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의용단(RSS),
    현대 인도 수구 난동세력의 모태
    [인도 수구보수파들의 생얼-2] 폭력이 그들의 신앙
        2014년 06월 30일 04: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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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선생은 레디앙에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를 이미 연재한 바 있다. 주로 인도 진보세력 혹은 좌파들의 역사와 경험들을 중심으로 다뤘다. 인도는 선거가 치러지는 국가 중에서 세계 최대 인구의 나라이다. 이번에는 인도의 우파들, ‘수구보수파들의 난동사’를 중심으로 연재글을 다시 시작한다. 이번 인도 연재 시즌2에는 이광수 선생과 함께 한형식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이 함께 글을 주신다. 필자들의 사정이 있어서 연재 시즌2의 첫 글을 올리고 상당 기간이 지났다. 죄송한 마음이다.  오늘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가 시작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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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수구보수파들의 생얼-1 링크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은 단연 1992년 12월 6일이다.

    1947년 국가 건설 이후 한 번도 권력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야당의 보수세력 가운데 극우 힌두 종교공동체주의자들이 북인도 아요디야(Ayodhya)에 있는 무갈제국의 시조 바부르가 세운 모스크를 망치, 도끼, 쇠파이프 등으로 완전히 파괴해서 잿더미로 만든 날이다.

    그들은 인도 내 무슬림을 같은 민족이 아닌 침략자의 후손인 적으로 규정하고 처단하여 순식간에 500명이 넘는 무슬림이 학살을 당했다.

    이후 과격파 무슬림은 힌두 대중을 적으로 규정하고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테러는 다시 학살을 낳고 학살 뒤엔 또 다시 테러가 일어나고 하면서 인도는 이후 20년 넘게 학살과 테러의 광기가 순환 반복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학살과 테러의 악순환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는 동안 그들은 꿈에 그리던 권력을 처음으로 쥐었다.

    이 비극의 시작, ‘아요디야 사태’를 기획하고 저지른 집단이 민족의용단(RSS. Rashtiya Swayamsevak Sangh)이다. 민족의용단은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식민 지배를 한 지 150년 정도가 지난 1925년,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우파 민족주의 단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인도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종교 감정을 조장해 힌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로 나누어 이간질시켰다. 그 후 10년 넘게 진행되는 동안 힌두 민족 감정은 고취되고, 그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갈수록 커져갔다.

    급기야 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이 되어 갈 무렵 무슬림 공격과 테러에 앞장섰고 결국 1948년 화합을 주장하면서 분단 반대를 외친 간디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네루 정부에 의해 바로 활동 금지령을 받았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복권되고 차츰 세력을 결집하여 지금은 인도 국내외에 3만 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명실상부한 인도 최대 최고의 극우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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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용단의 집회 모습

    인도 극우파의 성장 배경

    민족의용단이 세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인도-파키스탄 분단 시 발생한 거대한 재해에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파키스탄 쪽에서 건너 온 힌두에 대해서만 인도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이지 반대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파키스탄 분단은, 1947년 8월을 전후로 한 몇 개월 사이에 1,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새로 만들어진 국민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이동시킨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다.

    인도로 내려온 난민들은 살육의 아비규환 속에서 부모형제를 잃거나 고향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자연히 무슬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사무칠 수밖에 없었고, 평생 파키스탄은 불구대천의 원수의 나라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도착한 낯선 땅, 물 선 곳에서 그들을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민지를 갓 벗어난 상태에 놓인 인도 정부는 그들을 챙길만한 여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고, 아직도 가난에 찌들어 있던 국민들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들던 상황이었다. 이 때 나선 사람들이 민족의용단이었다.

    민족의용단은 우선 난민촌에서 구호와 의료 지원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난민들을 돌보는 일은 민족의용단만 한 게 아니었고, 기독교 선교사들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사들은 난민 보호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도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분단 과정에서 종교와 개종을 둘러싸고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힌두 난민들에게 기독교 선교사의 호의는 심금을 울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들을 같은 민족인 힌두 품 안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만 열중하는 민족의용단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난민들은 서서히 ‘우리’ 민족은 ‘인도’ 민족이 아니고, ‘힌두’ 민족이고, 파키스탄과 무슬림은 원수라는 민족의용단의 사고 프레임에 동조하게 되었다. 결국 세는 이념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불리는 것이다.

    난민들을 임시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아직 기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전국적으로 상당한 조직을 갖춘 민족의용단에게 난민 정착의 일을 맡기다시피 하였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해 간 이주민들과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의 집과 재산 현황을 조사하여 그 규모가 서로 비슷한 것을 골라 배분해주는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그 집행을 맡은 민족의용단의 입김은 매우 세졌고, 난민들은 그들에게 기대어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이념과는 관계없이 민족의용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로소 보수 집단의 본질인 권력과의 유착 그리고 부패 위에서 군림과 세 확보라는 메커니즘의 싹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을 근본주의자와 극단세력으로 변해시키는 과정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해 왔다 할지라도 그들이 민족의용단이 가지고 있던 힌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피난을 온 동기는 민족의용단이 크게 홍보하였던 것처럼 힌두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들은 힌두와 무슬림 간의 종교공동체 폭력 사태를 잠깐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여 민족의용단에 가입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반(反)무슬림주의자도 힌두 근본주의자도 아니었고, 다만 뻔잡의 소산인 민족의용단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네루 정부의 세속주의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난민들은 점차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며 극우 힌두 민족주의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난민 캠프에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폭력 충돌과 난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난동을 주도하고 조직한 세력은 바로 민족의용단이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난동을 부인하면서 자작극을 비롯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난동을 사주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낮에는 인도주의요 밤에는 테러 집단이었다.

