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링'이라는 상품의 소비사회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민주주의는 소외 해결의 단초...폭력 수준을 낮추는 역할
        2013년 07월 24일 01: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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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출강하는 학교는 이른바 사이버대학교이다. 학과별로 학생 정원이 고정되어있지 않고 계열정원으로 모집하는, 사이버대학교에서 가장 학생이 많은 학과의 변화를 알면 시대적인 트렌드를 알 수 있다.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대세는 사회복지학과였다. 그 중에서도 노인과 관련된 분야는 수천 명이 넘는 학과도 생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3년 전을 기점으로 대세는 상담심리학과로 급반전하고 있다.

    요즘 사이버대학교 1위 한양사이버대학교의 경우 상담심리학과 한 개 과의 재학생 수가 거의 5천명에 육박한다. 그리고 나머지 5위까지의 학교 상담심리학과 학생 정원을 모두 합치면 거의 2만 명 가까이 될 것이다. 이들이 매년 배출하는 상담심리 자격증 소지자만 해도 수천 명에 달하니 가히 ‘상담 사회’라 할 만하다.

    한국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상담과 ‘힐링’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가 된 듯하다. 이는 그만큼 자신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의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만큼 개인이나 집단의 주체성이 상실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자신의 정신건강마저도 외부의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철저한 자본주의 분업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담과 힐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유사한 방식으로 상담과 힐링을 받아야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특히 상담과 힐링이 스스로 자아를 찾아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타인을 이기기 위해 우선 자신을 이기는 ‘극기’를 중간 목표로 해서 결국 그 자체가 수단이 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되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상담과 힐링을 받지 않으면 낙오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모순적인 상황, 그래서 상담과 힐링은 그 자체가 공포 마케팅인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아무리 엉망인 사회라고 해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에게 상담과 힐링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고 만약 그래야 한다면 그것은 상담과 힐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구조적인 변혁이 필요한 상태일 것이다.

    어쨌든 결국 지금 우리 사회에서 상담과 힐링이 유행하는 것은 특정한 자본주의 상품 논리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을 것이다.

    힐링캠프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는 아마도 ‘힐링’을 사회적인 화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프로그램일 것이다. 지난 대선 이전 대통령 후보들까지도 출연했을 정도니 그 프로그램의 위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힐링’인가? 이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사가 출연해서 자신의 개인사를 고백함으로써 본인의 힐링을 얻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가 대리 힐링을 느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컨셉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명인들이 흘리는 눈물이 작위적이고 더러는 가식적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게 ‘힐링’인가? 오히려 목적을 위한 작위적 눈물은 본인 스스로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또한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도 더 짜증이 나지 않을까? 정형화되고 타자화되어 결국 상품화된 힐링의 결과는 자아 주체성, 자기 존재 독립성의 확립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대된 의존의 심화일 것이다.

    얘기한 김에 혹시 욕을 더 먹을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우리 시대의 유명한 힐링 인사들을 보자. 김난도 교수, 개그맨 김제동씨, 표창원 교수, 혜인 스님, 이해인 수녀, 법륜 스님 등등……. 글쎄 나에게는 이들을 볼 때, 이들이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해내는 상품을 여과 없이 소비하는 수많은 가여운 대중들만 생각난다.

    요즘 인터넷에는 이른바 ‘힐링 마니아’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소개된다. 어떤 젊은 직장 여성의 지난 주 일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제는 김난도 교수가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오늘은 법륜 스님의 강연회에 갔다가 내일은 이해인 수녀의 책 출판 모임에 갈 예정이라고 한다.

    가서 눈물 흘리고 웃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멍해졌다가 또 그 다음 날 모임에 참석해서 눈물 흘리고 웃고 떠들다가 다시 우울해지는 그 젊은 여성에게 과연 ‘힐링’이 무엇이겠는가?

    이 여성에게 힐링은 한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에어컨처럼 돈 안 들고 시원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철을 24시간 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여성은 에어컨을 이용하기 위해 지하철을 24시간 타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 힐링 인사들은,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힐링’ 이라는 대중적인 브랜드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이고 대중은 이를 소비하는 일개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들의 역할은 상처의 치료제가 아니라 상처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모르핀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모르핀에 중독되면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안하게 된다. 치료의 한 가지 방법은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것인데 힐링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상처를 소독하는 알콜은 100% 순수 알콜이 아니다. 그러면 상처 표면에 쉴드를 형성해서 상처 내부까지 약제가 침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소독용 알콜은 70%정도로 희석해서 쓴다. 상담과 힐링이 100% 알콜은 아닐까?

    범죄이야기를 하려고 하면서 이렇게 열을 내서 상담과 힐링 얘기를 했다.

