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정 어무이의 신내림
    [이기순의 생애 이야기-2] 여동생 업고 학교 다니다 관둬
        2014년 02월 13일 0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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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순의 생애 이야기-1 링크

    어무이가 원래 신기가 많다가, 막내동상 벤 채로 결국 신이 나렸어. 그 전에 어무이가 먼지 모르게 자꾸 아픈 거여. 온갖 약을 다 써도 안낫고, 자기도 모르게 예언을 해쌌고. 그러니 사람들이 신병이라고 신을 받아야 낫는다고 그러는 거여.

    그 때도 신 나린 사람을 을매나 이상허게 생각혔는지 몰러. 시악시같은 우리 아부지가, 엄니 신내리는 거를 좋아할 리가 읎제. 그려도 결국 별수읎이 신을 받았어. 우리 집이서 내림굿을 혀서 나두 봤제.

    어릴 때 생각으루는, 완전히 정신 나가서 미친 사람 마냥 그럈제, 뛰고 날고 울고 엎어지고. 귀경 온 사람들 중에 누가 남의 장독간에 가서 장 찍어 먹은 거까정 알려내는 거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네, 세간 나간 살림살이꺼정 다 말을 혀고. 작두도 탔어. 아부지 장사 나갔을 때 혔어.

    난중에 아부지가 알고 남부끄럽다고, 이제 바깥도 못나가겠다고 함서 두 냥반 쌈이 시작된 거여. 그르케 자꾸 쌈이 되니, 낭중엔 그걸 띤다구 엄니 아부지가 전부터 다니던 왕개봉절을 갔어.

    스님 붙잡고 이야기를 허니, 스님이 기도를 하라더래. 그려서 둘이 기도를 하는데, 어무이가 말문이 또 터진 거여. 예언도 하고 영판 모르는 남들 지난 일들도 영락읎이 맞추고. 그니께 그 스님이 ‘안되겄다’고 ‘보살님은 이걸 해야지 안하면 되례 인간 다리를 놓겄다.’(사람이 죽어나가겠다고)고 그러드랴. 그랑게 헐수읎이 그냥 나려왔어.

    그러고는 집 근처에 법당을 차려놓구, 다른 보살 하나를 두고 일을 다녔어. 굿도 하고 점도 봐주고 신 일을 허는 거제. 어딜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항께, 아부지는 속이 상혀서 난리지 머여~. 막내 낳고 첨에는 데꾸 나가기도 혀드만, 갓난쟁이를 달고 남 신 일 다니는 게 여엉 못할 일이고 보기도 머하제. 그러니 그 갓난 거를 집에 놓고도 다니는 거여. 내가 보리쌀 씻은 물에 사까린 섞어서 막내동상을 멕여 키웠어.

    아무리 점잖은 아부지라도, 그 꼴을 그냥 참지를 못허는 거제. 그래 자꾸 쌈이 되고, 아부지 무서서 어무이는 제대로 나가지를 못 허고. 동네서는 무당집이라고 손가락질도 혔제. 매달 초하루 보름으로 떡을 안 허면 막내 동상이 그르~케 울어대는 거여. 그게 신의 조화지. 떡을 하면 안 울어, 이노무 지지배가. 내가 도구통에 쌀을 빻서 허얀허게 백설기 떡을 혔어.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도 불 때서 떡을 앉히면, 그 어린 게 울음을 딱 끄치는 거여. 안하면 아그도 아그지만 엄니도 난리를 칭게, 난 안할 수가 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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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을 하는 법당 모습

    신문기자 하나가 죽을 병이 걸려서, 온갖 비싼 약을 다해도 못 낫다가는, 어무이 병굿을 받고 싹 나슨 거여. 그르니 그 기자가 어무이를 신문에 내겄다고 ‘하자고 하자고’ 혔는디, 아부지가 딱 못허게 혔어, 어디 세상에 방낼 일이 있느냐고. 한동안은 신을 누르고 일을 안허다시피 혔어. 그르니 풍파가 많이 나고, 재산도 줄고 그런 거여. 그러니 또 아부지 몰래 나가기도 혀고. 아부지가 장사를 주로 다니니께 틈이 많은 거제. 어무이는 그 이후로는 장사 가는 걸 차츰 줄였어. 큰돈은 못 벌어도, 그 신 일로 돈이 좀 되고 그렸지.

