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강 그리고 역동적 성장
    [세계 LGBT 운동의 역사] 브라질 LGBT 운동 ②
    By 토리
        2013년 10월 04일 10: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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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LGBT 운동 브라질 편 첫번째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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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게이 레즈비언 권리 운동

    1980년에는 첫 동성애 잡지 Lampião와 인권그룹 Somos가 시작하였다. Somos의 결성은 일곱 여개의 다른 그룹들을 촉발시켰으며 1차 전국 동성애자 단체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중산층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소규모 그룹이었으며, 일부는 독재의 힘겨운 시절에서 살아남은 좌파조직 멤버이거나 지지자들이었다. 과거 좌파조직 멤버들에게는 조직가로서의 경험과 동시에 동성애가 “부르주아적 퇴폐의 산물”이라는 좌파적 비판이 있었다.

    1980년 5월 Somos는 노동계급운동에 대한 참여와 게이 운동 내의 좌파의 역할을 두고 분리되었다. 성공적으로 전국적 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동시에 경찰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활동가들의 낙관은 벽에 부딪쳤다.

    노동운동 및 좌파운동과 동맹을 맺는 데 반대한 이들은 “다른 것:동성애자 행동 그룹(São Paulo, Grupo Outra Coisa: Ação Homossexualista)”이란 그룹을 만들었다. 레즈비언들은 이미 따로 분리하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그룹(Grupo Lésbico-Feminista)”를 만들었다.

    그 후에 만든 조직 역시 리더십 논쟁으로 분화되었고, Lampião 편집장은 잡지의 판매량이 줄자 활동 단체들을 비난하였다. 잡지는 1981년 중반에 접혔고 대부분의 초기 운동 단체들 또한 대부분 이후 3년 동안 문을 닫았다. 1984년에는 오직 7개 그룹만이 살아남았으며 이 중 오직 5개 그룹만이 2차 전국 동성애자 단체 대회에 참석하였다.

    운동의 하락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 그룹들의 구성원 수는 2-30명을 넘지 못했다. 재정적 자원이나 인프라가 결여되어 있었다. 초기 지도자들은 신망을 잃었고 단체 성장에 실패하자 운동을 떠났다. 1980년대 활동가들은 그룹 유지 경험을 갖지 못했다.

    1980년대는 라틴 아메리카의 “잃어버린 10년”이기도 했다. 해외 부채는 급격히 늘어났고 대다수 실업 상태로 지내야 했다. 1985년 독재가 완전히 끝나면서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환상이 널리 퍼진 것도 문제가 되었다. 동성애자의 권리 등은 별 다른 노력이 없이 확장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동성애의 긍정적 담론들을 다루고 있었고, 가시화된 게이 소비 시장은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들이 별다른 정치적 투쟁 없이 이미 많은 자유를 획득했다는 환상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비록 운동은 소강 상태였지만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그룹(Grupo Ação Lésbica-Feminista)는 페미니스트 운동 참여를 둘러싼 전투에서 완전히 승리하였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그룹은 Chanacomchana 회보를 발행하면서 대중적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국제 레즈비언 컨퍼런스에 참여하였다.

    인류학 교수 루이즈 모트(Luiz Mott) 역시 중요한 캠페인을 벌이면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게이 단체 “바이아 그룹(Grupo Gay da Bahia)”를 건설하여 1980년대 후반 운동을 이어나갔다. 바이아 그룹의 첫 승리는 그룹에 대한 법적 인정을 얻어낸 것이었다.

    두번째 캠페인은 동성애를 “성도착 질병” 범주에서 제외시키도록 연방보건위원회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인 것이었다. 캠페인은 전문가 단체, 그룹들의 반응을 유도하였고, 유명한 지식인과 셀레브리티들이 질병 분류 철폐를 호소하는 서명에 사인하였다. 보건위원회는 1985년 2월 동성애를 질병 범주에서 제외하였다.

    1987년과 1988년 브라질은 입헌의회를 개최, 헌법 개정을 논의하였다. 상파울로의 람다 그룹과 바이아 그룹의 지원을 얻고 Lampião 전 편집장 안토니아 마스카레나스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조직하였다. 1988년 1월 28일 이 조항은 총 559명의 제적 중 130명의 찬성만을 얻어 조항 삽입에 실패하였다. 가톨릭 계통 의원들은 중 대다수는 조항 삽입에 반대하였고 좌파 정당 대표자들은 전부 찬성하였다. 두 곳의 브라질 주 헌법에 비슷한 법 조항이 있었고 상파울로, 리오데자네이로 등 중요 대도시에도 차별에 반대하는 조례가 있었으나 법적 효력이 없었다.

