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전망,
진보정당 안에서의 녹색정치②
오래된 미래, 녹색과 적색의 만남과 엇갈림
    2015년 09월 03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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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찰과 전망, 진보정당 안에서의 녹색정치-1 링크

4. 성과, 그리고 드러난 문제들

앞에서 살펴본 진보 정당 내부에서의 녹색활동과 관련 된 역사에서는 일정한 성과와 함께 많은 문제들이 보인다.

3.1. 성과들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에서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정치 영역에서 ‘녹색’은 끊임없이 호출되어 왔다. 처음 당의 강령에 선언적으로 포함되어졌던, ‘환경’과 ‘녹색’은 당 내부의 논의과정과 선거를 거치며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

청년진보당의 청년환경센터, 민주노동당 환경위원회를 시작으로, 2007년 대선 시 민주노동당 녹색정치 사업단은 당내 대통령 후보들의 녹색점수를 평가하기도 했다.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시에는 녹색의 가치가 진보정당의 전면에 서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당내 녹색정치위원회뿐만 아니라 에너지정치센터, 태양광발전소 및 초록배움터 건립으로 이어졌다.

진보신당에서는 지역의 녹색위원회도 구성되면서, 보다 자주 일상적인 차원의 모임은 물론, 북한산 케이블카 반대운동과 같은 지역의 개발 이슈에 일상적으로 연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당 내의 장애인위원회와 연대하여, 케이블카 건설의 빌미로 언급되는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하여 “모든 욕구가 권리일 수는 없다”며 쟁점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간 당 내부에서 꾸려온 무지개 연대를 위한 노력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들과 함께 녹색정치의 주체적 역량이 커지고, 필요성이 확산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녹색정치의 사회적 요구가 커지며, 2012년 녹색당의 창당 이후, 기존 진보정당들 사이에서도 향후의 방향성으로서 ‘녹색’은 끊임없이 호출되어 왔다.

3.2. 논쟁의 회피와 당 차원의 가치정립 실패

진보정당 안에서 녹색정치의 성장과 발전 과정이 있었지만, 일정 시기 이후, 기존의 진보정치 그룹 내에서의 환경/생태에 대한 인식과 실천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퇴보한 느낌마저 든다. 20년 전의 좌파들의 환경 인식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고, 선언적인 ‘녹색의 호출’과 추상적인 수준의 논쟁이 반복되는 것은, ‘녹색’의 문제를 진보정치의 영역으로 ‘화학적으로’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논쟁, 혹은 토론을 회피하면서 올바른 ‘공통의’ 가치를 정립하는 데 실패한 탓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2005년 황우석 사태에 민주노동당 내에서 생명윤리에 관심이 많은 당원들은 논의와 발언을 여론의 뭇매를 이유로 자제시킨 사례가 있다. ‘파시즘’과 ‘위안부’ 비유 논쟁의 당사자로서 책임을 지고 당직을 사임한 노현기 전 민주노동당 부평구위원회 부위원장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이 밝혀지고 난 후 또다른 기고를 통해 “침묵, 때로는 죄악이었다”(29)며, “과연 정치권과 언론이 정말로 황우석 연구에 제기되는 의혹을 모르고 있었나? 아니 그 이전 황우석 연구 과정에서 난자제공 과정의 윤리문제를 그렇게 쉽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시켜도 되는 것이었나?”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징표이다. 말(言)은 생물들 간에 종(種)을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다.”라면서도 “그러나 이제 두렵다”며 매일노동뉴스에 연재하던 <여성과 노동>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