    6.25 사변 / 핵교 제대로 못 다닌 게 평생의 한

    6.25 사변은 내가 대여섯살이었는디, 그려도 기억이 좀 나. 아부지는 군인으루 붙들려 갔구, 큰아부지는 으뜨케 또 빼돌려서 집에는 읎었제. 큰어무니네랑 할무이는 피난을 안가겄댜. 어무이랑 셋이서 피난을 갔어. 시살백이는 엄니가 업구, 나는 보따리 하날 들구 엄니 손잡구 뛰구 걷구 한 거여. 동네 뒤 쩌~ 멀리 산에 있는 굴로 간다더라구.

    근디 가다 말고 어무이가, ‘죽어두 한테 죽는다.’며 집으로 도루 왔어. 그 난리루 우리나 큰집이나 큰 피해는 읎었어. 논바닥이니 산길에 사람들이 죽었는 거를 많이 봤제. 폭격이랑 총쏘는 거두 많이 봤구. 처녀들이나 젊은 아짐들을 미군들이 거시기를 현다고, 숨기구 그렸어. 남자들은 군대 끌려가구 여자들은 거시기현다고 숨구 피난가구, 노인네랑 아그들이나 집에 있고 그렸지. 할무이든 큰애기든 아짐들이든 여자들은 모다, 얼굴에 흑칠을 하고, 머리도 일부러 헝크리든가 남자처럼 빡빡 깎기도 하고 그렸어. 사변 끝나고 좀 있다 아부지가 군인 옷을 입구 돌아오셨어.

    사일구나 오일륙은 그런 거는, 서울서 난리가 났다고 말은 들은 거 같은디 잘 몰러. 그게 육십년 이짝저짝이야? 그럼 난 깨구리 잡아다 돼야지 키우구, 미뚜기 볶아다 팔구 할 때네. 깡촌에서 동네만 있는 색시가 그런 귀경을 할 수가 없지. 난 대전 나와본거두 시집갈 때나 돼서여. 거기다, 그 전에는 내가 기억도 많았는데, 시방은 다 잊어뿌렀어. 아그들 낳구 남편헌티 밤나 뚜들겨 맞음서 사느라구 무섭구 불안허구 항게, 심장병이 생겨서는 늘 약을 먹었제. 그 약을 오래 먹고 또 중간에 한번 씨러져서 죽었다 깨나고 항께, 기억이 많이 읎어지구 바보가 된 거여.

    내 호적이 늦은 거는 이유가 있어. 나 낳고서 바로 아부지가 길에서 구장을 만났길래, 나를 호적에 올려 달라고 말을 혔었댜. 그라구는 올렸으려니 혔는디, 구장이 깜빡 해버린 거여. 그것두 밑에 남동상 낳고 갸를 호적에 올릴려고 가서 봉게, 내 호적이 읎드라는 거여.

    그르니 세 살 칭하 나는 오누이를 쌍둥이루 올릴 수는 읎을 거 아녀?~ 그려서 나는 실지보다 세 살을 줄여서 그 날짜로 올리구, 동상은 그 다음 해에 호적을 넣은 거여, 갸도 한 살을 줄인 거제. 그르니 내가 본 나이로 열한 살에 먼저 핵교를 가고, 걔는 그 다음해에 통지서가 나온 거여.

    근디 어무이가 동상들 키우라고 뚝허면 핵교를 못 가게 하는 거여. 어무이는 다른 동생들헌테는 안그렸는데, 나헌티는 참 모질게 혔어. 어려서 어무이가 하두 내 머리끄댕이를 잡고 난리를 쳐서 뿌리가 다 빠졌어. 오죽하면 커서 ‘내 머리가 어무이 밥이여?‘ 그 소리까지 했당게. 신 나리기 전에도 그렸지만, 신 나리고 나서는 더 모질게 혔제. 아부지랑 쌈나도 아부지헌테는 못 헝게, 나한티다 화풀이를 허고.

