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명보다 더 중요한 것
[기고] 4자 진보정치 결집에 대하여
    2015년 09월 26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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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통합을 위한 4자 연석회의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지난 7월에 작성한 것이다. 글의 내용은 논의 테이블에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의제에 대한 필자의 견해와 이를 근거로 통합 논의보다 정의당 입당을 모양 좋게 해나가자는 것이다. 4자는 물론 강기갑, 권영길, 단병호, 천영세, 최순영 등 2004년 의원단 대부분을 망라해서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힘차게 보여주되, 동시에 그 동안 진보정당 진영이 보여줬던 분열상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자는 내용이다.

필자는 이 글을, 견해가 다를 것으로 예상되는 몇몇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줬다. 그 중 몇 분은 아직 논의도 시작되기 전에 이런 내용의 글이 발표되면 일이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고, 그 의견을 존중해서 기고하지 않았다. 최근 <레디앙> 지면에 ‘예상대로’ 관련 논쟁이 진행되고 있고, 내게 우려를 표한 쪽 인사도 글을 썼기 때문에 이제라도 글을 올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글 내용 가운데 정의당 입당 주장은 이제 무의미하게 됐기 때문에 철회한다. 다만 예상됐던 의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원고를 작성할 때나 지금이나 같다. 글 가운데 빨간 색 부분은 이번에 기고하면서 새로 덧붙인 내용이고, 나머지는 7월에 쓴 글 그대로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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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대중적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2004년 의석 10석을 확보해 여의도에 진출했다. 그들은 ‘거대한 소수’를 표방했다. 하지만 창당 15년 만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통합진보당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압축 성장과 압축 붕괴는 격심한 진통과 내파된 진보정당사를 말해준다. 민주노동당은 ‘거대한 대중’에게 실망을 안겨준 채 소수로 전락했고, 그 당 이름은 사라졌다.

함께 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이념을 가진 두 정파(PD와 NL로 불리는)의 동거는 창당 8년, 국회 진출 4년 만에 깨졌다. 이후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면서 정파별 이합집산이 진행됐다. 복잡한 정략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갈등과 진통 속에 지반을 붕괴시키는 강진이 내부에서 발생한 진보정당은 현재 복수의 진보정당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15년의 짧지만 격렬했던 역사와 경험이 빚어낸 지형이다.

통합진보당은 외압으로 해체됐지만, 그들을 뿌리째 뽑을 수는 없다. 암중모색, 와신상담 미래를 도모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당은 진보신당과 합해서 노동당이 됐지만, ‘결집파’ 당원들이 속속 빠져나옴으로써 노동당은 ‘도로 사회당’과 가깝게 됐다.(녹색당은 다른 진보정당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사회민주당이 곧 창당될 예정이다)

정의당과 노동당 탈당 그룹, 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 등은 하나의 당으로 합할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의 ‘중도 통합(?)’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통합 움직임은 대중적으로 비상한 관심사는 아니지만, 현실 정치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는 된다. 진보정당 바깥에서도 이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이다. 정의당은 의석을 가진 유일한 진보정당이고, 대중적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진행된 당 대표 선거를 통해 당 바깥의 눈길을 잡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조성주라는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왔다.

나는 이 글에서 정의당을 포함한 4개 정치조직의 통합에 대한 의견을 밝히려고 한다. 나는 4개 조직이 통합과 관련된 테이블을 만들고 거기서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과 관련해서, 강령 등 주요한 의제를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나는 정의당에 입당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당을 제외한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진보정당의 이름, 강령, 지도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선출직 공직자 배분 등이 의제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이는 충분히 이해된다. 김세균 교수는 최근 통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글을 통해 이런 주장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특히 김 교수가 기본 모순, 주요 모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 자본주의 체제’ 등 우리 사회 분석틀을 이야기하고, 개혁 자유주의, 사민주의, 사회주의 등 주체 세력과 노선을 언급하는 것을 읽으니, 내용의 적실성 여부를 떠나, 지금까지 너무 많이 틀어서 지겨운 유행가를 다시 듣는 것 같다. 지금은 고색창연한 강의가 필요할 때가 아니며, 우리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논의는 그동안 숱하게 반복돼 왔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급하게 만들어지고, 졸지에 사라진 강령이 한두 개였나? 당을 같이 하겠다고 합의한 것은 강령이든 주체든 넓은 의미에서 동의할 수 있는 공유 기반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통합 움직임은 새로운 정당의 출범이 아니라, 갈라진 세력의 복원의 의미가 크다. (일반 국민들이 볼 때는 더욱 그렇다. 대중 눈높이에 맞는 쉬운 정치를 하자) 처음 만난 사람들도 아니다.

김 교수 표현에 따르자면 ‘사회적 리버럴 세력’(이른바 참여계)이 새로운 주체로서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은 확대된 복원의 의미가 있다. 이를 확대된 복원이 아니라 ‘변질’이라고 보는 정치세력이 있는데, 그들은 통합 논의에 함께하지 않는다.

