 왼쪽 사람이 형사일 가능성은 없나? 저기 뒤에 보면 여러 명이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날은 1947년 3.1절 기념식이 열린 날이었는데 좌익이 개최한 기념식이 끝난 뒤, 군중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다가 남대문 경에서 우익 시위대를 만났다. 실제 만나서 3.1 운동을 같이 기념하면 좋았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 좌우간에 누가 더 사람이 많은지 등을 두고 싸우다가 결국 총탄이 오가면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건 왼쪽 사람이 형사일 가능성도 있다.

    앞서 본 것처럼 김수임이 취직(?)한 이후에 어떤 정보를 들려줬을까? 모르긴 해도 좌익이나 공산당 관련 정보들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구 폭동이 일어날 무렵 좌익을 체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언급은 있지만 정작 김수임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은 각종 범죄사건들 때문이었다. 암시장 단속, 마약상 관련 사건들, 성범죄와 관련된 정보들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사건들의 피해자나 관련자들 혹은 범죄와 관련된 정보들을 아주 잘 넘겨주었던 것이다. 한데 그 과정에서 베어드와 같이 집에 오래 있기도 했고, 베어드가 머무는 관사에 출입하여 “부라자만 입고 있는 모습”을 목격당하기도 했으며, 베어드의 자동차를 불법으로 넘겨받아서 버젓이 타고 다니는 등의 문제는 있었지만. 베어드는 이미 30여대가 넘는 차량을 불법으로 판매하면서 “돈에 미친 놈”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씀씀이가 매우 헤펐다.

    게다가 술주정도 남달랐는데, 한번은 유성에 있던 한 호텔에서 여성 몇 명을 불러다 놓고 술을 마시다 CIC 요원에 걸려서 혼난 적도 있었다. 베어드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술을 자주 마시곤 했다. 자 술 잘 마시고 돈 잘 쓰는 사람, 뭐 지금쯤이야 재벌 2세쯤 되겠구난 소릴 들었겠지만 하지나 헤렌 참모장이 보기에는 영 못미더웠다. 더구나 그는 남한을 점령하던 미군의 헌병사령관이었다.

    베어드의 수사를 대체 왜 시작되었을까 하는 점은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굳이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미 소문으로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절대 앉혀서는 안 될 놈”이라고.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훌륭한 ‘경찰’이었다. 앞서도 잠시 나온 것처럼 “몽둥이를 휘두를 줄만 알았던” 베어드는 조병옥과 같은 “민중의 지팽이” 한국 경찰에게는 아주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다. 베어드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복무 연장(!) 신청을 제기하면서 한국 주둔기간을 다른 병사들보다 두 배 이상 오랫동안 한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드럼라이트라고 이승만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주한미대사관의 참사관이 있었는데, 1949년 여름경 베어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왜 한국 경찰들에게 무기를 빼앗지 않는가?”라고. 베어드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미국 경찰도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라고. 미군정이 무기소지를 금하고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사실상 미국과 비슷한 ‘총기소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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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위) “광주, 한국. 1948년 5월 8일. 한국경찰이 5.10 선거를 방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저항하여 자발적으로 자위단을 형성한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 지역 조직들이 바로 한국의 첫 번째 민주적 선거에 대한 한국인들의 희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 “1948년 5월 1일, 제주도. 한국의 경찰이 30밀리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경찰서를 지키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습격으로 인근 마을들이 습격을 받고 있었다. 최근 이런 공격으로 30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노인들과 여성들이었다.”

    위쪽 사진의 죽창을 보면 한때 시위에서 사용하던 종류의 쇠파이프, 곤봉 같은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끝이 날카롭게 잘려져 있다. 잘 하면 바느질도 가능해 보일 정도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경찰의 어깨에는 카빈 소총을 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시기 민간에서 좌우의 폭력이 자주 발생하곤 했는데, 이런 종류의 창(spear)류는 물론이고 권총과 소총이 경찰의 특별한 제지도 없이 자유롭게 활용되기도 했다. 아래 사진에는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오신 분들이 보기에는 총기의 위치가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 가운데도 아니고 아래는 뻥 뚫려있으며, 그나마 왼쪽의 시야는 출입문으로 대부분 가려있는 위치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항쟁은 이미 오래전에 대한민국 대통령, 뭐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그 분이 계실 적에 “국가의 잘못으로 희생된, 4.3 항쟁”이라는 사과를 받아낸 바 있다. 드럼라이트가 주장한 “경찰에 대한 무장해제”라고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무기들을 지칭한 것이다. 무기를 소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불법화’되어 있던 시기였다. 정확히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일본군이 가진 무기들을 비롯해서 모든 종류의 총기와 도검류에 대해서 민간이 소지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시기 민간에서는 일본군의 무기는 물론이고 미군의 총기들과 중국과의 밀무역 등을 통해서 군 총기류를 상당부분 소지하고 있었다.

