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첩대, 그 공포의 출발
[정지된 역사] 첩보이야기 2
    2015년 10월 02일 11: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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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건강 문제로 오랫동안 연재를 중단했던 칼럼 ‘정지된 역사’를 다시 재개한다. 건강이 아직 여의치 않은 데도 다시 연재를 하기로 한 필자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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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연재 글 링크 ‘전쟁의 희생자, 생계형 정보원’

“한국전쟁은 미군 방첩대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한 장이 서술되었던 바로 그런 무대였다.”
– 미육군 방첩학교 편, ‘한국에서의 방첩대 공작’ 서문에서.

“‘방첩대(CIC)’라는 세 글자는 한국인들에게 공포스러운 단어였다. 왜냐하면 한국 방첩대는 정말이지 잔인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미군 방첩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받아들였다.”
– 잭 셀즈(Jack D. Sells), 제111 방첩지대 특수요원(Special Agent)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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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왼쪽) “한국인 피난민들이 2사단 포로집결지에서 짐 수색을 받고 있다. 이들이 별다른 혐의가 없으면 유엔 민사처로 넘겨질 것이다. 1951.7.19” (오른쪽) “짐 수색과 심문이 끝난 다음 피난민들은 집결지에서 별다른 혐의가 없는 경우 민사담당자에게 이관된다. 보통 대기 시간은 24시간 정도다. 이들이 2사단 포로집결지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하루 2끼의 한국식사가 제공된다. 1951.7.19” (NARA 소장) 통상적인 피난민 통제의 절차를 잘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왼쪽 사진에서 짐을 수색하는 헌병과 서류를 손에 들고 있는 미군이 보인다. 손에 든 서류에는 여기서는 잘 안보이지만 “prisoner of war”라고 쓰여 있다. 피난민 행렬에 대한 1차 조사는 헌병, 한국경찰 등이 담당했지만, 의심스러운 피난민의 경우 피난민 집결지에 나가있는 방첩대 요원의 심층조사를 위해 피난민 집결지로 이동한다. 오른쪽 사진의 영감님 목에는 왼쪽 사진에는 없는 태그가 붙어있다. 추가심문이 필요한 경우 이렇게 표식을 붙였다. 사진설명에서는 이렇게 표식을 붙인 추가심문(further interrogation)이 “평균 2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설명했는데, 실제 한국전 당시 활동했던 미군 방첩지대(CIC Detachment)들은 사단의 경우 48시간, 군단 이상의 경우 72시간까지 피난민들을 억류할 수 있었다.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당신은 프랑스어를 쓰는가?”라는 질문의 한국적 변종이 이 피난민 집결지에서 출현했다. “당신의 액센트는 어떤가?”. 북한 사투리를 사용하는가는 피난민 심사에서 주의 깊게 관찰하던 체크포인트 가운데 하나였다.

피난민들 틈에 섞여있는 “질 떨어지는 간첩 요원들”을 발각해내는 일은 “영웅적인” 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어쨌거나 한국전쟁을 통털어 미군 방첩대의 가장 과중한 업무(한국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페이퍼 워크가 그에 못지않게 높은 업무비중을 차지했지만)는 바로 이 ‘저질 간첩들’을 색출해내는 일이었다. 그 수가 많았던 경우에는 방첩지대 하나가 걸러 보낸(?) 피난민의 수가 30만에 육박할 정도였지만, 그 어떤 경우도 이 피난민들 틈에서 굵직한 거물 간첩을 포획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냥 흘려보냈더라도 그다지 큰 피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스스로 무엇을 탐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90% 이상이 문맹층이었던” 이 간첩들을 색출해내느라 엉뚱한 피해만 늘어갔다. 하루바삐 후방으로 피신하고자 하는 피난민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키우던 닭을 인민군들에게 빼앗기다시피 내놓은 아낙, 아들이 의용군에 끌려간 부모, 해방직후 좌익연루 혐의로 잠시 옥살이를 했던 여성 등등.

이들 모두는 전선의 화마를 피해 안전한 곳을 찾으려했지만, ‘방역선(quarantine)’을 넘을 용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뒤에서는 점점 인민군이 몰려오고, 눈앞에는 조금만 수상한 행적이 발견되더라도 곧바로 포로수용소에 수감될지 모를 ‘검문소’가 기다리고 있고. 순진하고 급했던 피난민들의 대안은 인적이 많지 않은 혹은 출입이 금지된 다른 루트를 찾는 것이었다.

