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여전히 기다림이다
    [그림책 이야기] <나는 기다립니다...> (다비드 칼리/ 문학동네)
        2015년 12월 24일 12: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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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
    잠들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 주기를
    케이크가 다 구워지기를
    비가 그치기를
    -본문 중에서

    나는 기다립니다

    어린 소년의 말입니다. 한 줄이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검은 펜으로 그린 그림이 한 장면 한 장면 지나갈 때마다 소년이 자랍니다. 그리고 각 장면의 중심에는 언제나 빨간 끈이 있습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 기다릴 때, 어린 소년은 빨간 끈을 끌어당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마치 빨간 끈이 소년의 간절한 소망 같습니다. ‘잠들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 주기를’ 기다릴 때, 빨간 끈은 소년의 입술로 변합니다. 마치 엄마의 뽀뽀를 기다리던 소년의 입술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만 같습니다.

    ‘케이크가 다 구워지기를’ 기다릴 때, 빨간 끈은 엄마의 머리끈이 됩니다. 소년에게 맛있는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엄마에게 리본 모양으로 묶인 머리끈은 자랑처럼 빛납니다. 그리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때, 빨간 끈은 소년의 스웨터가 됩니다.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소년의 마음을 빨간 스웨터가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만 같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기다림으로 그려 보이는 다비드 칼리의 글은 한편의 서정시입니다. 그리고 다비드 칼리의 이야기를, 펜으로 그리고 빨간 끈으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세르주 블로크의 그림은 독자의 심장을 두근두근 달리게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이제 소년은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사랑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된 것입니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저마다 종교는 다를지라도, 또는 종교가 없더라도, 굳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온 세상이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누는 때입니다. 소년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듯이 누군가는 사랑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크리스마스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양말을 걸어놓고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이입니까? 아니면 어린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입니까? 아니면 더 이상 산타클로스도 크리스마스도 믿지 않는 어른입니까?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우리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최근 저의 일상을 돌아보면 한 달에 두세 번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매달 두세 번은 장례식에 가야하는 어른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잊고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죽고 사랑받는 사람도 죽습니다.

    스스로 중병에 걸려도 생을 놓아 보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린다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쉬이 놓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떠나든 말든, 놓든 말든, 우리는 모두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노년에 이른 주인공이 병상에 누운 아내 옆에 앉아 ‘이 사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손과 아픈 아내의 손을 이은 빨간 끈이 끊어지고 있어서 슬픈 예감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 장면에서는 장의차와 조문 행렬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빨간 끈은 화환이 되어 장의차의 뒷문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삶은 이어집니다. 그에게 삶은 여전히 기다림입니다. 자식들을 기다리고 손자손녀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삶은 그렇게 계속 이어집니다.

    저는 매일 강의실에서 만날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서평을 통해 지면으로 만날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에스엔에스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이어서 나올 책들을 통해 만날 독자들을 기다립니다. 바로 그분들에게 전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전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작가들이 그림책을 통해 제게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작가들도 있고 아직 세상에 남아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새롭고 훌륭한 작가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입니다.

    다비드 칼리와 세르주 블로크의 『나는 기다립니다…』는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걸작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이라는 빨간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이며 이별이며 죽음이며 새로운 탄생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놓은 사랑의 끈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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