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의 급속한 성장, 그 전주곡
    [세계 LGBT운동의 역사] 브라질 LGBT 운동(1)
    By 토리
        2013년 09월 09일 12: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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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1978년 브라질의 군부독재가 마침내 끝났다. 학생들은 수도 브라질리아 거리를 가득 메우고 “독재 타도!”를 외쳤다. 라디오에서는 검열로 틀지 못했던 노래가 흘러나왔고, 히트를 쳤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들은 뭉치기 시작했고 각자의 요구를 외쳤다.

    1978년에서 1979년을 잇는 여름동안 상파울로에서 수십 명의 학생과 사무직 종사자들, 지식인들이 격주간 모였다. 아파트에서, 바닥에 앉아서, 브라질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의 미래를 설계했다. 대부분 게이 남성이었고 일부 레즈비언들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단체 ‘동성애 권리를 위한 핵심 행동(Núcleo de Ação pelos Direitos dos Homossexuais)에서 브라질의 유명 황색잡지 Noti-cias Populares의 게이 혐오성 논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하였다. 근간에 창간된 월간 게이 잡지 Lampião da Esquina는 깊은 영감을 안겨 주었다.

    여름이 지나자 단체명을 둘러싼 논쟁이 심해졌다. ‘동성애 권리를 위한 핵심 행동’이란 단체명은 너무 정치적이어서 새로운 멤버가 그룹에 함께 하기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단체명이 내포하는 운동권 어조는 성원들이 증가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일부는 1971-1976 독재 기간 존속했던 남미 최초의 동성애 권리 단체 ‘아르헨티나 동성애 해방 전선’을 기리는 의미에서 단체 간행물 이름이었던 ‘Somos(우리는)’로 바꾸길 원했다. 다른 이들은 ‘동성애 우호 그룹’으로 단체명을 바꿔, 단체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길 원했다. 사람들은 ‘게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건 미국의 운동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동성애 해방전선의 모습

    아르헨티나 동성애 해방전선의 모습

    타협안은 ‘우리는: 동성애 우호 그룹'(Somos: Grupo de Afirmação Homossexual)이었다. 단체명을 둘러싼 논쟁은 브라질의 “소수자”-여성, 흑인, 원주민, 동성애자-를 조직하고자 하는 4일간의 패널 토의 중 일부로 이루어졌으며,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 운동이 최초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잡지 Lampião의 편집장과 Somos 회원들이 패널을 구성했다.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벤트에 참여하여 강당을 메웠다. 토론은 좌파 학생 그룹과 게이 레즈비언 대표자들 간의 찬반 토론으로 이어졌다. 게이 남성들은 브라질 좌파들이 동성애혐오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 방어자’에서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혐오증 등의 특정 이슈에 대해 싸우는 것은 좌파를 분할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독재에 맞선 보편적 투쟁에 뭉칠 필요가 있었다.

    토의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Somos가 다른 사회운동들과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조직적 자율성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전술적 질문들이 제기되었고, Somos가 분열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졌다.

    그러나 Somos나 당시 토의에 참여했던 누구도 게이 레즈비언 운동이 브라질 정치 무대에 폭발적으로 급등장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약 1년도 지나지 않아 천여명의 게이 레즈비언들이 ‘제1회 전국 동성애 그룹 대회’에 모여 옥내 집회를 하였다.