    이제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한다. 소외와 폭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폭력에 익숙한 사회는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이 단절된 사회이다. 그래서 타 집단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설득과 대화, 그리고 타협이 아닌 강제를 동원하게 되고 결국 폭력이 발생하며 그것이 사회와 그 구성원에 내재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개인은 소통이 단절되고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관계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개인들 중 일부는 작지만 자신의 자원을 동원해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관계를 만들어내지만, 다수는 주체적이지는 않지만 외부에서 주어진 인위적인 방법, 즉 앞서 언급한 상담과 힐링에 의존하게 되고, 또 일부는 사회적이지 않은 수단, 주로 ‘폭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하거나 스스로 폭력화되곤 한다.

    한 사회의 범죄에 대해 고찰할 때, 해당 사회의 폭력수준 즉 해당 사회 구성원들 속에 내재화된 폭력인자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이를 범죄학에서는 ‘야수화’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데, 요즘 (청소년) 범죄의 흉포화에 대해서 언급할 때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다. 논리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 사회의 폭력 수준 정도가 증가할 때 구성원들의 소외가 증가하고 그러한 소외의 증가는 사회적으로 ‘표현형의 범죄’가 증가하게 되면서, 그것은 ‘야수화’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폭력수준이 높다고 곧 바로 ‘야수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광포한 군사정권 시대나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등에서 보다 더 ‘야수화’된 범죄가 다 많았어야 할 것이다.(문명화 이론)

    물론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 등과 같은 경우는 공개적인 폭력을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집단, 즉 지배계급이 있고 대다수의 피지배층은 폭력의 일부도 소유할 수 없는 경우이므로, 이러한 구도를, 최소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이념을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근대사회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약할 것이다.

    그래서 폭력수준에 대한 비교를 근대사회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럴 경우에도, 폭력 수준이 높아진다고 소외된 집단이나 개인이 곧 바로 ‘야수화’되지는 않는다. 그런 야수화는 폭력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런 과정 속에 구성원들의 소외와 좌절이 결국 스스로를 공격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소외된 집단과 개인에게 그러한 소외를 극복할 대상과 목표가 주어진다면 폭력이 수단이 될지언정 스스로 폭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발전국가(비서구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정치적인 결사나 스트라이크, 이익집단화 등으로 표출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갱 집단이나 비조직적 테러집단(외로운 늑대), 반사회적 범죄화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행동을 조직하는 경우가 많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념도 없고 가치도 없이 보이는 주변부터 파괴하는 자기붕괴적인 비조직적 행위들의 조악한 집합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자체를 ‘야수화’라고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소외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게 해주기 때문이고 이는 구성원 사이의 소통을 활발하게 해주고 결국은 해당 사회의 폭력 수준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극기훈련에 대한 단상>

    엊그제 사설 해병대 캠프에 참여했던 청소년 5명이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정신력과 체력을 키우는 명분으로 여학생들까지 군대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이 열풍에 맞춰 폭력적인 군사문화에 젖은 기성세대들은 캠프 프로그램이 위험하게 보여도 극복해야할 위험 정도로 생각한다. 내무반에서 두들겨 맞고 맞은 만큼 팼고 남의 것을 훔쳐서 군대생활을 한 것을 자랑스럽게 자녀들에게 얘기한다. 군사문화의 잔재로 사라졌던 ‘극기훈련’이 트렌드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개인들에게 (입시 경쟁의 청소년, 취업경쟁 등) 경쟁에서 이기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 개인들에게 관계의 중심 즉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라고 하지만 특별히 자원도 없고 개성도 없이 타인과 다를 바 없는 단자(monad) 같은 존재가 어떻게 위쪽에 가겠는가? 오히려 자원이 없을 바에야 개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상위로 가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관계에서 상위에 위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 웃긴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극기훈련’이다.

    기업이나 기관에서 ‘강한 인재’로 키우려고 하는 그런 인재는 사실은 말 잘 듣는 수동적인 단자 같은 인간이다. 그것을 위해 ‘해병대 캠프’, ‘국토대장정’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극기훈련을 자기계발이나 ‘힐링’으로 포장하고 강요하지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힐링이고 자기계발인가?

    학원에서 이미 다 배워서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내신 점수만 따는 공간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러니 무너진 생활교육을 하청 줄 기능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극기훈련 캠프인 것이다. 관계를 통한 소통이 아니라 강요와 폭력을 통해 수동적 인간화, 서열화 이것이 극기훈련인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려 하지만 결국 그러한 행위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서 자아 정체성의 구성 목록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시대적으로 체력, 인내, 용기 등만을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머리가 빈 무지한 바보 어른들 탓에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어린 청춘들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다섯 청춘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회에 계속)

    필자소개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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