통합 논의를 위한 테이블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든, 대중적 환호와 관심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그 경로와 귀착점을 짐작하고 있으며, 실제 논의도 거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사소하고 생산성이 마이너스에 가까운 논쟁들은 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할 얘기가 있다면 해야 되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남의 당, 남의 조직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나의 당이라는 환경에서 하는 것이 좋다. 예상 의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이광호

앞줄 가운데가 필자

당명의 경우, 정의당 이름을 현재 바꿀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당의 이름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유리하다. 정당의 이름은 그 이름 아래 당원들이나 지지자들이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이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 당원들은 애정을, 대중들은 관심과 호감을 갖고 정의당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 실익 없는 작명 논의를 할 때가 아니다.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때 당명 제정을 위해 수십 개 후보 당명을 놓고 수차례 표결이 진행됐다. 당시 필자가 지지한 당명은 거의 꼴찌 득표를 했다. 사회당이었다. 정당은 지향하는 바를 당명으로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동당을 거쳐 왔지만, 마음에 드는 정당 이름은 지금도 없다. 그나마 노동당 정도가 낫다. 정의당 이름도 맘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수준 이상으로 싫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

정의당 이름을 가지고 가자는 것이 기득권(정의당이 무슨 알량한 기득권이라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에 어떤 종류의 권력이 있다면, 함께 공유하면서 그 힘을 가지고 힘 있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약소한 기초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본다. 지금 정의당 안과 밖을 나누고, 기득권 운운하는 것은 불필요한 구별이다. 조금 있으면 같이 할 당이 아닌가? 이름 때문에 같이 못한다는 것은 정의당을 포함한 어떤 주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노동정치연대에는 오랜 기간 노동운동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온, 신망이 두터운 활동가들이 많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운동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현장에서 해온 사람들이다. 나는 동지이기도 한 그들에게 보다 넓은 시야로, 보다 여유 있고 폭넓은 가슴으로 일반 대중과 함께 호흡해 줄 것을 바란다. 담대한 교섭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혜와 멀리 보는 안목을 보여줄 것을 호소한다.

당명 변경 요구가 아니라, 그 당의 새로운 주체로 자리 잡고, 정치 현장의 새로운 리더로 우뚝 서고, 당의 정책 내용을 생산해 내는 두뇌로 자리 잡는 힘과 결의와 실력을 모으는 것이 백 번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당명이 바뀐다고 무엇이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싸한 당명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강령의 경우, 정의당과 과거 민주노동당은 적잖이 다르다. 여러 가지 토론과 논쟁의 지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이 통합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필요하다면 거래가 아니라 깊이 있고 열린 논의 과정을 통해서 결정이 돼야 한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지도체제 의제는 조직 운영의 원리와 각 주체들의 ‘자리’ 문제가 얽혀 있다. 그리고 정의당의 경우 당헌 개정도 걸려 있을 것이다. 실제 논의는 주로 ‘자리’ 문제가 얘기가 많이 될 텐데, ‘자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소수다.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이 분들께 말 그대로 대의를 위해 참으시라고 얘기하고 싶다. 대중의 관심과 바람에 맞게 행동하면 대중이 보답할 것이다. 지도부가 공천권을 쥐고 있는 정당도 아니다. 이번 통합으로 함께해 정의당을 ‘강화’시킬 주요 역량들이 배치될 곳은 꼭대기가 아니라 아래 그리고 현장이 돼야 한다. 구체적인 얘기를 하기는 어렵지만, 정의당도 이 부분을 지혜롭게 풀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자리라는 것이, 거기에 앉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사들의 ‘개인’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조직의 대표이고 상징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리더십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채권자’가 될 수 있다.

시점으로 봐도, 성격으로 봐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의제 가운데 하나는 아마 ‘비례 후보’ 결정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요구’가 아닌 많은 ‘제안’이 필요하다. 선출 공직자들의 선출 방식에 대한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을 제안하고, 이것이 통합된 당의 방침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통합진보당과 관계에 대해 약간 덧붙이겠다. 김 교수는 통합진보당과 관련해 ‘같이 할 수는 있지만, 반성이 전제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결례다. 각자의 노선을 가지고 가면 된다. 또다시 한 당에 모여서 싸우는 것보다 당 대 당의 협력과 경쟁이 서로에게 좋다.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15년의 역사와 경험이 현재의 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쉽게 바꿀 수 없다. 이게 순리라면 과장일까?

나는 통합의 세 주체들이 자신들의 ‘요구’보다는 통합 정당에 대한 ‘제안’에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정의당’의 변화보다는 ‘진보정당’의 강화를 더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화에는 변화와 혁신 등이 포함된다. 계획대로라면 같은 당에서 한솥밥 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노동당에서 나온 ‘결집파’와 ‘노동정치연대’의 노동 현장 리더나 활동가들이 새로운 통합 정당에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 그래야 한다. 특히 조성주라는 젊은 리더십의 부각은 이 두 조직에 두루 포진돼 있는 연부역강한 미래의 젊은 정치인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이 기회를 극대화시킬 의무도 함께 가지고 있다. 젊은 정당, 세대가 조화되는 정당, 새정치민주연합을 대신하는 강한 야당을 만드는 데 이들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고 있다.

나는 통합 정당의 4주체들이 모여 환호도 관심도 없고, 때론 위험하기도 한 ‘거래’보다는, 즐겁고 신나는 통합 대회를 마련하는 방안을 많이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기갑, 권영길, 단병호, 천영세, 최순영 등 민주노동당 1세대들과 미래의 진보 정치인들, 노동 현장에서 진보정치를 위해 뛰어왔으나 떠나 버린 역군들이 모두, 이름은 정의당이지만 내용은 확대 복원된 새로운 진보정당 아래로 모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이런 축제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기 이전에 그 동안의 진보정당의 잘못을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진심을 다 해서 보여주기 바란다. ‘환대와 우정’ 속에 복원되고 강화된 새로운 진보정당이 탄생되기를 기대한다.

필자소개
도서출판 레디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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