    어무이 아부지가 소핵교 입학은 시켰지만, 뚝하면 핵교를 못가게 혔어. 산꼭대기를 넘어 한 오리 정도를 걸어야 핵교가 있어. 츰에는 공부 욕심이 많응게, 어느 때는 아그를 업고 핵교로 몰래 도망을 가는 거여. 내 밑으로 아들 둘에 그 밑으로 여동상이 생겨서는, 갸를 업고 핵교를 가는 겨. 바로 밑에 남동상은 핵교를 잘 보냈제.

    나는 입학할 때 말고는 책도 못 사서 읎고, 공부를 할려구 앉아도 늘 업은 아그가 울고 하니께 앉았을 수가 있어? 반 애들도 머라구들 놀리고. 나 말고는 그런 애는 읎었제. 나 하나였어. 선상님도 애가 울면 나가서 재워오라 그러고. 져우 달래고 재우고 해서 책상에 와 앉으면, 또 깨서 울고. 그 작은 의자에 꼬그리고 앉았으니 등에 업힌 아가 잠자리가 편혔겄어? 그러다봉께 나도 자연히 핵교가 취미가 읎어지지. 그르니 집안 일 많으면 안가고, 어쩌다 한번 씩만 가고, 동상 핵교 가면서는 샘이 나서 쫓아갔다가, 또 아그가 울고불고 항게 챙피허고, 배운 거를 못따라강께 흥이 떨어지구….

    한번은 선상님이 ‘너는 진학을 못하고 한 번 더 이학년을 배워야 겄는데 어쩌냐?’고 묻드라구. 챙피하잔여, 안그래도 나이가 훨씬 많은데. 그려서 싫다고, 그럴 거면 핵교 안온다고 헝게, 선상님이 그냥 삼학년으로 올려줬어. 그래봤자 제대로 다니지도 못혔지. 열흘이면 하루나 다녔나 몰라. 남들 졸업식 할 때가 됐는데, 나는 남부끄러워서 갈 생각도 읎는디, 선상님이 오라고 일부러 애를 보내신 거여. 그려도 챙피혀서 안갔는데, 선상님이 졸업장을 챙겨 애 손에 들려보냈어. 안됐응게 그렸겄제~. 그려서 소핵교 졸업장은 있어, 근데 그게 제대로 졸업을 한 게 아닌 거제. 가짜 졸업장이나 한가징거제. 실지로는 초등핵교 이학년 중퇴두 나는 안 되야~.

    그려서 지금두 내가 글씨를 잘 몰러. 겨우 읽을 줄이나 알지~ 그러니 평생 을매나 깝깝혔겄어. 그 핵교 이름이 영대초등핵교(당시 충남군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현주소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 에 있던 학교, 현재는 폐교)여. 핵교를 못다닝게 칭구도 떨어지고. 내가 머리래도 나빴으면 거시기를 허겄지만, 욕심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그른디, 핵교 제대로 못 다닌 게 내 평생의 한이구, 어무이헌티 젤 큰 원망이여.

    아들이면 그르케 공부 욕심을 냈으면 대학이래두 보냈을 거여. 집에 돈은 있었응게. 남동상 둘은 가르칠라 그려도 지가 배우기 싫다고 가다 말았어. 그 밑 여동상부터는 고등핵교까지 나왔어. 낭중에는 딸이라고 안보내지는 않은 거여. 낭중에 결혼해서 말 못하고 산 설움에다가 글도 잘 모르니, 사는 내내 그 설움이 말로 다 못혀. 평생의 젤로 큰 한이여, 못 배운 게….