전선 인근을 관할하던 미군 사령부에서 정해놓은 ‘피난민 통행로’를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심사지점을 에두르는 우회로에는 수많은 경고판들이 나붙었다. 경고판에는 한국어로 “누구든 이 길을 이용하는 자는 발포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난 60년 이상 ‘전시상태’에 놓여있던 한국인들이 한번쯤은 모두 마주했을 이 경고문구판이 얼마나 많은 인명을 앗아갔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땔감으로 쓰기 위해, 한국인들이 이런 경고판들을 대부분 떼어버렸”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 길이 지옥으로 통하는 길인 줄도 몰랐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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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왼쪽) “미군 헌병이 용산 미군기지에 출입하는 한국 여성의 배급카드(ration card)와 신분증을 체크하고 있다. 1969년 4월 28일” (오른쪽) “지난밤 용산 인근의 게릴라들과의 교전 와중에, 북한군을 피해 피난하던 한국 민간인들이 사격선에 들어오면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8월 25일” (NARA 소장) 수잔 손탁의 말처럼 미군이 공산주의를 상대로 취했던 태도는 전염병을 상대로 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이념적 건강성을 증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산주의의 외곽에 둘러놓은 방역선을 통과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반대로 이 방역선을 당당히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또 튼튼하게 쌓아올려진 한반도의 대공 방역선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런 점에서 자랑할 만했고. 1960년대 미군부대에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건강한 존재’라는 증명이었다. 왼쪽 사진의 귀부인을 보면 이념적으로도 또 재정적으로도 ‘건강한 계층’이었던것 같다. 오른쪽 사진에 놓여있는 시신들이 “누구든 이 길을 이용하는 자는 발포함”이라는 경고를 어겼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캡션의 설명대로 양측의 교전 중에 발생한 부차적 피해인지 확정할 수는 없다. 비록 이 사진이 그러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미국이 그어놓은 금지구역에 출입했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처벌받은’ 억울한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50, 60년대 미군부대 인근의 쓰레기통을 뒤지다 경고없이 사살당한 한국인 피해자들의 뉴스를 신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미군들은 거의 없었다”며 “도대체 한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라고 불만을 품은 방첩대 특수요원이 지키고 있는 저 방역선을 통과하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미군부대에 출입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적어도 미국 입국심사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애초 미국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외곽에 거대한 ‘방역선’을 둘러치려고 했을 때의 주요 타겟은 파시즘이었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훨씬 전이던 1937년의 10월 5일의 저 유명한 ‘방역선 연설(Quarantine Speech)’처럼, 루즈벨트는 파시즘에 대해 ‘병균’, ‘질병’ 등의 은유를 즐겨 사용했다. 바로 그 논리를 이어받아 자신의 후배들이 공산주의에 맞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긴 전문(Long Telegram)’에서 기초하여 이후 수십 년 간 냉전전사들의 전가의 보도가 되었던 무기, 즉 ‘봉쇄(containment)’는 전염병 예방학의 기본원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접촉을 차단하고, 외곽을 튼튼히 두르며,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주변 핵심지역의 건강성(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는 것. 이 ‘방역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성을 증명하는 것이 필수다. 신분증, 신원보증, 액센트 검사, 소지품검사 . . .

고5

사진설명 : 1918년 11월 14일, 미원정군의 시베리아 촬영사진. 미군 제27 보병 지휘대의 참모장교들의 모습. (NARA 소장) 미군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 지상군을 러시아에서 발생한 적색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했다.

어찌되었건 이 거대한 방역선의 최후 보루는 바로 방첩대였다.(국정원 직원들께서 들으면 섭섭하시겠지만 아직 국정원 할배가 태어나려면 10여년이 더 흘러야하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방첩대의 출생과 번성의 역사를 보면 존재의 목적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다.

미군 조직에서 오늘날의 방첩대가 확립된 것은 진주만 공격 직후인 1941년 12월 13일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미군 역사에서 오늘날 방첩대의 기원이 되는 ‘Secret Service’ 부대가 처음 조직된 것은, 미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의 정보참모부(G-2)가 간첩 잡는 특수부대의 편성을 요청한 것에서 비롯했다. 미 원정군이란 다름 아닌 소비에트 간섭전쟁에 참전했던 부대였고, ‘Secret Service’가 처음 신설된 것도 바로 1918년 무렵이었다. 애초부터 방첩대는 공산주의 사냥을 위해 탄생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오호 요것 봐라?

