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지 동지의 명복을 빌며
        2014년 03월 18일 03: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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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노동당 박은지 부대표와 가까이에서 가장 오랜 기간 함께 활동했던 사람의 하나인 강상구 전 노동당 부대표에게 추도의 글을 부탁했다. 장례를 치르면서 강 부대표의 몸이 많이 아팠던 탓에 추도 글이 좀 늦었다. 그가 간 지 열흘 가량이 지났다.  그럼에도 기억해야 함을 기억하기 위해 추도의 글을 늦게나마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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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대표님이 oo식당으로 이동 중이십니다. 그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지금은 날짜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제가 진보신당 대변인을 시작한 날 아침 박은지 동지와의 첫 통화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아침 시간에 여의도에 오랜만에 나가는 거라 시간을 잘못 맞췄던 저는 진보신당-민주노동당 대표단 아침 회동에 민주노동당 대변인과 함께 유일한 배석자였는데 잘못하면 늦을 처지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택시를 갈아타면서 촌각을 다투던 때 박은지 동지는 다시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변인 오시기 전에는 시작하지 않을 거니까요, 너무 늦지 않게만 오십시오.”

    예의 그 똑 부러지는 말투,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대변인의 급한 마음을 달래는 배려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사람 참 괜찮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박은지 동지의 이런 태도는 대변인실에서 같이 일을 하는 내내 계속됐습니다. 대변인실 업무는 굉장히 스트레스가 많은 일입니다. 그 날의 현안을 9시 이전에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각 사건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정리 해 놓고 있어야 합니다.

    기자가 언제 어느 때 무엇을 물을지 모르기 때문에 사전에 당의 입장을 잘 설명할 적절한 비유 같은 것도 하나씩은 만들어 놔야 합니다. 어쩌다가 기자의 질문에 답할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큽니다.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저 개인적으로는 진보신당 대변인 시절에 일의 부담이 가장 적었습니다. 박은지 국장과 지금은 정의당에 있는 임한솔 부장의 호흡은 정말 대단해서, 막 일을 시작한 대변인은 그냥 그들이 시키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됐습니다.

    대신 박은지 동지는 낮이건 밤이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현안에 대해 논의했는데, 덕분에 저는 화장실에서도, 아이와 놀던 놀이터에서도, 차를 운전하다가도 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변인은 기자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게 중요합니다.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아서 술을 못 마시는 저는 그게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그 시기에 박은지 동지는 저 대신 기자들이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습니다. 술 몇 잔에 어지러워하는 저까지 챙기느라 다른 대변인들과 일할 때보다 고생이 컸습니다.

    “중요한 전화인 것처럼 그대로 전화기 들고 잠깐 밖으로 나오세요.”

    기자와의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가면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던 박은지 동지한테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박은지 동지는 술집 문 앞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저에게 쥐어 줬습니다. 저는 무슨 007 작전 하듯이 그걸 마시고, 다시 술자리로 되돌아가곤 했었습니다. 술자리 때 마다 도합 3-4개씩의 숙취해소 음료를 들이부어 가면서 버티던 그 시절에 박은지 동지는 대변인실의 기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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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지 부대표의 사회장 모습(사진=노동당)

    박은지 동지는, 후배들한테는 좀 무서운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후배에게 걸레를 던지면서 청와대 앞 투쟁을 요구했던 얘기는 우리 사이에서는 유명합니다. 후배들이 좀 느슨해졌다면서 다 모아 놓고 민중가요 ‘각성가’를 부르게 했다는 에피소드는 제 10년쯤 후배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대학 4학년 때는 등록금 투쟁을 하다가 삭발을 했는데, 후배 3명이 “은지 누나가 하는데……”라면서 자신들도 삭발을 하고 나타났었다는 얘기를 어느 술자리에서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무서운 선배처럼 행세하더니,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선배였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변인실 있을 때에도 후배들과 전화통화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었습니다. 2012년 총선 진보신당 비례후보로 나갈 때는 잠깐 사이에 기탁금을 훨씬 넘는 돈을 모아, 사람 잘 챙겨온 활동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박은지 동지는 좀 옛날 운동권 같았습니다. ‘조직’을 중요시하고, ‘조직적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저한테 늘 “당 대변인이 그러고 다니면 안 된다.”고 강조하며 태도, 옷 스타일 같은 걸 지적했던 것도, 후배들을 잘 챙기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박은지 동지가 무슨 사이보그처럼 일만 하는 사람이었냐면 그런 건 아닙니다. 가수 존박이 그렇게 멋있다더니 한 동안 자기 컴퓨터 바탕 화면에 존박 사진을 깔아 놓고 싱글벙글 했습니다. 어느 날은 존박이 영등포의 한 백화점에 오는데 국회에서 가까우니 거길 좀 다녀오면 안 되느냐고 안절부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박은지 동지는 그래도 일과 육아 그 두 가지를 해내느라 그저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남들이 한 번쯤 해봤을 경험, 그러니까 비행기 타기 같은 걸 한 번도 안했다면서 언제 제주도라도 한번 꼭 가서 그 한을 풀어야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저에게 “이제 웬만한 당 간부들 글투는 다 흉내 낼 수 있게 됐다.”면서 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를 듯한 말을 했었습니다. 당시 박은지 언론국장은 자기 글 보다 남의 글을 더 많이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글을 써댔으면 이제 저런 얘기까지 할까 싶었습니다.