3.3. 녹색 ‘정치’ 대신 녹색 ‘부문’만 남아

진보신당 초기 녹색의 가치를 전면에 내걸고 다양한 활동들을 시작했음에도, 부문위원회라는 형태의 한계와 중앙당의 부문위원회에 대한 철학 부재로 많은 부침을 겪고 논란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녹색특위 간사직 폐지 시 중앙당의 “부문/과제별 위원회 건설 원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과 녹색정치위를 인준할 경우 다른 부문위도 도미노처럼 인준할 수밖에 없다는, 그리하여 당 조직과 예산이 방만해질 수 있다”는 발언은 말 그대로 녹색정치의 영역을 다양한 가치를 병렬식으로 늘어 놓은 것 중 하나로만 사고함으로써, 이미 활기를 띠기 시작한 녹색 정치의 싹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다. 또한, 녹색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문에 대해 당원들 ‘개인’의 요구와 관심사를 알아서 해소할수 있는 장으로 여길 뿐, 당의 정책과 정치적 방향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는 사고하지 않음으로서 ‘예산낭비와 방만함의 애물단지’로 인식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진보신당에서의 토론의 부재와 ‘하고 싶은 사람이 해라’는 ‘부문’에 대한 무책임한 인식은 과거 민주노동당의 “‘적녹정치’에 대한 푸대접”과 “선거 때 잠시 구호로 쓰이는”(30)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부문운동 자체의 위상 하락과 함께 녹색의 가치 역시 실질적으로 당 ‘정치’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2010년 지방선거를 전후로, 당의 이름을 걸고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녹색 활동들보다는 4대강 반대투쟁 등 외부 연대투쟁에 참여하는 형태의 활동들이 주를 이뤘다. 2010년 중앙당의 “당원이 실천하면 4대강을 살릴 수 있습니다! 당원 실천 사항 (제안)”(31)에 대해 한 당원은 “청소년이 주축인 4대강 카페 행동방침”인 줄 알았다며, 당이기 때문에 “청소년성, 아마튜어성 행동방침 나열”만으로 98%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이러니 싸움 성과를 날로 민주당에 갖다 바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3.4. 선언적 ‘녹색’의 남발

진보정당 내에서의 녹색정치의 여정 속에서 치열한 논쟁의 회피와 부문운동으로의 전락이라는 현실과는 달리, ‘녹색’의 호출은 더욱 잦아졌지만 모두 선언적인 수준에 그쳤다. 본인 역시 녹사연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현우 전 녹색위원장은 이 과정에 대해 “결정적으로 진보신당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녹사연은 녹색사회주의 노선을 단지 참칭만 하다가 2013년 재창당을 거치며 사실상 폐기했다”고 평가하며, “다만, 녹색사회주의를 선택할 때에도 버릴 때에도, 붉은 장미를 선택할 때에도 버릴 때에도 어떤 심각한 논쟁이 없었다는 것 역시 적어둔다.”고 정리하고 있다.(32)

물론 이러한 과정은 진보정치 전반의 쇠락과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다. 녹색을 호출한 녹사연 등의 집단이 진보정치 쇠락을 타개하는 방향성으로 ‘녹색’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호출을 단지 선언적인 차원에서의 녹색의 남용, 남발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녹색 ‘정치’의 영역은 녹색을 선언하는 주체의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 차원의 실질적인 이념으로 만드는 과정과 당의 정책으로 가공해 내는 실천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33) 물론 이러한 구체화, 전면화 과정의 실패 역시 진보정치의 전반적인 쇠퇴라는 맥락과 분리해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녹색정치 성찰과 전망

4. 녹색정치의 전면화를 향한 전망

진보정당 내에서의 녹색 운동들이 녹색 ‘정치’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보정당들 안에서 녹색은 부문의 문제로 축소되거나 중심의 가치로 삼아야한다고 선언되기만 했을 뿐, 당 차원에서 전면적이고 적극적으로 채택되어 각 사회영역의 문제들에 대한 판단 근거로 작동하거나, 구체화된 정책을 제안하거나,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과거의 환경-생태 운동이 가진 실질적 한계 및 오해와 함께, 여러 차례 선언되었던 진보적인 녹색정치에 대한 논의가 추상적 수준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제안할 수 있는 전망 역시 그다지 높은 구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그 간의 생태주의가 진보정치 안에서 오해되거나 명확히 배제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정리하고, 녹색의 문제를 세대간/세대내 평등의 문제로 바라보는 틀을 다시 한 번 제안함으로서, 녹색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걸친 가치 체계로 수용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전면에 내 걸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 회귀주의가 아닌 생태적인 미래시대로의 전환 -반회귀주의/반봉건주의

새로운 녹색정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새로운 상태의 미래상을 제시해야 한다. 산업화 이전의 시대에 대한 낭만주의나 향수를 바탕으로 한 생태주의는 과거의 시대가 기대고 있는 봉건사회의 문제를 간과하고 여성주의나 LGBT운동, 다양한 형태의 가족, 반권위주의 운동 등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명백한 ‘진보’의 가치로 인정하기에 주저함이 있어왔다.