그래서 미 방첩대의 역사가는 정보참모부(G-2)와 방첩대의 탄생에 산파역할을 했던 미 전쟁대학의 Van Deman 소령을 “공산주의의 위험성과 그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당대의 동료들보다 무려 4반세기나 앞서서 깨달았던 선각자”라고 극찬했던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유독 시대를 앞서나가시는 분들이 많이 나온다. 거 참 . . .

아무튼 이 공산주의 사냥의 선구자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방첩대, 바로 특무대란 이름으로 출발해서 방첩대와 보안사를 거쳐서 . . . 마 여기까지. 아무튼 청출어람이란 이럴 때 써야 하는 문자다.

아무튼 CIC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Secret Service’의 핵심 목표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군 정보기관,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군정보기관의 가장 첫 번째 임무는 이 ‘공산주의자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였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고6

사진설명 : 1919년 4월 1일, 톰스크 내각의 주요 인물들. 이들 모두는 처형당했다. (NARA). 이들을 처형한 사람들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이었다. 1919년도는 연해주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수난의 시절이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동휘를 비롯한 극동지역의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연합군의 개입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쫓겨나던 시절이었다.

고7

사진설명 : 1919년 6월까지 모든 전문에 대해서는 연합군이 엄격하게 검열을 실시했다. 검열사무소 내부의 모습, 블라디보스톡. 미국,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일본 그리고 러시아 군대 관계자들이 전문을 검토하고 있다. (NARA 소재)

“1918년 8월 26일, G-2는 비로소 영구적인 부서로 참모부의 두 번째 부서(G-2)로 다시 확립”(Manuscript of “The History of the Counterintelligence Corps in the United States Army)”되었던 것이 소비에트 혁명을 무마하기 위한 미군 개입이 이루어지던 무렵이라는 점은, 이 부서가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면 이런 목적을 가진 부서가 어떻게 악용되었으며, 또 이용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이런 점은 한국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정보참모부(G-2)가 CIC와는 달리 일반참모부로써 항시 지역 사령관의 보좌역을 하는 기구이며 CIC는 특수부대로 방첩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한국의 사례에서 보이는 것처럼 G-2가 “상명”하면 CIC는 “하복”하는 단일 조직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점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 .

8-9

사진설명 : (왼쪽) “1950년 11월 미 8군 사진중대(167통신사진 중대)가 김창룡 육군 특무대 대령을 주인공으로 ‘한국의 방첩대 활동’이란 반공영화 촬영 장면을 찍는 장면.” (출처 : 연합뉴스 2013년 6월 24일자 기사) (오른쪽)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알려진 보안사 민간사찰 사건으로 발각된 민간사찰파일들. 육군 특무부대로 1950년 출범한 한국의 CIC부대는 이후 보안사를 거쳐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문동환,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등 재야와 야당 정치인들의 개인 자료들이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우리의 방첩대는 반공 대한민국의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많이도 배출했다. 반공에 있어서는 김구 뺨을 왕복으로 너댓번 쯤 갈길 만큼 위대했던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의 ‘Snake Kim’(김창룡)을 필두로, ‘전세계 어음 사기의 역사’를 새롭게 쓰신 이철희 준장, 언감생심 조국근대화의 아버지를 “야수”라고 불렀던 김재규, 이런 명단에 빠지면 섭섭하신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남몰래’ 보고 들은 게 남다르신지 NLL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송영근 의원에 이르기까지. . .

물론 출범 초기였기 때문에 의욕만 앞선 나머지 “한국 방첩대는 한국인들을 개처럼 취급하고 개처럼 패곤 한다”는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반공에 대한 신심 하나는 자신들의 “가이드”(미군 방첩대원들은 “신사적인 미군 CIC”에 비해서 “한국 방첩대가 잔인한 방법으로 증거를 짜맞추는 것”에 진저리를 치긴 했지만, 자신들을 “한국 방첩대의 가이드”였다고 부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를 감동시킬 만큼 탁월했다. (다음회에서 계속)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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