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문: '권력'의 문과 '국민'의 문
    [말글 칼럼] 경찰조차도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누구
        2012년 07월 03일 05: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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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두 개의 문’이 연일 매진을 이어간다니 무척 반갑습니다. 이런저런 비평이 오르내리는 것도 좋고요. 며칠 전에는 평점 1점짜리들이 천 개 가까이 올라 평점을 다 갉아먹었다는 기사도 보이더군요. 이 조차도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의 반영이라 봅니다.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만, 전 ‘이미 열린 문’, 곧 ‘경찰 또는 권력의 문’과 ‘아직 열리지 않은 문’, 곧 ‘국민 또는 인간의 문’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대사 때문입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찰 말고 국민 말이죠.”(변호사)
    “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전 대한민국 경찰이고 경찰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고…”(제1제대장)

    특공대 제대장은 변호사가 뭘 묻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변호사가 좀 잘못 물은 듯도 싶군요. “경찰 말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으면 더 이해하기가 편했을 것도 같습니다.

    이성의 사회적 사용과 개인적 사용

    변호사와 제대장 사이에 오간 대화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란 글에서 이성의 공적(사회적) 사용과 사적(개인적) 사용을 구별합니다.

    가령 군인으로서 근무 중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그 명령의 부당성을 연구하여 발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의견입니다. 이것이 ‘이성의 사회적 사용’에 해당하는 거지요.

    용산 참사 현장에서 깨진 창문으로 내다보는 철거민

    일전에 현역 장교가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경우라면 그는 당연히 무죄입니다. 근무 중이지도 않았고 특정 명령을 어긴 것도 아니지요. 그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발언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런 일로 재판까지 끌고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거꾸로 회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일 겁니다.

    ‘두 개의 문’에 나오는 제대장은 경찰로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크레인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왔든 말든, 부하 경찰들의 생명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든 없든, 농성장 안에 어떤 위험 물질이 있는지조차 알든 모르든 시키는 건 무조건 하는 것이 경찰의 당연한 의무라 보는 거지요.

    특공대 제1제대장이라는 사람은 ‘국민’과 ‘경찰’을 전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가 ‘경찰’이기 이전에 ‘국민’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경찰’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경찰’이나 ‘군인’은 무조건 명령에 따르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 명령이 같은 사람을 죽이는 건지 살리는 건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고로 ‘사람’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줄 압니다.

    ‘경찰’로서는 그에게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또는 ‘사람’으로서 그는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이 사람임을 망각한 죄, 경찰복으로 자신의 사람을 덮어버린 죄, 경찰에 파묻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양심의 판단을 포기한 죄,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사람을 해친 죄.

    이 죄책감은 그의 일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지요. 하여 그 역시 희생자입니다.

    남은 하나의 문을 열어야 할 때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이들 경찰들을 단지 경찰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그 누군가에게 있습니다. 시종 무전기를 타고 흐르는 그 ‘보이지 않는 목소리’ 말이죠.

    때마침 경찰청장 임명을 받은 김석기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직접 무전기로 명령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됐든 그 목소리는 김석기의 뜻을 전달하는 사슬 같은 것이란 말이죠.

    그는 그의 임명권자에게 그가 든든한 방패임을, 때에 따라서는 날선 창일 수도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칸트가 경계했던 ‘이성의 개인적 사용’입니다.

    ‘이성의 개인적 사용’이란 그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내곡동 사저를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인민에게 어떤 권리가 주어지는지, 자유주의의 창시자인 로크의 말을 한 번 들어 볼까요?

    “인민의 재산을 빼앗거나 파괴하고자 기도할 경우 또는 인민을 자의적 권력 하에 놓인 노예로 만들고자 할 경우, 그들은 스스로를 인민과의 전쟁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며, 인민은 그로 인해 더 이상의 복종 의무에서 면제되며, 무력과 폭력에 대비하여 ……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존 로크, ≪통치론≫)

    저들이 연 것은 ‘경찰’의 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사적 권력’의 문이었습니다. 비단 이명박 정권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문 하나가 남았습니다. ‘국민’의 문, ‘사람’의 문 말이죠.

    “누가 군주나 입법부가 그들의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것인가? 나는 인민이 재판관이라고 답변하겠다. 수탁자 또는 대리인이 그에게 맡겨진 신탁에 따라 잘 처신하고 있는지는 대리를 위임한 사람, 곧 위임하였기 때문에 그가 신탁에 반해 행동하면 그를 해임할 권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판단하겠는가? … 만약 법률이 침묵하고 있거나 모호한 사안 그러나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사안을 놓고 군주와 일부 인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러한 사례의 경우 적절한 심판관은 전체로서의 인민이라고 생각한다.”(존 로크, 같은 책.)

     그렇습니다. 이제 진정한 심판관이 나설 때입니다. 스스로 권력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저들이 열지 못한 바로 그 문을 열어야할 때입니다. ‘두 개의 문’은 그 남은 문고리를 우리 손에 쥐어준 셈입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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