    아이 키우는 문제는 언제나 박은지 동지와 저와의 핵심 이슈였습니다. 사무실에서건 술자리에서건 이야기가 길어지면 그건 모두 아이 키우는 얘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아에 대한 입장을 두고 중국집에서 큰 소리로 막 싸웠던 일도 있습니다.

    박은지 동지는 금강산 여행에서 만난 북측 안내원들이 “공화국 체육인 같다.”고 평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늘 봐왔던 그대로 철저하고, 당당하고, 씩씩했으며 동시에 좀 실없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집과 사무실 양쪽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언론업무를 너무 오래했으니 그만 두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박은지 동지는 “저는 한번 시작하면 5년은 해요.” 라고 했었습니다. 진보신당에 처음 들어올 때 대변인실 업무는 생각지도 못했고, 연대투쟁이나 기획이나 교육사업을 꿈꾸어 놓고서도 그는 언론국장, 부대변인, 대변인을 그냥 조용히 해냈습니다. 그만 책임져도 되지 않겠느냐고 여러 번 말했었는데, 그 때 마다 박은지 동지의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점점 대변인실 업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줄어들어서 걱정이예요.” “기자 네트워크가 제일 중요한데 그걸 인계 받을 사람이 없어요.” “젊은 활동가 한 명 키워놓고 대변인실을 그만둬야 할 텐데…” “사람이 없으니까 일단은 제가 계속 대변인실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가 했던 말들입니다.

    “선배 세대는 그래도 뭔가를 했지만 우린 안 그래. 늘 선배들의 그늘에 가렸던 세대야. 이제 우리도 뭘 좀 해봐야지.”

    박은지가 얘기하는 선배세대란 굳이 말하자면 ‘강경대 세대’입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마지막 기운을 먹고 자라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만들어 질 때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며 30대 젊은 시절을 진보정당의 한 주축으로서 보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동시에 진보정당의 분열 과정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래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쇠락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은지 동지는 이런 ‘선배’들을 그래도 나름의 족적을 새기며 무언가를 했던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자기 세대들은 그 선배들 뒤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 세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박은지 동지 같은 젊은 활동가들이 우리를 밟고 일어서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박은지 동지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모란공원에 다녀온 후 부대표의 포부를 출사표를 통해 밝히고, 부대표에 당선되자 가장 먼저 모란공원을 찾았었던 박은지 동지는 부대표 활동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바로 그 모란공원에 묻혔습니다. 선배를 뛰어넘는 건 아마도 진보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통해 가능했을 텐데, 그는 그 문턱에서 그만 멈췄습니다.

    1년 동안 그는 진보신당 부대표로서, 출사표에 썼던 것처럼 ‘꿈을 공유하기에,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동분서주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존박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됐고, 당 부대표 일로 제주도에 내려가느라 한 번도 못 타봤던 비행기도 탔습니다. 무능한 선배들을 넘어서기 위해 한 때는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고, 대변인은 드디어 그만 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치기까지 훌륭히 자기 역할을 해낸 학부모였습니다. 대신 그는 줄어든 활동비에 모아 둔 돈도 거의 다 까먹어 아이의 스마트폰 앱 결제에 눈물을 흘리는 엄마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숙취를 견디지 못해 술 먹고 쓰러지는 일이 잦았으며,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잃은 장례식에서, 그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기자들은 눈물을 많이 보였습니다.