    한 달 후, 1980년 5월 1일,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포위한 도시에서 50명의 커밍아웃한 게이 레즈비언 대표단이 다른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절 기념 파업을 벌였다. 게이 레즈비언 대표단이 행진 마지막 대오에 참가하기 위해 축구 경기장에 들어설 때, 수천 명이 박수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6주 후, 1천명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 성노동자들이 상파울로 중심가에서 경찰 폭력에 맞서 시위를 벌였고 “억압을 없애라-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욕망을”이란 구호를 외쳤다. 운동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장면 #2

    15년 후 1995년 6월, 60개국의 게이 레즈비언 대표자 300명이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제17차 ILGA(국제 레즈비언 게이 협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개회식에서 한 노동당 여성 연방국회의원의 주창으로 동성간 동거관계 인정 및 성적 지향에 기반한 차별 금지를 위한 헌법 수정을 위한 전국 캠페인의 닻이 올랐다. 총회 마지막 무렵, 참석자와 2천명의 게이 레즈비언 지지자들은 대서양 해변의 퍼레이드 행렬과 함께 스톤월 항쟁 26주년을 축하하며 총회를 마무리하였다.

    퍼레이드 행렬은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의 완전한 시민권”이라 쓰인 25피트 크기의 황색 배너를 앞세웠다. “레즈비언 가시성”을 주장하는 팻말을 든 여성들이 뒤따랐다. 드랙퀸들은 은행노동조합에서 빌린 “프리실라” 학교버스와 트럭 위에서 자태를 뽐냈다. 125미터의 무지개 깃발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퍼레이드 마지막, 참석자들은 눈물을 삼키며 국가를 불렀고 보슬비로 대오가 해산할 때까지 흐느꼈다.

    합법이나 합법이 아닌

    비록 식민지 시기 브라질 법이 소도미를 죄로 간주, 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어도, 1830년 제국 형법(Imperial Criminal Code)는 모든 소도미 관련 조항들을 제거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법은 동성애 행동을 규제하였다. 공공장소에서 성인간의 성적 행동은 “풍기 문란”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이 조항은 초기 형법의 조항이 이월된 것으로, 동성간 에로스적 행동을 규제하는 법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동성애의 공적 표현을 규제하는 다른 수단은 “부랑죄”였다. 경찰은 주변의 지지나 일정한 거주지를 갖지 못한 이, 혹은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도덕 및 예의에 반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를 구속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조항으로 경찰은 공공장소에서 여성성을 표현하거나 여성스러운 옷 혹은 화장을 한 동성애자와 트랜스들, 성매매로 살아가거나 성적 유희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이들을 임의로 가둘 수 있었다. 형법은 적절한 도덕성이나 풍기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였고 성적 규범에 위배하는 누구나 언제든지 잡아둘 수 있게 하였다.

    봉급이 낮았던 경찰들은 이들 죄로 구속된 남성들에게 뇌물을 갈취하였다. 동성애는 완전히 불법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브라질 경찰과 법원에 의해 쉽게 투옥되고 통제받았다.

    1970년대 이전 브라질 성소수자

    1950년대와 1960년대 브라질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수백만의 농촌 인구들이 도시로 밀려들었고 내수용 공업 생산이 확장되었다. 레시페나 살바도르와 같은 북동부 도시나 리오 데 자네이루, 상파울로와 같은 남동부 도시들은 게이들을 자석처럼 빨아들였다.

    브라질의 전통적인 동성애 젠더 역할 구성은 위계적이고 역할 중심적이었다. 동성애 남성들은 homem(‘진짜’ 남성)과 bicha(가짜 남성)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이는 이성애 젠더 구분 homem(남성)과 mulher(여성)을 모방하여 성적 행동에서 “능동적인” 탑 역 파트너는 남성으로, 바텀 역은 여성으로, “수동적인” 파트너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바텀 역의 “수동적” 남성은 사회적으로 낙인화되었고 탑 역은 그렇지 않았다. “진짜” 남성의 성적 역할을 유지하는 한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동성간 성행동을 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전통적인 여성성 관념을 위반하고 남성적 성격을 보이거나 독립을 유지하거나 다른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의 경우 주변화되었다. 전통적 여성성을 거부한 레즈비언들은 주류적 젠더 페러다임 경계 밖에 위치하였다. 레즈비언에 대한 가장 통상적 표현 sapatão는 문자 그대로는 “큰 구두”였고 강한, 남성화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반영하였다.