    민족의용단은 마하뜨마 간디 암살 후 1948년 2월 조직의 대표들이 대거 체포되고, 조직 전체는 활동이 금지되었다. 조직 입장에서는 더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를 걷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민족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간디를 암살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국민의 비난을 받았고 종교공동체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무슬림에 대한 저항자로서 보이지 않는 지지를 받았고, 이미 더욱 굳어진 힌두라는 동류 의식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넓은 동정심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곳곳에서 무슬림과의 종교공동체 분쟁이 빈발하고 이윽고 카시미르 분쟁이 발발하면서 파키스탄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고 그 속에서 힌두 민족주의는 쉽게 성장하였다.

    분단 후 인도의 정치 문화는 네루(Jawaharlal Nehru)가 이끄는 의회 연방제와 세속주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분단과 그로 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도처에서 겪은 인도인들은 더 이상 민족 분규 혹은 공동체 갈등이 심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네루가 수립한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 중심의 정책이 새로이 건설된 국가의 통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종교, 카스트, 계층, 지역, 언어 등을 초월하는 국민 단합의 정치가 뿌리내리면서 정치 행위자 간 협력과 합의의 정치 문화가 널리 조성되었다.

    하지만 민족의용단과 같은 계열의 정치 조직인 국민단(國民團 Jana Sangh. 현재 제1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전신)은 이러한 근대성 국가 운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힌두 쇼비니즘적 정치에만 과도하게 의존하였고, 그 결과 의회 민주주의 체제의 정책 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의용단을 비롯한 힌두 민족주의 정치는 자연스럽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족의용단은 지치지 않고 수구 이데올로기 확산에 열중하였다. 집권 여당에 속해 있는 자신들과 비슷한 민족 우파 계열의 정치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그 인사들은 민족의용단이 폭력적이고 종교 공동체 갈등에 너무 의존하는 데 동의하지 못해서 그들과 한 배를 타지는 않고 네루와 함께 하는 것일뿐, 본래 그 뿌리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 농촌 각지로 들어가 자신들의 민족 우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교육하고, 봉사하면서, 조직을 재건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 압력은 먹혀들어가 정부가 활동 금지를 해제하고자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에 그들은 앞으로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국가를 전복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결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철저한 거짓이었다. 순수한 정치적 언술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수구 세력의 철저한 거짓 언술은 국민들에게 쉽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국민은 그들을 용서하였고, 그러면서 그들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 안에 폭력이 배태된 것은 두 말 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폭력은 그들의 신앙이요 전술의 핵이기 때문이다.

    수구 정치세력에게 ‘양심’이나 ‘신의’와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잡는데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지를 계산할 뿐. 결과가 중요할 뿐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거짓이다.

    ‘거짓의 일상성’이라는 것

    한국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당시 숱한 거짓말을 하였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숱한 거짓말을 하였다. 그것은 박근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양자의 거짓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촛불집회 때 본인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을 부르면 반성을 했다며 국민을 세 치 혀로 속였고, 4대강은 운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며 또 다시 국민을 속였다. 제 스스로 선거를 앞 둔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할 게 뭐 있겠냐는 말을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박근혜 씨는 이와 경우가 다르다. 그는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을 거의 대부분 파기했고, 국정원 부정선거에 대해 적극적으로 국민을 속이고, 거짓 종북 프레임을 설정해 국민을 속였다. 그 압권은 그가 2014년 1월 한국의 대통령으로 인도에 가서 마하뜨마 간디 추념비에 적혀 있는 7대 사회악에 관한 글에 대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라는 술회를 읊었다는 사실이다.

    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지만, 박근혜씨의 경우 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간디의 말씀대로 가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명박이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장사치라면, 박근혜씨는 거짓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는 수구 세력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라 말한 것에 빗댄다면, 난 박근혜를 ‘거짓의 일상성’이라 말하고자 한다. 난, 어떤 행동이 죄인 줄 알고도 죄를 저지른 자보다 그것이 죄 인줄 모르고 죄를 저지른 자의 죄가 더 무겁다는 말에 동의한다. 수구 세력은 그들의 행동이 죄가 되는 줄 모르고 저지르고 다니는 자다. 그래서 그들이 무섭고, 그들의 행동이 소름끼치는 것이다.

    민족의용단은 얼핏 보면 한국의 분단 과정에서 활동한 우익 단체 서북청년단과 닮았다.

    이념 근본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 우선 같다. 인도의 경우 힌두교라는 종교가 한국의 경우는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기반이 되었지만 결국 반공주의나 힌두주의나 똑같이 이데올로기의 한 방편이라는 점을 본다면 둘은 결국 이데올로기가 낳은 일란성 쌍생아다.

    분단의 시기에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강제 피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라 할 만하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모두 인도주의적 구호와 테러 난동을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매우 다르다. 우선 인도의 민족의용단은 반영 민족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지만 서북청년단은 그러한 역사성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민족의용단은 여당에 줄을 대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했으나 서북청년단은 처음부터 친일파와 이승만 독재 정권에 줄을 댐으로써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민족의용단이 독립 후 40년 정도가 지난 후에 폭력과 테러를 행하는 난동을 주도하면서 새로이 정권을 창출하는 전위대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서북청년단은 한 때의 테러 집단으로만 있다가 사라져버렸다.

    인도의 수구 세력은 이론적 틀이라도 갖추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나마도 없다. 역사적 자부심이나 이론적 틀 없는 양아치 세력이 그것들을 갖춘 수구 난동 세력보다 덜 위험한 것은 분명하지만, 수준 안 되는 양아치 세력이 국가를 농단하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은 분명히 있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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