    두 냥반 장사 나갔을 때, 보릿짚 말리니라고 마당에 짚을 널다가 혼차 주먹밥을 만들어서 집 간장을 한 줄 쪼옥~ 찌끄러서 먹던 기억이 나네. 그게 그르~케 맛있을 수가 읎었제. 고구마를 열다섯 가마니씩을 해서는 웃방에다 통가리를 해놓고, 두고두고 먹은 기억도 나고. 볏단을 기계루 털어서, 나락을 섬(가마니)에 담아서는, 광에다 쌓아놓지. 쌀농사도 했고 보리 콩 팥, 곡식이란 곡식은 다 하지. 보리를 타면 우리 아부지는 옷 오른 거 마냥 가려워혔어. 그려서 아부지는 안하고 다른 식구들이 다 혔지.

    곡식은 내다 팔 거는 별라 읎었어. 주로 두 집 식구들 먹는 거제. 난중에 남동상들이 커서 같이 농사짓고 하니 농사가 커져서, 그 때는 내다 팔기도 혔제. 그 때는 농사를 져도, 보릿고개가 되면 먹을 게 별라 읎었제. 죽을 안 쒀먹었다 뿐이지 우리도 그럴 때는 힘들었제. 그러면 겨울게는 고구마도 먹고.

    바로 밑 남동상은 일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그렸어. 그려도 두 냥반이 머라 그러지를 않았지. 그 밑 남동상은 일을 많이 혔어, 공부는 싫어서 안하고. 걔하고 나하고는 일은 직살나게 혀고, 늘 야단맞고 그렸어. 첫 아들은 반건달이었는디, 그려도 갸는 대우는 젤 받었제, 장남이랑 장녀랑은 천지차이여.

    겨울게 그 밑 여동상을 데꾸 내가 빨래를 갔다 오면, 우리 아부지가 갸 손만 잡아. 싸고 비비고 하며 불 옆으로 데꾸 가고 함서두, 나는 쳐다도 안봐~. 그게 그르케 서운허드라고. 여동상은 그저 따라가는 거 뿐이지, 그 어린 게 무슨 빨래를 혔겄어? 내가 시키지도 않제~. 그른디 갸만 그르케 불쬐라구 하구, 나헌티는 암말도 안하는 거여. 그저 나는 당연히 일꾼이여, 머슴 하나 둔 거제. 나중에는 ‘나를 주서 와서 이렇게 차별을 허나?’ 그런 생각도 혔었어. 핵교 생각하면 그렀찮여~? 나는 일하니라고 동네 벗어나서 어디 귀경도 못 가봤어. 거기서 동학사니 머니 그런 데가 멀지도 않았는데, 그른 디 한번을 못 가봤당게.

    사진? 사진이 머여 사진이? 사진이란 걸 찍어 본 게, 선 볼 때가 난생 처음이었어. 그래두 내가 이 흑백 사진 두 개를 보관하구 있는 거여. 이건 스물 둘에 선보니라고 찍은 사진이여. 나헌테는 보물이니께 잘 쓰고 돌려줘야 혀~.

    말하자면 정혼 사진이지. 정혼이 머 다른 게 아니고, 그냥 색시 집서 선 보고 한 거제. 일부러 단장을 하고는 십리를 걸어 나가 사진관 가서 찍었어. 진분홍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여. 댕기는 빨간색이고. 머리를 많이 길었었지. 이 사진을 신랑네다 주는 거여.

    그라구 이 사진은 그 무렵에 동네 친구들이랑 같이 찍은 거여. 다들 스물하나 스물 둘 그 때제. 이걸 찍구 찾구 하니라구 쌀들두 퍼내구, 두 번이나 또 읍내 사진관까지 몰래 갔다 왔제. 맨 오론 쪽이 나여. 그 옆에 친구는 중매로 결혼했는데,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헌티 속아서 간거더라구. 그랴니 친정으로 다시 들어와 있다가 나중에 다시 결혼을 했는데, 첫 애 낳다가 죽었어. 다른 애들과도 지금은 모두 연락이 안 되야. 어뜨케들 살고 있는지 너무 보고 싶은디….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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