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희생양, '생계형 정보원'
    [정지된 역사] 첩보 이야기-1
        2013년 07월 08일 04: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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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첩(Counter-Intelligence)의 임무는 반역, 반란선동, 전복활동, 불평불만을 탐지하여 그것을 발각, 예방하여 현지에 수립된 부대의 작전활동에 기여하는 것이다. 아울러 군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 내부의 혹은 그 지역을 겨냥하는 간첩·사보타주 행위를 무력화하는 것에 있다.” 미 육군규칙 181-100

    선량한 시민들에게야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사실 첩보와 정보는 약간은 다른 개념이다. 보통 첩보활동 등을 통해 수집된 첩보(information)에 대한 1차적 가공(신뢰도 평가, 분석 등)이 이루어져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을 ‘정보(intelligence)’라고 부른다. 구슬을 첩보라고 치면, 꿰어 논 구슬이 정보인 셈이다.

    보통 우리들은 정보라는 말로 information과 intelligence를 통칭하고, 또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글을 쓰는 필자는 이 두 용어를 구분하면서 쓰겠지만, 둘을 혼용하거나 혼동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정보활동은 첩보활동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개념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되겠다.

    정보활동과 관련하여 우리가 경험했던 보다 뚜렷한 사례와 기억들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방첩(Counter-Intelligence)’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겠다.

    정보활동은 대체로 국가안보(궁극적으로 보자면, 정보기관의 불법적 활동은 이 개념 자체의 불분명함으로 초래되는 것이다)에 위협이 되는 모든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작업을 의미하는, 축구로 말하자면 하프라인 너머의 활동이다. 한데 하프라인 저쪽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비슷한 욕망을 가진(적어도 자신의 정부 혹은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존욕구에 있어서는) 집단이 동일한 활동을 우리의 진영에서도 전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막아내는 것도 정보기관의 중요한 업무가 될 수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우리 진영에서 벌어지는 적의 정보활동을 탐지, 저지하는 활동은 국내치안을 담당하는 기구가 맡기 마련이지만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또 국가 간의 경계가 무뎌지고 경제활동이나 과학기술에 관한 정보까지 국가안보라는 개념에 포함되면서, 이 단순한 첩보수집과 적의 첩보수집을 막아내는 활동의 경계가 느슨하게 되었다. ‘전원수비 전원공격’의 토탈사커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축구의 역사에서 이 토탈사커가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자극과 달리, 정보활동의 역사에 등장한 이 ‘정보활동과 방첩활동의 결합’은 비극이었다. 거대한 국내감시체계, 정보기관의 비대화, 인권침해, 시민의 정당한 저항권과 적국에 의한 사보타지 활동의 동일시 등등과 같은 부작용을 낳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라고 만든 기관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오늘날 전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보기관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체제의 문제(?)를 거론할 능력도 또 용기도(?) 없다. 다만 우리의 방첩활동사의 몇 가지 장면들을 사진으로 감상해 볼 뿐이다. 게다가 필자의 직업상 대부분 미군들의 정보 및 방첩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괜히 우리의 정보기관원들께서 신경을 곤두세우실 필요는 없겠다. 이거 남 얘기에요, 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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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위) “게슈타포 여성 비밀요원을 체포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부대(Maquis Forces) 대원. 이 여성은 이중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 1944년 9월 11일.”(NARA 소장)

    (아래) 1950년 6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여간첩 김수임. (출처는 불명) 스파이, 에이전트, 간첩(espionage), 정보요원(intelligence officer, intelligence personnel)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우긴 하지만 현장에서 발로 뛰는 정보기관원들의 부류는 이론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적국 혹은 적기관의 정보수집활동을 탐문, 저지를 목적으로 하는 방첩(Counter-Intelligence) 요원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첩보를 수집하는, 문어의 빨판이나 진공청소기의 흡입구 역할에 비유할 수 있는 정보수집요원이다. 이 후자처럼 단순히 첩보 수집만 담당하는 경우 정보원(informant), 정보제공자(informer)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특히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전자였다. 우리의 국내 정보기관들이 출범부터 손에 넣고 있던 ‘수사권’ 때문이다.(미국의 경우 국내의 방첩업무는 FBI가 맡고 있다) 이 수사권 때문에 고문시비, 인권유린, 간첩조작과 같은 불행한 단어들이 우리 정보기관의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게 된다. 한데 보통은 이 두 활동은 중첩되는 경우가 많은데, 방첩업무를 맡는 기관원은 자연스럽게 정보수집업무도 겸하기 마련이다. 선글라스를 낀 강인한 인상을 주는 게슈타포 비밀요원은 아마도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김수임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저 서로를 박멸하지 못해서 안달인 두 개의 거대한 적대적 체제가 70년 가까이 으르렁거리고 있는 한반도는 ‘정보활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실험실이다.