    베어드와 김수임의 관계가 결국 문서나 증언으로 유죄를 입증하기 곤란해지면서 베어드의 기소문제는 유야무야 되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베어드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고 보도되었지만, 베어드는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가거나 퇴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김수임과 관련한 재판은 적어도 미군들이 보기에 “재판은 미리 결정되어 잇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베어드가 관련되어 군사정보, 지금쯤이면 아마 감옥에 가도 열두 번은 갔을 법한 주한미군의 철수 시점을 북한에다가 발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수사관도 배치하지 않았는데, 수사가 진행될만한 어떤 구체적인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보들을 과연 누가 미군들에게 흘려줬을까? 이런 건 일종의 불고지죄에 해당한다. 불고지죄 알지? 적어도 대한민국 국방장관 신성모, 채병덕 참모총장 이 두 명은 검사의 조사보고서를 영역하여 미군 책임자들과 상의를 나눴다. 적당히 알아서 미국으로 들여보내라고 충고도 하면서. 이 소식을 들었던 미군사고문단 단장이던 로버츠 장군이나 참모장 라이트 준장은 매우 불쾌했다. 뭐 그랬으니 “저런 놈을 미국을 대표하는 자리에다 앉혀놓았으니” 하는 소리도 나왔겠지만, 3년 간 어렵게 쌓아놓은 한미관계에 금이 가는 소리가 마구 들려왔었다.

    김수임과 베어드 사건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 보자. 사실 ‘베어드 보고서’는 정보원과 관련하여 상당히 흥미로운 힌트들을 많이 제공해준다. 정보수집을 위한 비밀자금이 운영됐다는 점, 정보원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정보원들이 결국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한 가지를 더 들자면 바로 ‘안전가옥’과 관련된 내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 헌병대가 정보원망을 운영하면서 여러 채의 가옥을 이런 종류의 ‘안가’로 활용했다. ‘정보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을 비밀리에 만나기 위해서 활용하는 가옥’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안가가 있다. 김수임에게 내어줬던 ‘옥인동 19번지’에 있는 집처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안가처럼 보이지 않는 주택이 하나있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이승만옹께서 잠시 살고 계시던 ‘마포장’처럼 누가 보더라도 미군이 경비를 서고 뭔가가 진행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런 주택이 또 있었다.

    전자는 훗날 김수임이 살던 집이라고 사진도 올려놓고 했던데 마포장의 경우는 사진을 아직 찾지 못했다. 아마 항공사진으로 본다면 저기 오른쪽 강변에 있는 언덕 부근에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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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이 사진은 “세브란스 상공에서 촬영”한 것이라고만 설명이 붙어있다.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아랫편에 연희전문학교가 보인다.

    이 사진의 오른쪽 윗부분, 그러니까 비행기 날개 아랫부분의 언덕처럼 생긴 곳이 마포장이 있던 지역이 아닐까 싶다. 사실 지리는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다음 원고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싣지 않을 수 없다.

    ‘마포장’은 한 때 이승만이 잠시 살던 곳이었다. 1947년도 8월부터 10월까지 석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을 마포장에서 잠시 살았는데, 하도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춥다고 하셔서 그냥 집을 옮겨버렸다. 한데 이 집은 원래 미군정이 귀속재산으로 보유하던 가옥이었고, 이승만에게 잠시 임대해 주고 있었다. 이 집이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주한미군에게 되돌아갔고 이런 저런 공사(도로를 만들고 경비시설을 구축하는 등 헌병대가 공사를 담당했다) 끝에 ‘안가’로 재탄생했는지는 김구 선생께 잠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베어드는 당시 김구를, 그러니까 자신들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의 알 카포네”를 장덕수 암살과 관련하여 체포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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