전근대적인 사회가 모두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사회였던 것은 아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관건은 그 시대의 인구, 소비수준, 기술 등이 그 지역 혹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생태계라는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는가 아닌가이다. 과거의 많은 사회는 적은 인구, 낮은 소비 수준과 기술로 인해 그 한계 안에서 유지되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봉건주의적인 시대상 자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지혜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기술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닌 사회의 모습에 맞는 ‘적정기술’에 대한 고민과 함께 새로운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 시스템의 한계 인식을 통한 능동적인 전환 -세대간 분배정의

환경의 문제가 지속가능성, 혹은 지탱가능성(34)의 문제로 인식되며 미래세대를 고려한 세대 간 평등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끝나거나 허울 좋은 수사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시스템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핵폐기물 문제는 현재 사회에서 발생한 수용한계의 초과용량을 미래로 떠넘기는 문제로, 난개발 문제는 현재의 사용한계의 초과 용량을 미래로부터 빼앗아 오는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국립공원 케이블카 문제도 장애인 보행권의 문제와 충돌하는 것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안을 세대 간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장애인, 노약자들이 산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이 되더라도, 그 수단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장애인, 노약자들-뿐 아니라 사실 그들 이외의 누구도-이 온전한 산을 즐길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세대 간 분배정의에 위배된다.

이렇듯 시스템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과거와 같이 환경문제를 인간과 자연의 대립으로 바라봄으로서 규제와 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시스템의 한계를 정량화 하려는 시도들은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지수 등 형태로 정량화하려는 노력들이 있는데, 이러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생태적인 적자’를 내 다른 지역, 혹은 미래세대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회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다.

■ 녹색과 경제의 대립이 아닌 ‘다른’ 경제로의 전환 -반자본주의 녹색노동정치

앞에서 제시한 시스템의 한계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지금까지 ‘성장의 한계’라는 이름으로 제안되어 온 내용이기도 하다.(35) 성장의 한계는 경제가 더 성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감을 바탕으로 정치 영역에서 외면되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어느 수준에 근접하면 이후부터는 소득이 얼마나 늘어나든지 삶의 질이 더 이상 높아지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장의 한계’를 생태사회주의에서는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적 양적 성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의 양적 성장을 곧 발전으로 규정한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기업의 이윤을 위해 경제성 자체가 허구로 꾸며진 경우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을 국민 모두가 알고 있어도, 콩고물에 대한 기대, 혹은 국익과 대기업의 이익 동일시하는 인식 때문에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다. 심지어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 사업도 때를 기다렸다가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 노동자 모두 착취 혹은 수탈당하고 노동은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녹색정치는 반자본주의적인 녹색-노동 정치가 되어야 한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는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치를 잃어버리고 평가 절하된 노동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당장은 관련 직종의 노동운동과 상충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노조의 이익집단화나 우경화를 막고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생태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한 다른 경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발전과 노동 모두 새로운 기준을 통해 생태적으로 재정향(再定向: reorientation)할 필요가 있으며, 실제 철거노동자가 도시환경운동의 주체가 된 사례도 존재한다.(36)

프랑스의 좌파 생태주의자 고르츠(Andr Gorz)는 1978년에 발표한 「에콜로지스트 선언(37)」에서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향후 어떠한 체제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이끌어낼 수는 없으며, ‘생태파시즘’과 ‘생태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가능한 길 가운데 자신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성장한계론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결단’의 소신(이범(1995a) 재인용)”이라고 밝혔다. 물론 녹색 ‘정치’에서 이러한 전환을 ‘개인’의 윤리적 결단의 영역으로 내 몰아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미끼로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분열과 싸움을 조장하는 일은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진보적인 녹색정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녹색-경제의 대립항 구도 자체를 허물고 ‘다른’ 경제로의 전환을 주도해야 한다.