    뭐 한반도는 종종 이런 종류의 ‘사회공학’의 실험장소로 곧잘 활용되곤 했다. 전술핵무기가 처음 개발단계에 들어섰던 1951년 3월경, 전술 유도미사일 혹은 대구경 야포에 적재된 핵탄두가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던 작전조사처(Operations Research Office)가 실험대상으로(비록 도상실험이긴 했지만!) 삼았던 것은 1950년 11월과 12월 중공군과 북한군이 밀집해있던 한반도 허리 부근(철의 삼각지대, 황해도 대천리 등)이었다.

    전술핵의 효용을 실제의 데이터를 토대로 추론해냈던, 사실상의 첫 번째 모의연구였다. 일본의 대공방어벽이었던 남한이 공격받을 경우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던 스탈린에게도 한반도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이 거대한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성과도 많았지만, 실험에 동원된 인간 몰모트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억울한 희생양들이다.

    실제 한반도에서 진행된 동서진영 각축전의 대부분은 첩보전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그런 이미지들, 비밀리에 개발된 첨단장비, 잘 생기고 똑똑한 첩보요원의 활약, 치밀한 계획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실행, 그렇게 수집된 첩보-정보를 활용하여 가까스로 인류의 파멸을 막아내는 극적인 결말 등등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이런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했다.

    대부분의 첩보수집은 첨단 기기보다는 사람(HUMINT : 인간정보)에 의존했고, 숫적으로만 보자면 첩보요원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여성, 노인, 장애인, 거지, 부랑자 등이 활용되었으며, 치밀한 계획이나 사전 훈련을 거치기 보다는 즉흥적으로 포섭되고 선발된 ‘1회용 정보원’들을 막무가내로 투입하여 결국 별다른 소득없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렇게 해서 수집된 첩보들은 파국이나 재앙을 막아내기 보다는 그저 정보기관의 문서창고에 사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스로 정보활동의 첨병 혹은 체제 수호의 간성이라는 자의식 없이,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당장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도무지 취직자리라고는 없기 때문에 등등의 ‘생계형 정보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거대한 첩보수집체계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변에 위치한 존재들이었다. 야생의 먹이사슬이 그러하듯 이들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정보의 순환시스템을 지탱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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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 위 사진 “미군 보병들이 북한군 병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 북한군 병사는 금강 인근의 치열한 전투 와중에 사망했다. 1950년 7월 9일” (NARA 소장). 아래의 사진 역시 설명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날짜가 왠일인지 7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장면에 각기 다른 날짜를 기록한 미군의 실수 덕에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는 어렵겠다.

    개전, 아니 남침, 아니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지(!)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신속히 후퇴하던 와중에 벌어진 금강 인근의 치열한 전투를 기록한 두 장의 사진에는 언뜻 보기에 좀 이상한 설명이 붙어 있다. 일반 농민의 복장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잘 세탁된 깨끗한 흰옷이 좀 수상하긴 하지만, 그리고 군인 스타일로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금강 인근의 한 도로변에 누워있는 저 남자는 언뜻 보아도 북한군의 복장은 아니다.