    브라질은 1950년대 말까지 게이 혹은 레즈비언 바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애 씬은 공원, 광장, 공원, 공공화장실 등에 있었다. 미혼들은 결혼할 때까지 가족이랑 살기 때문에 1시간 가량 빌린 방이나 친구 집에서 성적 접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작은 파티나 비밀 드랙쇼, 주말 여행 등은 일정정도 자유를 허락하였다.

    축제(카나발)은 1년에 한번 게이 남성이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레즈비언들 또한 욕망을 드러내며 축제를 즐겼다. 드랙 무도회, 복장 전환, 캠피한 행동들이 마음껏 펼쳐졌다. 1950년대부터 리오데 자네이루 인형 무도회는 국제 관광객을 끌기 시작했고, 남미 전역의 게이 남성들이 참여하여 경쟁하였다. 여기서 우승하면 카니발의 가장 글래머하고 아름다운 여신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브라질 군부 독재 시절의 동성애

    1964년 브라질 군부에 의해 조앙 굴라르 대통령이 실각되고 21년간의 권위주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브라질 군부는 야당을 불법화하였고 좌파 지도자들을 투옥, 노동조합을 탄압하였다.

    동성애자 좌파들은 다수가 투옥되었지만 브라질의 게이 레즈비언 하위문화는 쿠데타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레즈비언 게이 바들이 문을 열었고 드랙쇼가 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부 복장전환자들은 유명인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사적인 드랙 파티가 열렸다. 이 중 일부 그룹은 자체 뉴스레터 O Snob를 발간하였고 곧 30종 가량의 유사한 간행물들이 출간되었다. 1967년 브라질 게이 언론 연합이 구성되었다가 1년 후 해산하기도 하였다.

    1968년 군부 독재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게 퍼졌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군부 독재를 끝낼 것을 요구하며 행진하였다. 그 영향으로 내부 쿠데타가 벌어져 강경파가 새로이 정권을 잡았다. 1968년부터 1973년 강경파 정부는 반대 세력에 대한 국가 테러를 자행하였고 수천 명이 투옥, 고문당했다.

    197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에도 스톤월 이후 게이 해방 운동에 관한 소식들이 전해졌고, 아르헨티나, 멕시코, 푸에르토리코에서 단체들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 군부독재는 급진적 게이 레즈비언 운동 사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O Snob 등의 출판물들은 자신들이 좌파 지하 조직 일원으로 오해받을 것이 두려워 곧 발행을 중단하였다.

    군부 독재의 엄격한 도덕주의적 규율 속에서 동성애나 게이 축제 무도회 등의 언급은 신문에서 사라졌다. 일부 대안 매체들이 미국의 “게이 파워”를 보도하였지만 정치 운동을 만들어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강경파 장군들이 정부를 차지하는 동안 브라질에서는 젠더와 동성애 관념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변동이 일어났다. 카타노 벨로소, 마리아 베싸니아, 니 마토그로소 등의 양성성을 표방한 팝 가수들이 등장하였고 양성애적 욕망을 함축하며 모호한 성적 경계를 드러냈다. 개인의 성적 자유를 강조하는 반문화적 가치는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전통 관념에 도전하는 청년 문화가 도시 중산층에 스며들었다.

    1974년 군부 독재는 심각한 문제에 맞부딪쳤다. 빈곤층과 노동자계층에 대한 탄압으로 급성장한 경제가 오일 위기로 나락에 떨어졌다. 야당은 지방 선거에서 지지기반을 획득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자치조직을 되살렸고 군부독재에 맞서 시위하였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비공식 파업을 벌였다.

    지하 저항 조직에 참여한 여성들은 좌파 내 성차별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페미니스트 이슈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흑인 운동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도전하였다. 1978년 경제 정책에 대한 대규모 파업을 맞은 군부는 점진적 자유화 과정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하였고 마침내 정부를 시민 편에 돌려주고 정치범들을 사면하였다. <계속>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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