■ 지역 자립과 다원적 가치 체계로의 전환 -세대내 분배정의

앞의 이야기들이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면서, 환경정의의 입장에서 또한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간적 차원에서의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국가 대 국가, 국가 내에서의 지역과 지역, 지역 내에서의 지구와 지구) 분배 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야기한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담을 미래세대로 떠넘기는 문제인 만큼, 다른 국가/지역/지구로 떠넘기는 환경제국주의 현상이 어디에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계를 파악하는 기본 시스템 단위로서 특성에 맞는 다층적인 위계를 가진 공간 단위를 설정하고, 그 안의 자립과 자치를 지향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이미 생태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물 관리의 기본 단위인 유역 단위의 위계를 설정하고, 대유역별 유역 관리청 설치 및 소유역별 (수질오염원) 총량관리 등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정책, 지역 경제 등에서도 마찬가지의 접근이 필요하다. 핵심적인 산지나 마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단위는 어느 규모가 적정한지, 혹은, 정 반대 방향의 접근으로, 에너지 측면에서 어떠한 방식의 도시 시스템이 바람직한지 고민이 필요하다.

진보정치 영역에서 흔히 ‘지역’은 ‘하방’의 공간이나 중앙정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반정립되어 왔다. 여기서는 ‘지역’을 ‘인간 생태계’의 기본 단위 중 하나로 사고하기를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자립 역시 기반이 되는 자연 시스템과 여기에 적응해 온 지역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여러 지역의 고유성이 모여 ‘다양성’을 이루는 사회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적이려면 개발과 지역의 현안을 정치적인 도약대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지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오랜 시간 함께 고민하고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제안한 네 가지 전환은 그 간에 ‘녹색’의 가치가 받아왔던 오해들로 인해 정치의 영역에서 구체화되지 못했던 활동들이 녹색 ‘정치’가 되기 위한 방향성이다. 이러한 방향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흐름으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지역순환경제’ 혹은 ‘지역경제 선순환 구조’의 구축이며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로컬푸드 등의 형태로 실험되고 있다. 과거 공동체의 장점을 가져오되 회귀적이지 않고, 지역 경제 자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시스템의 한계를 넘지 않으며, 노동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지역의 자립을 꾀한다는 원칙을 잘 지킨다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제는 다른 다양한 진보적인 가치들과의 충돌,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난, 옛날로 돌아가자는 회귀주의라는 오해, 개인을 비난하는 윤리주의에 기반한 운동에 대한 반발감을 넘어, 생태적으로 바람직한 사회상과 그 새로운 사회의 산업구조 및 이행 전략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좌파’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는 ‘생태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5. 녹색 ‘정치’로의 전환을 위하여

녹색정치라는 거대한 주제를 놓고,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의 다사다난한 진보 정당사 내에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글은 결국 졸작이 된 것 같다. 그래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문제제기가 있어왔고 그에 따른 일정한 성과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영역으로서의 확장은 아직 충분치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는 것이다.

2016년 총선을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현 시점에서, 이 나라의 상황은 과거의 어느 때 보다 여러 가지 위기를 겪고 있다. 녹색정치의 입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생태사회로의 전환은커녕, 환경 정책은 끝도 없이 역행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수십년 동안 이어져 온 하천법의 발전 과정을 역행하는 ‘친수구역 특별법’을 제정하고 활용한 경험은 이제 ‘산지관광 특구법’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와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추진 등 국립공원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달 확정된 제7차 전력 수급기본계획은 신규핵발전소 4기 건설을 목표 발표했고, 한수원은 이 목표를 무리없이 달성하고자 의료봉사를 통해 영덕 지역주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 기울이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과거의 정치의 실패 혹은 부재로부터 기인한다. 과거의 환경 운동, 녹색 활동의 반복된 실패는 개발 세력들에게 ‘한 번 삽을 뜬 사업은 강행할 수 있으며, ‘먹튀’ 후에도 별 뒷탈 없이 더 큰 먹잇감을 찾아 나설 수 있음’을 학습시켰다. 이러한 학습이 가능했던 것은 대규모 개발사업에서 이익은 소수가 챙기고, 그 뒷감당은 국민 전체와 미래세대가 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누군가 큰 이익을 얻을 때, 그 언저리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실패를 극복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제는 자기만족적인 운동을 넘어 시스템의 변화를 만들어 내야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과거 진보정당 내에서의 녹색 운동의 흐름처럼 한편으로는 제한된 논의 안에서 ‘부문’운동으로만 사고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선언적인 차원에서 호명되는 차원에 그치는 과오를 넘어서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한계를 뛰어 넘어 현실적인 진보적 녹색 정치의 시기로 전환하기 위하여, 반회귀적이며 반봉건적인 녹색정치, 반자본주의적인 녹색-노동 정치라는 반정립적인 지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녹색의 문제를 세대간 분배정의와 세대내 분배정의의 틀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러한 틀 역시 여전히 충분히 구체적이지 못하며, 많은 한계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발제문이 그 간의 쉽지 않은 진보 정당의 역사 속에서 녹색 운동 영역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어, 그 한계를 극복하고 ‘녹색 정치’로 나아가려는 논쟁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면, 발제자의 소기의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 된 것일 테다.

