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문>,
    한 방울의 눈물도 등장하지 않는 다큐
    [영화잡론] 사건 실체 향해 직격탄 날리는 심정
    By 문석
        2012년 06월 25일 10:2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미 많은 이들이 봤을 것이고 볼 것이다. 그리고 꼭 봐야할 것이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말이다.

    무엇보다 <두 개의 문>은 잘 만든 다큐멘터리다. 내적인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파급력도 대단한 수작임에 틀림없다.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스릴러영화를 보는 듯한 흥미를 자아내면서도 결국에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까지 이끌어낸다.

    당연하게도 이미 수많은 리뷰가 나왔고 칭찬이 나왔으며 인터뷰가 실렸고 논쟁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해 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 영화가 그만큼 이 시대에서 중요한 정신을 담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2009년 1월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그리는 <두 개의 문>은 매우 특이한 독립 다큐멘터리다. 우리가 흔히 독립 다큐멘터리라 부를 때 짐작 가능한 요소들, 그러니까 어떤 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이의 목소리라든가 그것에 대한 특정한 관점에 의거한 해석,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비롯되는 파토스의 세계가 이 영화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영화는 매우 차갑고 냉정하다.

    일체의 감정적인 영역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이 영화는 그날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만 몰두한다(이 다큐에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와 재판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라는 자막은 이 영화의 전략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두 개의 문>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빚어진 비극인 용산참사를 다루기 위해 경찰 쪽의 자료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이 전략이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문>은 딱 하나의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그리고 한 달음에 달려가는 영화다.

    그 질문이란 ‘2009년 1월20일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이다. 다시 말해 ‘그날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지루하면서도 일방적이었던 공판 끝에 내려진 ‘사법적 진실’이 아닌 ‘실체적 진실’을 찾으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는 말이다. 유추해보건대, 그 ‘진실’을 찾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고, 그 ‘사실’의 상당 부분은 경찰 쪽에서만 갖고 있으니 ‘원재료’를 그렇게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날의 비극으로 사망했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칼라TV’와 ‘사자후TV’가 먼 거리에서 촬영한 동영상 뿐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재료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가공하느냐였을 텐데 <두 개의 문>은 정공법을 선택했다. 변호인단에게 주어진 경찰 조서와 경찰의 채증 동영상, 그리고 재판 기록을 꼼꼼하게 엮어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진압 당시의 동영상 위에는 당시 경찰들이 주고 받았던 무전 내용이 생생하게 얹혀져 있고 경찰 채증 동영상에는 그들이 내뱉는 소리까지 담겨 있으며 이 사건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증인인 경찰 특공대원들이 주고 받은 문답도 그대로 들려준다.

    일반적인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였다면 당연히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을 장면- 이를테면 철거민 농성자들이 골프공과 화염병을 투척하는 모습까지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경찰과 다른 입장의 진술자들의 증언을 넣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 농성자들을 변호했던 김형태 변호사나 용산대책위 관계자들의 증언은 특정한 관점이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동원됐다기 보다는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내기 위한 필수 구성요소처럼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회피하는 재연 기법까지 동원한다.

    이 다양한 방법론은 앞서 말했듯 ‘2009년 1월20일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두 개의 문>이 뛰어난 점은 그것에 대한 답을 직접 발설하고 주장하기 보다 보는 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내릴 수 있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 모두 알고 있듯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이례적으로 대규모 인력의 검찰이 투입돼 수사가 진행됐고 철거민 27명이 기소된 반면 경찰은 한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3천쪽에 달하는 검찰의 경찰 진술조서가 공개되지 않아 변호인단이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리고 당시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제기한 국민참여재판마저 거부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생생한 재판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제작진이 <두 개의 문>을 용산참사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이날의 비극은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는.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책임 소재는 명백해진다. 그건 남일당 옥상 건물에 망루가 만들어지고 있는 와중 진압이 결정됐다는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에서, 망루 구조도 모르고 철거민들이 시너 같은 인화물질을 가진 줄도 몰랐다는 경찰특공대장의 진술에서, 진압용 크레인이 한대 밖에 오지 않았는데도 진압을 강행하겠다는 경찰 간부의 무전 내용에서, 화염병이 쏟아지는데도 경찰 병력을 내던지는 경찰 채증 동영상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떤 직원은 비명을 지르며 불에 뒹굴기도 하였지만 화염에 휩싸인 직원들이 많아 소화기로 간신히 진화는 하였지만 유독가스와 화염에 싸여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은 생지옥과 비교될 정도였습니다”라는 한 경찰 특공대원을 진술서를 보고 나면 묻고 싶어진다. 과연 철거민과 경찰관을 그 생지옥으로 내몬 자는 누구인가, 라고.

    이 영화가 흥미로운 또 하나는 국가권력의 실체가 목소리가 드러난다는 점

    우선, 남일당 진압 당시 경찰 무전 내용이 생생하게 들려오는데 간부로 추정되는 자의 목소리는 권위적이면서 단순하다. 현장에서의 상황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만 내리는 그 목소리에 상황이 위험하니 작전을 유보하자는 건의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법정에서 들려오는 검사의 목소리는 더 험악하다. 경찰을 상대로 유도성의 심문을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진압을 망설였다는 경찰 특공대원에게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특공대로서 그런 위험한 상황을 빨리 제압해서 공공의 안전을 되찾는 것이 본인의 임무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것이죠? 그 상황에서 이제 위험하니까 퇴각해야겠다는 생각을 증인이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증인은 해서도 안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훈계하는 검사의 목소리는 권력 그 자체다(물론 그 말에서 검찰 전체의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이 드러난다).

    “피고인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박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행위를 해서 결국 공무집행 중이던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하고 많은 경찰관을 다치게 하는 등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를 했다. 따라서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이러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판결문을 심드렁하게 읽는 판사의 목소리에서도 국가권력의 어두운 포스는 드러난다. 그 목소리는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지만 결국 분노하게 만든다.

    이처럼 <두 개의 문>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지형도 안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 데는 만든 이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김일란, 홍지유 감독은 성적소수문화모임 ‘연분홍치마’(pinks.tistory.com) 소속의 활동가들이다. 그동안 이들은 <마마상> <3x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종로의 기적>처럼 페미니즘과 동성애를 옹호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거대담론의 사회운동에서 비롯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주류와는 약간 다른 성향의 작가들이라 그런지 관점도 달랐던 것 같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말단 경찰도 소수자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홍지유씨는 “처음엔 추모제 밖에 할 수 없는 답답함이 힘들었다. 피켓 하나 들고 광화문을 걷는 것조차 불허하는 상황에서 슬픔 말고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다른 돌파구가 뭘까 고민했다”(<씨네21> 858호)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한 바 있다.

    혼자 상상해보건대, 이들은 처음에는 갑갑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찰 관련 자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절망했을 것이다.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한 영화도 생각했겠지만 그보다는 사건의 실체라는 심장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리는 쪽이 맞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주어진 자료들을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려고 하다보니 결국 이 영화까지 다다른 것이 아닐까. <두 개의 문>의 진정한 성과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건 단단한 마음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ps. 지난번 원고에서 예고했던 칸영화제의 역사에 대한 글은 기회가 닿을 때 쓰겠습니다.

     

    필자소개
    중앙일보 기자로 있다고 영화가 좋아서 씨네21로 이직하여 현재 씨네21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