    사진의 기록만으로는 이 사내가 아군에 의해 사살되었는지 아니면 피아간의 교전중에 살의없는 총탄에 희생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인민군과 중공군 그리고 국군의 월동복장은 대체로 비슷비슷하여 크게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민간인 복장과 군복은 분명히 구분된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만 교전대상으로서 전쟁법이 보장하는 적군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한국전,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 중에 생포된 북한군의 경우 군복을 벗어던지고 사복이나 심지어 국군의 군복을 착용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개전 초기 북한 정규군 병사가 고무신에 농민복장을 하고, 거기에 담뱃대까지 휴대한 채 교전지역을 어슬렁거렸을 가능성은 그리 높게 보이지는 않는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냥 심야에 허여멀건 물체가 지나가길래 쐈는데 날이 밝고 보니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마치 베트남의 미라이 학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 살을 먹었건 여든이 됐건 “적성 지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빨갱이”라는 식인데,….교양있는 선정주의를 지향하는 레디앙의 지면을 빌어쓰는 입장에서는 선정적이긴 한데 교양있는 방식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누워있는 저 남자가 북한군에 배속된 사회안전성 산하의 보안기관(당시 미군이나 한국군의 편제와 비교하면 CIC와 특무대(현 정보사령부의 전신)에 해당)인 북한군 총사령부 제3국 소속의 정보요원이거나, 북한군 정보부(미군과 국군의 일반참모 가운데 하나인 정보참모부(G-2)에 해당) 산하에 편제되어 있던 정찰병 혹은 수색병일 가능성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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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위) “서울을 함락한 다음 남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아래) “전선으로 이동하는 의용군” (NARA 소장) 한국전 당시 북한군은 정규사단 편성의 인민군과 점령지역에서 충원한 의용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진에서 드러나는 군복 상의 차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왼쪽 사진 배경에 보이는 건물은 미군정청 사령부이자 정부수립후에는 정부청사로도 일부 사용되었던 반도호텔로 추정된다.

    어떤 경우든 이들은 정규의 스파이 교육을 수료한 소수의 정예 간첩들이었을 수 있다. 당시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여러 개의 경쟁기관들이 대남 정보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기관은 사회안전성이었는데, 국내안보를 담당하는 제1, 2부와 달리 제3부는 북한 인민군에 편제되어 정치안보, 간첩, 방첩 등의 책임을 맡으면서 사보타지, 탈영병 등의 체포와 군사재판을 조직(organize)하며 북한군 및 북로당에 대한 충성을 위반한 사건의 조사도 담당했다. 무엇보다 유엔군 점령후방의 지하 간첩망 운영을 책임졌던 것이 이 부서였다.(통상 미군과 한국군 CIC는 적극정보보다는 방첩이 보다 주요한 임무였다) 만약에 저 사내가 정식의 요원이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간첩표식을 지녔을 수 있다.

    콩 : 개인별 여섯 개의 검은 콩. 간첩은 신분증명을 위한 특별한 숫자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휴대하는 콩의 개수는 부대의 병력규모를 암시하기 위해서 이용되기도 한다.

    단추 : 겉옷의 맨 윗 단추를 푸른 실로 꿰매는 것. 다섯 개의 단추와 빨간색 펜을 휴대하는 사람. 셔츠나 외투의 두 번째 단추를 빨간실로 꿰맨다. 세 번째 단추는 달지 않는다. 주머니에는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단추들 몇 개를 휴대한다.

    안경 : 안경의 각 부분들을 간첩들이 서로 나눠가지고 있으면서 만났을 때 서로 맞춰본다. 암호화된 메시지가 안경테(rim of eyeglasses) 안에 숨겨져있다. 안경의 모양이 신분확인을 위해 이용된다.

    깃발 : 왼쪽 위와 아랫변이 붉게 칠해진 삼각형이 그려진 남한의 깃발.(최근 10군단 관할지역에서 체포된 두 명의 간첩들이 이러한 확인방식을 갖고 있었음. 체포된 두 명 가운데 한명은 이 깃발을 50년 8월에 전달받았고, 나머지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표식을 51년 2월에 받았다는 것이 흥미롭다) 바지 안쪽 면에 북한 깃발을 꿰매놓은 것.

    머리 : 여성 간첩들의 경우 메시지를 머릿속에 숨기는 경우가 있다. 오른쪽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왼쪽 머리는 짧게 깍아올리는 방식.

    손 : 오른쪽 손톱의 절반쯤 붉게 칠하는 것. 새끼손가락 손톱을 길게 기르는 것.

