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자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
    포스트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매도....공정한 비판 아니다
        2014년 02월 17일 02: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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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박노자 선생을 아주 존경한다. 서양인으로서 동양사에 대해 가진 놀라운 식견도 존경스럽지만, 그의 정치적 급진성과 대담함 역시 존경의 대상이다. 박노자의 급진성은 특히 이석기 내란음모 국면에서 빛을 발한다. 좌와 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석기 악마화에 동조하고 있을 때 이 흐름에 제동을 걸며 다른 해석을 시도한 사람이 소위 ‘명망 있는’ 논객들 중 딱 셋이 있었는데, 그것은 홍세화, 장정일 그리고 박노자였다.

    2.

    그럼에도 박노자 선생의 최근 몇몇 행보에 대해 나는 비판적 코멘트를 하려고 한다. 특히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글(관련 글 링크),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그가 시도하는 “소련”의 복권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것이다. 마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소련이 붕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90년대에 이런 글들이 발표되었더라면 좌파의 진취적 자세와 관련하여 그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도 과연 그러한가?

    3.

    리오타르나 보를리야르는 더 이상 거의 읽히지 않고, 심지어 들뢰즈와 가타리도 유행이 끝난 지 오래이며(물론 데리다와 푸코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그 자리를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가라타니 고진, 주디스 버틀러 등이 채우고 있는 이 시점에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시의적절한가라는 물음은 논외로 치자.

    나는 특정한 이론적 조류를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치부하는 이론적 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은 프랑스발 새로운 이론들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던 정설 맑스주의자들이 범한 대표적인 오류였다. 그런데 이러한 ‘낙인찍는’ 태도는 흡사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추종자들이 보여주었던 무자비한 태도와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지배계급의 질서에 저항하던 사람들까지 싸잡아 ‘반동의 주구들’로 칭하며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이러한 낙인찍기와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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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변증법이 여전히 비판적 사유의 무기라고 생각하며 맑스주의의 현재적 가치를 되물어야 한다고 믿는 나는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비판의 출발은 내재적이어야 한다. 해당 담론의 논리를 쫓아가면서 그 논리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지배계급에게 기여할 뿐이라는 논조는 이론적으로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시종일관 좌파였던 가타리나 네그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들뢰즈는 죽기 직전 <맑스의 위대함>라는 저작을 구상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데리다는 소련 붕괴 직후 <맑스의 유령들>이라는 저작을 발표하며 새로이 맑스로의 복귀를 선언한다(이 책은 이론적으로도 걸작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상조류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사상가들(본인들은 스스로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길 거부했으며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은 오히려 소련이 붕괴하고 모두가 맑스의 곁을 떠나려 할 때 맑스와의 친화성을 고백한다.

    68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쏟아져나온 이 사상조류는 분명 맑스주의나 고전적 좌파이론체계와 거리를 두지만, 그러나 근대적 사회체제를 넘어서려고 했던 ‘변혁적’ 이론이었다. 이점에서 이 사상가들은 그들을 추종하며 친신자유주의적 자세(파편화 예찬, 분리주의적 태도와 연대의 거부, 비소수자 적대시, 거대담론과 체제변혁에 대한 거부)를 취한 사람들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노자의 비판에는 이러한 최소한의 구분도 없다. 그저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칭해지는 하나의 대상 전체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자세는 이론에 대한 공정한 비판이 아니라 왜곡이다.

    스탈린이 헤겔을 ‘프로이센의 국가이데올로그’로 규정하며 배격한 것이 오류였다는 것이 (알튀세르 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비스탈린 맑스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듯이, 특정한 이론이 낳는 다양한 효과를 추상하고 그것이 하나의 특정한 계급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왜곡에 기반한 비판이다.

    5.

    소련을 다시 좌파의 담론에 복귀시키려는 그의 시도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소련이 끌어들인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수사에도 불구하고(박노자 선생이 옹호하는 인민주의 내지는 제3세계 민족해방을 포함하여),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지배체제였으며 이 숨막히는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비자본주의적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서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박노자 선생이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그가 가진 정치적 급진성은 지나가버린 사상적 라이벌에 대한 갑작스런 적대적 자세나 이미 몰락해버린 어떤 사회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맑스주의 (또는 변혁적 이론)의 “급진적 재구성”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베를린 훔볼트 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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