    2011년 살해당한 트랜스 여성 추모와 폭력 규탄 집회 모습

    2011년 살해당한 브라질 트랜스 여성 추모와 폭력 규탄 집회 모습

    AIDS의 시대

    민주화 시기 대부분 게이 레즈비언들은 정치 조직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HIV 감염의 급증, LGBT에 대한 폭력의 증가는 게이 레즈비언 권리가 민주 정부 아래에서도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첫 AIDS 감염 사례는 1982년에 있었다. 대부분 브라질인들은 HIV/AIDS를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부유한 게이 남성과 연결지었다. 실제로는 갈수록 게이 남성 간 감염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는 이성애자 남성간 감염의 비율이 더 증가하고 있었다.

    잘못된 정보와 호모포비아는 대중적 공포를 불러왔으며 황색잡지는 “게이 페스트”의 도래를 떠들었다. 과거 좌파그룹과 분리했던 “다른 것:동성애자 행동 그룹(São Paulo, Grupo Outra Coisa: Ação Homossexualista)”에서 먼저 나서서 질병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게이 씬에 배포하였다. 활동가들은 상파울로 보건부 대표자들과 만나서 전염병에 맞서는 것은 동성애를 차별하는 것이 아님을 보장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1세대 활동가들은 AIDS 관련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 등장했던 2세대 활동가들은 AIDS 교육을 정치 활동에 결합시켰다.

    1980년대 중반에는 LGBT에 대한 폭력이 급격하게 증가하기도 하였다. 루이즈 모트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동성애자 남성, 여성, 트랜스 살해 사건이 1천2백건 발생했음을 보고하였다. 몇몇 사례는 레즈비언 여성들이 정체성이 밝혀진 후 친척에 의해 살해된 경우였고, 대부분은 게이 남성들을 목표로 유혹하고 강도짓한 후 살해한 사례였다.

    대부분은 미지의 그룹과 개인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범인들 대부분은 유죄 평결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동성애자 단체 바이아 그룹은 서로 다른 12개의 집단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군사 독재 기간 다수의 불법 무장 단체가 형성되었는데, 군부와 경찰 간부들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반’으로 알려진 이들 단체들은 군대 내부에서 주로 납치나 반대자 고문 등 불법적 행동들을 수행하였다. 일부는 “비도덕적 행동”, 특히 동성애를 “청소”하는 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반동성애 십자군”(Cruzada Anti-Homossexualista)는 1981년까지 Somos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79년 독재 정부는 지난 15년간의 살해와 고문에 대한 사면권을 발동하였고, 그 결과 인권 침해 사안은 처벌받지도 않고 지속되었다. ‘죽음을 부르는 반’ 등의 그룹은 여전히 처벌받지 않는 채 브라질에서 활동하고 있다.

    모든 신고된 살해 건 중 10%만이 체포로 이어졌다. 한 활동가는 지난 10년간 자신의 도시에서 20건의 살해 건을 정식 신고하였지만 평결로 이어진 것은 2건 밖에 없었다. 다른 활동가는 1994년 10월 한 달 동안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23명의 트랜스들이 살해당했음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신고되지 않아 주요 범죄 보고에서 누락되었다.

    사법 체계 역시 제대로 된 평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 한 몫을 하였다. 1994년 10월 군사법원은 트랜스 살해 혐의로 기소된 한 군인 피고인의 형량을 12년에서 6년으로 감형시켰다. 법관은 피고인의 형량 감소 사유를 “트랜스는 위험하니깐”이라 들었다.