또한, 부디 이러한 논쟁이 더욱 발전되어 지금까지의 어려운 진보정치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려는 진보결집 더하기의 길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의미있는 좌표가 되기를 바란다.<끝>

<참고>

(29) 관련기사: 매일노동뉴스, 황우석 사태의 끝에… 말(言)과 침묵

(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988)

(30) 노동당 게시판: Re: 적-녹정치를 무시했던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전철을 되밟지 말아야

(www.laborparty.kr/bd_member/463852)

(31) 노동당 게시판: 당원이 실천하면 4대강을 살릴수 있습니다! 당원 실천 사항 (제안)

(www.laborparty.kr/bd_member/701408)

(32) 노동당 게시판: 녹색사회당이라는 잊혀진 그리고 버려진 꿈에 대하여

(www.laborparty.kr/bd_member/1603036)

(33) 사실 진정성이나 생태적 감수성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다. 노동당 2013년 당대표선거 당시 나도원 후보의 공약 중 ‘마지막 “약속” ⑦ 녹색좌파의 곧은길과 신작로에 동행하자!(www.laborparty.kr/bd_member/1458346)’에서 ‘녹색좌파’의 길을 ‘곧은 길’과 ‘신작로’로 비유한 것을 보고 생태적 감수성의 빈곤을 느낀 것은 단지 필자가 과민한 탓일까?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34) 흔히 ‘지속가능한 발전(SD: Sustainable Development)’으로 불리는 개념의 풀네임은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SSD: Environmentally Sound & 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이렇게 줄여 부름으로서 발생한 가장 큰 오해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발전’ 그 자체가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sustainable’을 ‘지속가능한’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환경이) 지탱가능한’ 발전으로 번역해야한다는 주장도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35) 다만 자연 시스템을 다 담아 낼 수 없는 경제학의 용어를 생태학의 용어로 대체했을 뿐이다.

(36)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건설노동자, 세계최초 ‘도시환경운동’ 주도하다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7200)

(37) 조홍섭 편역, 1984,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 한길사

<참고문헌>

김현우, 2009, 당 정치활동의 방향과 부문위원회의 위상에 대하여, 부문위원회 토론회 “이제는 말할 수 있나?” 발제문.

문재현, 2004, 민주노동당과 녹색정치, 청년환경센터 주관 토론회 “녹색정치 얼마나 진전되었나?” 발제문.

심재옥, 2009, 당의 부문위원회 운영 어떻게 할 것인가?, 부문위원회 토론회 “이제는 말할 수 있나?” 발제문.

이범, 1995a, 생태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성균 56호 66-75.

이범, 1995b, 좌파의 눈으로 환경위기를 보자, 학회평론 10호 42-66.

이헌석, 2009, 탈핵에너지 정보센터 구성을 위한 질문들, energyjustice.kr.

최광은, 2004, 녹색좌파(Green Left)를 꿈꾼다, 청년환경센터 주관 토론회 “녹색정치 얼마나 진전되었나?” 발제문.

한재각, 2003, 녹색정치에 관한 짧은 의견 -과학기술운동 활동가의 시각에서, 제1회 녹색정치포럼 “한국 녹색정치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가칭)녹색정치준비모임 결정을 제안한다” 의견문.

[Web sites]

노동당(구 진보신당) 게시판 www.laborparty.kr

삶이 보이는 창 게시판 www.samchang.or.kr

에너지정의행동(구 청년환경센터) 게시판 www.energyjustice.kr

정의당 진보정의연구소 www.justicei.or.kr

진보신당 녹색평당원모임 카페 cafe.daum.net/greenjinbo

진보신당 녹색위원회 카페 cafe.daum.net/newjinbogreen

필자소개
((주)국토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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