    지폐 : 푸른색 혹은 붉은색 리본으로 감싼 일본 동전. 일본의 50원짜리 지폐의 조각은 그가 조선노동당 당원임을 가리킨다. 일본 동전은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지시하는데에 활용(1원-카빈, 5원-M1 등등) 지폐 액수는 각기 간첩들의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연필 : 빨간색 연필과 다섯 개의 단추를 휴대한 사람

    반지 : 암호화된 메시지를 반지에 은닉. 은색반지를 끼고 화투 반쪽을 휴대한 인물

    셔츠 : 두 번째 단추를 붉은 실로 꿰매는 것

    신발 : 신발 끝에 일본 동전 세 개 붙인 사람. 서양식 신발에 색깔 끈 묶은 것.

    숟가락 : 개인휴대 알루미늄 숟가락. 부러진 숟가락을 휴대한 자. 나무 숟가락을 휴대한 자.

    문신 : 손에 새긴 점, 몸에 새긴 점, 중국문자 등. 사례 : 간첩의 왼손 등에 작은 점을 문신으로 새기게 했다. 여성간첩은 왼손 손금에 작은 점을 새겼다.

    이 특징들은 한국전 당시 한국군 방첩대, 헌병, 한국의 경찰 등을 아우르며 방첩활동을 총괄지휘했던 제308 방첩지대가 개전 이후 8개월동안의 업무를 통해 집대성한 간첩표식 리스트였다. 이에 비하면 60, 70년대 중앙정보부가 배포하던 간첩표식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리스트를 들고 홍대 앞에 가보면 죄다 간첩천지일 것 같긴 하다. 아무튼…

    한데 정규의 스파이 훈련을 받은, 수적으로 보자면 그리 많지도 않은 이 엘리트 정보요원들이 한창 교전이 진행되는 지역을 누가 봐도 눈에 띄는 흰색 복장을 하고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적 후방, 그러니까 아군의 안방에 깊숙이 침투하여 기밀등급이 높은 군사첩보의 수집과 같은 정보활동이나 민심교란과 위관 및 영관급 지휘관들의 사기저하와 같은 심리작전에 동원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특히 북한군 제3부는 생포된 국군포로 가운데서도 장교들을 전향시켜 재차 국군으로 침투시키는 공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침투하는 요원들은 대개 북한군에 사로잡힐 때 입고있던 국군 복장을 하고 전선을 통과하거나 교전지역을 멀리 에둘러서 침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아직 포로로 잡힌 국군들을 전향시키고, 4주에서 8주에 이르는 스파이교육을 이수하기에는 시간도 너무 짧았다. 그러니 저 누워있는 사내를 소수정예의 정보요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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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제25 캐나다 보병여단 소속 스미스 상사가 영국군 제1사단 소속 한국인 통역관 엄송영의 도움으로 피난민 집결지에서 한국 청년을 심문하고 있다. 1951년 10월 7일.” (NARA 소장) 성조기나 미군 사단마크를 대신해서 심문관의 오른쪽 팔뚝에 찍힌 선명한 단풍문양이 상징하듯, 이 사진은 아마도 한국전쟁이 지니는 20세기판 십자군으로서의 의미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 당시 피난민에 대한 심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피난민에 섞여있을지 모르는 간첩을 색출하는 임무는 미군 산하에 배속되어 있던 방첩대(CIC)의 주요 임무였다. 뒤에 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의 완장에는 한국경찰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미군이 45년 9월 남한에 대한 군사점령을 실시한 이래 정보활동에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도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경찰이었다.

    도로 위에 쓰러져있는 저 사내에 대한 마지막 추측은 그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간첩이나 첩보와 같은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순박한 양민이었다가 느닷없이(!) 차출된 ‘요원(agent)’일 가능성이다.

    이 뭐 얼토당토 않은 억측같지만, 실상 한국전 당시 체포된 북한측 요원의 대부분은 바로 엊그제까지 농사짓던 농민들이거나, 전투를 피해 잠시 인근으로 피난갔다가 고향마을로 되돌아오던 피난민, 주거지 없이 떠돌아 다니던 고아였거나 난리통에 자식며느리들을 잃고 방랑하던 노인들, 혹은 일가족 전부인 경우도 있었다.