    10분쯤 있다 가겠다던 시사인 천관율 기자는 7시간쯤 있었는데, 몇 시간 만에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기자가 별 건 아니지만…진보정당 내에 그 정도 기자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CBS 조은정 기자는, 앞으로는 노동당 기사 많이 쓰겠다면서 미안해했고, 세계일보 김예진 기자는 제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힘들 땐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박은지 동지가 당원 가입을 권유했던 한겨레 박태우 기자는 조중동의 선정적인 보도에 분개했습니다. 늘 우리 방에 와서 담배도 피우고, 이러저런 상의도 많이 했던 경향신문 박홍두 기자의 눈물 흘리는 얼굴은 처음 봤습니다.

    작년 박은지 동지 생일 날 “부대찌개 한 번 모시겠소.”라면서 페이스북에 축하 글을 달았던 CBS 반태경 피디는 아주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서울신문 장형우 기자는 마지막 날 영결식장에서 함께 울었습니다. 유태영 기자는 당사 앞에서 있었던 노제에도 나와 주었습니다. 운구차량이 사라질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진보정당과 항상 함께 했던 진보매체 기자들은 일일이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없는 진보운동의 동지들입니다.)

    또 많은 분들이 모란 공원에 함께 와주셨습니다. 여러 동지들이 추모사를 해주셨고, 그의 영전에 국화 꽃 한 송이를 놓았습니다. 후배들은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각성가’를 불렀습니다.

    문득 만약에 당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속절없이 작아지는 당의 힘과 역할은 곳곳에서 확인이 됐고, 언론 노출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변화들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대표단 회의는 당연히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주말을 거치면서 확인되는 가장 큰 이슈에 대해 대변인이 주로 준비한 당 대표의 모두 발언으로 시작 됐었습니다. 이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정당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당세의 축소와 함께 대표단 회의에서 당 대표의 모두 발언이 점차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대표단 회의가 점점 오후에 열리기 시작했고, 박은지 동지가 부대표를 하던 시절에 와서는 월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박은지 동지는 무엇보다도 언론과 점점 멀어지는 이런 류의 변화들에 가장 민감했을 터입니다.

    당은 활동가들을 하나하나 챙길 여력조차도 없었습니다. 2008년 진보신당 시절에는 중앙당 활동가들과 당 간부들이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방문하여 1:1 상담도 진행했었습니다.

    이제 당에서는 그런 걸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죽어라 일하는 활동가들에게는 늦은 저녁 시간 술 한잔하는 게 유일한 위로입니다. 누굴 탓할 일이 아니라 그저 상황이 그렇게 돼버렸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당이 정세에 긴밀하게 반응하며 살아 움직였다면, 혹시 당이 활동가 개개인을 위해 상담을 진행했다면 아니, 당 활동가들이 술 한 잔의 위로가 아니라 보다 진지하고 혹은 심각하게 우울증에 걸린 동지를 보살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자신 있어 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한 우리 활동가들은, 알고 보니까 숱한 세월 동안 일만 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자기 옆의 동지들을 챙길 줄 모르는 가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때늦은 후회이고, 비겁한 자기변명입니다.

    2013년 2월 2일, 부대표로 당선된 다음날 박은지 동지는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를 언급하면서, “가진 게 많아 너무 잃을 게 많은 자들과,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이들이 싸우면, 좀 고되고 힘들더라도 잃을 게 없는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잃으면 더는 싸울 수 없게 되고 더는 이길 수도 없게 되는데, 박은지 동지가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이었던 어머니와, 같은 공장에서 만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가난 따위에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랐던 씩씩한 아이, 고등학교 3년 내내 야간 자습이 끝나는 11시에 늘 자기를 데리러 온 아버지와의 애틋함이 각별했던 소녀,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잠자는 것도 아까워하던 청년, 기간제 교사에 학원 선생님으로 억척스럽게 돈을 벌고, 그 보다 더 애를 써가며 아이를 키웠던 엄마, 진보정당의 입으로서 쉬지 않고 일했던 빛나는 활동가 박은지.

    이제 더는 그의 씩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박은지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 며칠째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쓴 글이어서 언급한 내용 가운데 사실 관계가 일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필자소개
    노동당 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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