    가장 끔찍한 사건은 1993년 살인 사건이었다. 지방 카운슬러 레니도 호세(renildo josé dos santos)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힌 후 시의회로부터 30일간 정직 처분 받았다. 정직 기간이 끝나자 시의회는 복귀를 막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는 복귀를 위한 법원 명령을 구하고자 하였다. 다음날 그는 납치당했다. 시체가 토막난 채 발견된 것은 3월 16일이었다. 시장을 포함한 5명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현재까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제 2의 물결

    3차 전국 동성애자 대회는 1989년 개최되었으며, 오직 6개 단체만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1985년 한 청년이 게이 배싱으로 살해된 사건 이후 결성된 Atobá 같은 단체 등 새로운 단체들이 참석하였고 중산층 게이바나 클럽과 거리가 먼 리오데자네이루 노동 계급 출신 레즈비언 게이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후 매년 대회는 더 많은 그룹과 개인들이 참석하여 제7차 전국 대회는 31개의 조직 대표들이 참석,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 연합체가 결성되었다. 대부분 조직들은 소규모였지만 전국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조직의 형성은 운동의 역동적 성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LGBT 운동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다른 분야 발전들이 있었다. 군부 독재에 맞서 성장한 많은 사회운동들과 노동자당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민주적 참여를 가능하게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들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참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이었다. 더 나아가, 1992년 페르난도 대통령 탄핵을 위해 수백만의 브라질인들이 시위한 경험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시켰다.

    게이 레즈비언들은 재차 정치화되었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들은 지지를 받기 위해 지역 단체들을 가입하였고 레즈비언들은 운동에 대한 리더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전국 대회 명칭을 ‘브라질 레즈비언과 동성애자 대회’로 바꾸고 레즈비언 가시성을 높였다. 1997년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4일간의 독자적인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레즈비언 시민권, 호모에로티시즘, 노동조합운동 내 흑인 레즈비언, 레즈비언과 가족 관계, 건강권 등 광범위한 주제의 토론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미디어는 국제적 동성애 이슈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다루기 시작했다. 토크쇼는 대중 앞에 커밍아웃 가능한 활동가들을 초대해서 이슈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였고 르나토 루소 같은 팝 싱어는 커밍아웃한 후 동성애자 운동 지지 선언을 하기도 했다.

    동성간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도 변화하였다. 1980년대 Somos는 “gay”란 용어가 너무 미국적 용어라 거부했지만 이제 “gay”는 미디어 속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널리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덜 여성적인 게이나 덜 남성적인 여성들이 가족과 상사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많은 활동가들이 커밍아웃하며 “원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말 것”을 강요하는 문화적 장벽을 깨고자 했다.

    노동자당이 대부분의 사회운동과 좌파그룹을 위한 ‘우산 조직’으로 성장한 것도 게이 활동가들을 정치화시켰다. 노동자당은 브라질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위한 통로가 되었고, 노동자당의 의원들은 게이 레즈비언 운동의 입법 운동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보여 왔다.

    1980년대 노동자당은 게이 레즈비언 권리를 포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원내 정당이었다.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노동자당 내 그룹을 형성하고 당원들에게 운동 이슈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당의 활동가와의 동맹은 기독교 기반 커뮤니티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노동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룰라는 동성결혼 지지를 철회하기도 하였다. 룰라가 게이 레즈비언 권리에 대한 완전한 지지를 천명하기를 꺼린 것은 가톨릭 조직의 지지를 얻고자 한 그의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경제 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트랜스들은 브라질 LGBT운동의 적극 참여자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브라질 도시에는 성매매를 하는 복장전환자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간 트랜스와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거리가 있었다. 1993년 5월 “트랜스와 해방 인민 연합(Associação de Travestis e Liberados)”는 최초로 전국 대회를 개최하였고 1백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하였다. 이는 전국 레즈비언 동성애자 대회로 이어져 전국 조직의 명칭이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 연합”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 LGBT 운동은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 현재 노동자당이나 사회주의자연합노동자당(United Socialist Workers Party) 등과 같은 좌파들은 정치적으로 다양한 운동의 입법 부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들은 직접 후보를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활동가들은 룰라와 노동자당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운동이 기계적으로 좌파 레토릭이나 분석, 조직 방법 등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 집회에 참여할 때 게이 레즈비언들은 색색이 칠해진 배너와 레인보우색 풍선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며, 이는 대부분 그룹에서 중요한 조직 방법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고립된 그룹과 일부 개인들이 운동을 수행했지만 오늘날은 전국적으로 폭력, 동성간 파트너십, 반차별 입법 등의 주제를 발전시키며 운동 지도자들은 미국, 유럽, 혹은 라틴 아메리카 다른 국가로 여행하면서 풍부하게 교류하고 있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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