    위에 제시되어 있던 전문(?) 간첩들을 탐지하는 일도, 영화에 등장하는 스파이 탐지에 비해서는 그다지 폼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일용직(?) 요원’을 탐지, 검거하는 일은 CIC가 보기에는 거의 무가치했다.

    대부분 적의 간첩들이 탐지하려는 첩보는 대부분 주둔지역, 병력규모, 보급품의 분량 등에 관한 사소한 것들이다. 적의 간첩학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팀지한) 대부분의 간첩들은 이러한 학교를 수료하거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단순 정보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간첩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마구 활용한다. 농민, 지식인, 범죄자, 거지, 장애인, 어린아이, 노인, 등등. 이들은 특별한 훈련도 없이 몇 분 정도의 교양을 받은채 구두지령만 휴대한 채 전선을 넘어온다. 이렇게 넘어오는 간첩들이 섞여있는 피난민 수가 너무 많다.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휴대품을 체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적의 간첩활용 수준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적의 간첩학교를 졸업한 간첩의 경우는 거의 우리에게 체포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전문 간첩들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이같은 진술은 한국전 발발 이후 약 1년 가까이 방첩업무를 담당한 미군 CIC 11개 지대의 활동에 대한 총평의 일부인데, 한국전쟁 당시 전선과 후방에서 이뤄지던 첩보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양만 많았지 먹을 게 별로 없는 그런 만찬이랄까?

    특히 교전기간 동안 적 첩보기관이 주력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인 “전선이나 후방의 군 시설물에 대한 파괴공작은 교전 기간 1년 동안 거의 적발된 것이 없었다”고 실토할 정도로, 이 기간 방첩기관의 업무는 적의 고급스파이들을 상대로 한 스릴러가 아닌 피난민 검역활동이 대부분이었다. 대개 잘 훈련된 전문 스파이들은 CIC의 체포망을 벗어나 있었다.

    그래도 피난민 집결지에서 식별표(1차로 한국 경찰이나 헌병 유엔 민사사령부 등의 장교들이 방첩대의 정밀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러한 식별표를 목에 걸어서 방첩지대 심문소로 보낸다)를 달고 CIC의 정밀 심문을 받는 피난민들 가운데에는 간첩이나 정보원으로 분류되어 포로수용소로 보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간첩으로 낙인찍힌 자들이 대부분은, 적어도 1951년 10월경까지는, 일용직 정보원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어쩌다보니 북한의(혹은 유엔측의) 점령지역에 있다 눈에 띄어 유엔군 부대가 어디쯤 있는지, 탱크는 몇 댄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이는 군사기와 직결된 문제로 유엔측 역시 북한군 포로들을 상대로 이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등등을 알아오라고 구두로 몇 분 동안 교양시킨 다음에 전선 너머로 내려보낸 것이다. 미군 CIC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북한간첩들은 거의 대부분 전선을 넘자마자 자수(?)해버렸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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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심야에 이동하던 세 명의 한국인 ‘민간인들’이 원산 인근의 한 지점에서 해병대에게 체포되었다. 체포지점은 북한측 게릴라들과 해병대 간의 교전이 있던 지역 부근이었다. 해병대 경비병들이 이들을 한국 경찰에게 인계하기 위해 억류 중에 있는 모습이다. 이 세 명의 민간인들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아침이 오기 전에 처형될 것이다. 1950년 11월 18일.” (NARA 소장)

    대개 위험인물로 분류되는 기준은 그들의 본성이나 실제 행동보다는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좌표값으로 결정되곤 했다. 김수임을 북한간첩이거나 미군정보원 혹은 둘 다 일 수도 있다고 결론내리는 난해한 고차방정식의 셈법은 김수임이 남로당 수괴(이강국)와 남한 치안당국 실세(베어드 대령)를 상대로 갖고 있던 좌표값 때문이었다. 우연하게 게릴라의 공격지점 근처에 서성댔을지도 모를, 학생으로 보이는 가운데 자리의 소년을 포함한 저 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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