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과 내가 주인공일 수 있는
    식민지에서의 삶과 저항
    [책소개] 『식민지 불온열전』(정병욱/ 역사비평사)
        2013년 08월 17일 01: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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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불온열전이라……. 뻔한 얘기 아냐?”

    요즘 편집 중인 책이 뭐냐는 친구의 물음에 ‘식민지 불온열전’이라 하니, 대뜸 돌아오는 말이었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투사의 전기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덧붙이기를, “어떤 사람 얘기냐, 유명한 독립영웅이겠지?”한다. 결론적으로, 그의 말은 일부만 맞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불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일제 지배층에서 바라볼 때 불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명한 독립투사도, 널리 알려진 영웅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 부모나 조부모, 이웃의 삼촌 이야기일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경성 유학생 강상규 이야기를 <역사스페셜>(117회 ‘경성 유학생 강상규의 조선독립 10년 계획’―2012년 10월 11일 방영)로 제작한 KBS PD 김장환은 이렇게 말한다.

    “3·1운동 무렵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청년 시절을 보내고 1·4후퇴 때 가족과 북녘 고향을 떠나온 선친의 삶을 나는 아직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아버지 ‘가네모토 나가쿠니’가 불온한 조센징이었는지, 충량한 신민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정병욱 교수의 글을 통해 이제는 내 곁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중일전쟁기, 곧 전시에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죄로 일제에 검거된 사람들이다. 그 시기는 식민지 권력이 일상 영역에 침투하고 통제를 강화하며 삶을 옥죄던 때다.

    내선일체와 같은 식민정책이 실시되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를 하며,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이 강요되었다. 일제 통치에 대해, 천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얘기하면 여지없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끌려 들어갔다. 비단 독립전쟁을 했던 사람만이, 조직을 만들어 독립투쟁을 했던 사람만이 일제의 감시하에 놓여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감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 책은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선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온’이 함의하듯 체제와 통치 권력에 저항하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삶과 투쟁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을 구성해내는 방법과 주인공들은 어쩐지 낯설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거대 역사 대신, 당대의 작은 개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과 일상, 저항을 복원했다. 마치 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만, 사이사이 엄밀한 학술적 논증과 분석을 놓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불온 언동을 했다는 죄로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주인공의 신분은 경성 유학생, 경기도 자소작농, 서울 근교 하층민, 강원도 산간벽지 소학교 학생이다.

    불온열전

    이들이 신분이나 계층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들을 통해 식민지 시기 다양한 계층의 삶과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김장환 PD의 말처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머니·아버지 세대, 할머니·할아버지 세대의 삶을 공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불온’이라 하면 반골의 냄새가, 반역의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다. 우리 국어사전에도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라고 뜻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불온의 오래된 뜻은 ‘편안하지 않다’ ‘순조롭지 못하다’이고, 현재 일본의 사전에도 ‘평온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되어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편안하지 않다’가 ‘순응하지 않다’로 불온의 의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1907년 제정한 ‘보안법’이라고 한다(이 책 230쪽, ‘보론 2 : 불온에 관한 7가지 단상). 그러면서 저자는 통치층의 인식이나 태도가 식민지 시절과 연속되는 점이 많음을 지적한다.

    유신시대 일반 시민이 술김에 유신독재에 대해 토로한 울분이 긴급조치에 걸리면서 검거되고 징역을 산 적이 있다. 이른바 ‘막걸리보안법’에 걸린 것이다.

    2008년에는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가진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리먼 브라더스의 부실과 글로벌 금융 위기에 대해 썼다가 허위 사실 유포죄로 구속되었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렸다고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벌금형의 형사처벌을 선고받은 이도 있다.

    오늘날의 불온 언동이다. 삐딱한 표현 방식이다. 이들은 조직을 만들어 체제에 항거한 것도 아니고, 사회의 저명 인사도 아니었다.

    <식민지 불온열전>의 주인공들이 꼭 이와 같다. 경성에 유학 온 강상규는 자신의 일기에서 독립을 열망하고 천황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경기도 안성에 사는 자소작농 김영배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이웃에게 불온 언동을 했다고, 강원도 산골 소학교 학생 김창환과 그 친구들은 학교 교실 벽에 ‘일본 폐지, 조선 독립’이라는 낙서를 했다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걸려 검경의 신문을 받고 형사처벌을 받는다.

