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주의 담론,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
        2014년 01월 23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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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시대나 구쏘련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배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아주 위협적이며 묵직한 이미지드를 떠올립니다.

    국기 게양,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애국가, 박근혜 공주님이 집필하셨다는 “애국적인 저술”들, “구국여성봉사단”…아니면 곳곳에서 걸친 당 구호들이 적힌 현수막들과 커다란 레닌 동상,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와 대학에서의 “黨史” 수업…

    그런데 사실, 일부 정치장교나 대중적인 전위정당이 아닌, 돈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면, 지배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묵직하고 위압적이지만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엘리트주의적 (박정희)나 민중 본위적 (구쏘련) 버전의 발전국가와 달리,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꼭 단수가 아닌 복수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된 정치적 행위자인 국가가 단수인 발전국가와, 여러 대자본들이 경쟁하면서 단합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기본구도 사이의 차이도 작용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진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아마도 19세기말의 사회진화론일 것입니다. 약육강식, 우승열패, 物競天擇… 문제는, 인종주의 등과 하도 관계 깊은 “고전적” 사회진화론을 이미 히틀러가 써먹은 관계로, 그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채택하는 순간 신자유주의의 “속내”는 바로 당장에 폭로됩니다.

    이데올로기의 본래 기능은 지배정치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그 반민중성 등을 가려주는 것인 만큼, 노골적인 사회진화론의 채택은 더이상 불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훨씬 더 교묘하고 복합적인 이데올로기 공작을 진행합니다.

    불교에서 “방편”이라는 표현은 있죠. 설법을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서, 설법의 내용과 형식을 적절히 맞추어주고 바꾸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가장 근기가 미성숙된 우파새 (속인)들에게 같으면 <아함>류나 염불은 맞고, 조금 더 추상적 사고가 발전된 사람들 같으면 차라리 <화엄경>은 좋고… 이런 식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도 “방편”과 같은 방식으로, 각계각층의 특성에 맞추어서 “맞춤형”으로 생산, 유포됩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각국의 특징도 참고되죠.

    예컨대 역사적으로 종교가 국민 아이덴티티 역할을 해온 나라(예: 폴란드)나 “시민성”의 불가결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된 나라(예: 미국) 같으면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하층 그리고 가난해지는 중산층 일부를 상대로 해서 근본주의적 종교의 공세가 열립니다.

    근대 그 자체를 못마땅히 여기는 근본주의자들은 성별 등과 연결된 일부 근대적 기제들 (낙태부터 동성애 허용까지)을 문제 삼아 마구 공격하지만, 자본가의 이윤을 문제 삼지 않고 체질적으로 골수 반동적이니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주 제격입니다.

    문제는, “가난해지는 평민들을 종교로 공략하라”는 처방은, 꼭 모든 나라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이죠. 예컨대 러시아는 공산당 시절에 철저히 무신론화됐으며,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기독교 (개신교)의 영향력은 실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적당히 섞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삼으면 됩니다.

    러시아 같으면 “푸틴과 가즈프롬은 러시아를 다시 대국으로 만든다!”부터 “자유가 없던 공산당 시절보다 재산축적의 자유부터 출국의 자유까지 있는 지금은 훨 낫다!”까지, 한국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는 국민대표기업”부터 “아무리 우리 대한민국은 모자라도 북한이나 중국보다 낫잖아요?”까지죠.

    문제는, 고등산업사회에서 많아진 “인문교양대중”, 즉 상당 수준의 인문적 교양을 지니는 고학력자들입니다. 그들은 무신론자일 가능성이 크며, 지나치게 동물적인 “삼성 사랑”이나 “북조선 멸시”에 어떤 체질적인 반감을 느낄 가능성도 큽니다. 아무리 인문학을 배우다보면 감수성이 예리해지잖아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가 주는 맞춤형 선물은? 맞습니다. 바로 각종의 “포스트” 담론들입니다. 그 담론들의 주된 특정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집단에서 개인으로. 역시에서는 아직도 그 어떤 해방투쟁도 “개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적은 없습니다. 혁명 등은 물론이거니와, 예컨대 톨스토이주의자들의 병역거부 활동 등도 비록 소규모긴 하지만 단체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그만큼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체”에 중점을 두는 “포스트”는 철저히 개별적입니다. 일면으로는 발전국가 시대의 지나친 집합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정반대입니다. 개개인이 원자화되는 순간, 그 어떤 해방도 불가늘해집니다.

    2.

    구조적 이해에서 “몽땅그려 얼버무림”으로. 해방은, 기존 사회 모순의 어떤 체계적, 구조적 파악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에서는 구조적 이해 (“거대서사”) 그 자체는 “만악의 근원”으로 선포됩니다.

    “포스트” 입장에서 본다면 예컨대 미국 공산당을 철저히 탄압한 1940년대말-1950년대초 미국 국가와 그 탄압 대상인 공산당은 서로 그다지 차이 없는, 똑같은 “근대의 한계”에 걸려 있는 대상으로 파악됩니다.

    일면으로 그 “근대성의 비판”은 국가/자본에 대한 비판적 접근으로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싸잡아서 체제도 반체제적 움짐임도 똑같이 비난할 적에 득을 보는 것은 체제입니다. 무슨 비판을 해봐야 국가와 자본은 그대로 남지만, 반체제적 움직임들이야말로 이와 같은 냉소적 거부에 가장 크게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3.

    현실에서 언어의 바다로. “포스트”의 중심은 “담론”에 있습니다. “진보성”을 내세우는 일부 “포스트” 종사자들은, 예컨대 한국 국내의 “가부장적 담론”들을 해체시키면 한국의 그 질기고 질긴 남성우월주의 등이 스스로 풀 꺾일 것을 기대하는 모양입니다.

    글쎄, 서울대나 고대의 세미나실에서 무슨 “담론”을 누가 어떻게 “해체”시켜도, 한국 자본이 요청한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의 군경들은 계속해서 한국 자본이 초과착취하는 여공들의 데모를 상대로 실탄사격할 것입니다. “담론 해체”는 자본을 이길 수 없으며, 훨씬 더 현실적이며 조직적 수단, 그리고 훨씬 더 현실 중심의 인식부터 필요합니다.

    4.

    각종 마이너리티를 내세우는 전략. 진보성을 가장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는 무엇보다 “마니어리티의 소리”임을 강조합니다. 여성, 종족적 소수자, 성소수자 등등입니다.

    물론 기존의 사회주의/노동운동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많이 괄시되고, 많은 경우에는 노골적 종족/남성 쇼미니즘이 판쳤다는 부분부터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컨대 여성들의 해방투쟁은 그 자체로서 아무리 중요해도, 과연 전체적인 자본주의 철폐 없이는 여성해방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삼성전자의 여공들은 백혈병으로 기업으로부터의 살인을 당할 때에는, 이는 물론 여성/저학력자에 대한 차별대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본이 노리는 초과이윤의 문제입니다.

    양쪽의 문제인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여성/이주자 등의 투쟁은 전체적인 반자본 투쟁의 유기적 일부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성이나 非소수자 등을 마치 “적”처럼 만드는 “포스트” 담론들은 그런 투쟁을 차라리 이간질, 방해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종합적 위기(2008년부터 현재까지)와 함께 “포스트”도 자연스럽게 침몰해가고 있습니다. 단,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포스트”가 어떻게 해서 약 20년 동안 (국내의 경우) 일부 지식계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었는가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포스트”가 남긴 부정적 유산을 제대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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