    저자는 행위로서 불온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정치나 운동이 아닌 삶의 공간에서는 불온과 순응의 모호한 공존이 일상적이라는 것. 둘째는 불온과 순응이 분리되어 한쪽이 강화될 때, 왜 그런지 역사적·국면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 셋째는 저항의 뿌리로서 불온이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불온은 행위자와 그 시대를 보여주는 창이며, 미래를 열어가는 저항의 뿌리라고 저자는 말한다(이 책 236~237쪽, ‘보론 2 : 불온에 관한 7가지 단상). 그리고 이렇게 글을 맺는다. “불온이 없는 사회에서 독재는 시작된다.”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 이해와 공감, 그리고 분석과 검증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에서 팩션(Faction=fact와 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이 유행한 적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쓰기 때문에 읽는 이의 큰 흥미를 돋운다. 소설뿐만 아니라 역사서 장르에서도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지나친 상상력을 덧붙임으로써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저자 정병욱은 이 책을 통해 “역사학의 서사적 전통을 복원”(성균관대 임경석 교수 추천사)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는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야기 구성 방식으로 주인공들의 삶을 이해시키고 공감케 하며, 사이사이 분석을 집어넣었다.

    1940년 10월 21일 월요일 오후 4시 30분쯤 극장 ‘황금좌’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날 경기공립중학교 전교생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 레니 리펜슈탈의 <민족의 제전>을 단체 관람했다. 4학년 강상규는 해산해도 좋다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 동급생 김재원과 같이 길을 건너 귀가했다. (…) 강상규가 먼저 얘길 꺼냈다.

    “어땠나?”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우승한 장면을 보니 유쾌했는데, 두 선수가 별로 환영받지 못한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해.”

    “유쾌했다고······. 나는 슬펐다.”

    김재원이 왜냐고 묻자 강상규의 말보가 터졌다. 일장기가 올라가는 순간 나라 없는 비애를 느꼈다, 지금부터 목숨을 바쳐 반드시 나라를 독립시키고 다음 올림픽은 조선에서 개최하겠다, 그때만큼은 당당히 태극기를 휘날려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고 나의 이름도 후세에 남기겠다, 친구로서 협력을 바란다 등등. 이따금 부는 천변의 바람이 시원할 정도로 더운 날씨다. 친구의 흥분에 김재원은 대답이 궁해 “아, 그런가” 하고 말았다. (…)

    강상규는 체포되기 전까지 권력의 시선을 잘 피했던 것 같다. 단순히 피하는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권력의 규율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권력의 시선을 조롱했다.(…)

    강상규는 두 종류의 일기를 썼다. 학교에 제출하는 ‘학생 일기’와 자신만 보는 ‘개인 일기’. 먼저 ‘개인 일기’를 쓰고, 그중 군데군데를 골라 일본어로 ‘학생 일기’를 적어 제출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자면 영화 <민족의 제전>을 본 날 밤, 강상규는 흥분이 느껴지는 ‘개인 일기’를 길게 썼다. 손기정을 운동회에서 1등 했으나 아무도 기뻐해주는 이 없는 고아에 비유하면서 조국에 목숨을 바쳐 손기정 같이 우리 조국이 낳은 동포에게 행복이 있도록 하겠다, 후진에게 나라 없는 슬픔이 없도록 하겠다고 썼다.

    학교에 제출한 그날 ‘학생 일기’에는 “손·남 선수의 우승에 나는 잠시 열광하였다”고 적었으며, 다음 날에는 전날 느낀 점이라며 “우리 일본의 선수”는 정정당당하여 다른 나라 선수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훌륭하다고 썼다. (…) 이쯤이면 권력에 길들여져 ‘정상화’되는 개인과 다른, 자신을 스스로 주체화하는 개인을 상정해도 되지 않을까. 권력의 ‘규율화’에 맞서서 스스로를 ‘개체화’하는 개인. ‘개체화’도 관찰로부터 시작하며, 그 결과물이 ‘개인 일기’다.

    ― 본문 17~18쪽 / 42~43쪽.

    저자 스스로 ‘불온한 글쓰기’라 이름한, 사실을 존중하면서 행위자에 어울리는 이야기식 글쓰기와 분석과 검증, 그리고 상세한 주를 단 논문식 글쓰기를 병행했다. 저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형사사건 기록’을 샅샅이 검토하고, 당시 신문 자료와 관련 참고문헌을 면밀히 훑었으며, 해당 지역 답사를 통해 친지와 관련 인물의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그리하여 주인공들의 불온 언동 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현해냈다.

    <이끼>와 <미생>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는 이 책을 미리 읽고 이렇게 얘기했다.

    그 시대의 억압과 고통을 알고 싶다면 저항의 디테일을 확인해야 한다. 디테일은 개인의 삶을 통해야만 목격되고 웅변된다. (…)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디테일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불온열전>은 평범한 개인의 삶에 드러나는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그 디테일을 매우 잘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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