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여자 1호 이야기
    미 방첩대 '여성 노인 어린이' 경계
    [정지된 역사] 여자이야기 2부
        2013년 05월 15일 11: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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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된 역사…여자이야기 1부 기사 링크

    “Woman should be seen not heard.” – Syng man RHEE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 – MB RHEE

    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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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위) 연합군에 투항한 독일군 병사. 이 병사는 같은 독일군으로부터 탈영병으로 발각될까 두려워, 혹은 독일군을 노리던 레지스탕스의 목표물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파시즘, 독재, 인종주의의 냄새를 풍기던 독일군복을 벗고 여장을 했다. 1944년 프랑스 모처에서 촬영 (NARA 소장)

    (아래) 청와대로 복귀한 “강한 남자의 따님”의 ‘숨막히는 옆태’. 이 분께서는 독재자의 ‘딸’임을 애써 숨기지는 않았다. 대신 파시즘, 독재, 정적에 대한 잔인한 탄압과 같은 인상을 털어내기 위해, ‘조실부모한 맏딸’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드러난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자애롭지도 온화하지도 인성이 곱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어떨 땐 그 누구보다 표독스러웠으며, 특히 정적에 대해서는 찬바람이 씽씽 불 정도로 매몰찼다. 언론에 노출된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남자관계(?)는 법률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지금의 기준으로는 욕먹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비껴가는 노하우가 있었다. 여성스럽게 쪽지은 머리, 조신한 말투, 한복 혹은 나풀거리는 롱스커트, 아주 가끔 본성을 드러내는 ‘매의 눈’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지만 언제나 온화한 엄마미소 짓기 등등의 코스프레를 통해, 자신에 대해 쏟아지는 떨떠름한 시선을 왜곡시키려는 연출자들의 의도를 아주 잘 충족시킨 것 같다. 우리 현대사에서 여성이란 것이 거의 대부분 핸디캡이었지만, 이 인물에 있어서만큼은 예외였다. 우리 국모님의 이야기다.

    한 30여년쯤 후에 발행될 ‘(경기도 공무원 교재용) 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책의 많은 부분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할당될 것은 분명하겠지만, 책의 맨 첫머리는 한때 ‘호주댁’으로 불렸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에게 예약되어 있을 것이다.

    돌싱의 외로움을 달래려 스위스에 잘못 놀러갔다가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와 동갑이던(낼 모레가 환갑인) 이승만에게 홀라당 넘어갔던, 아~ 오스트리아의 철없던 여자1호 . . . 독립을 구강운동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고 자신할만큼 악력(顎力) 하나는 오지게 끝내주셨던 우리의 국조께서 백안의 오지리 미녀를 상대로 벌이신 이 2박 3일 간의 ‘제네바협상’은, 그의 뒤를 이을 수많은 제비.. 아니 독신남들에게 타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모든 국모들이 억지로라도 한복을 입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퍼스트 퍼스트 레이디’의 이야기를 현대사와 여성이란 주제에서 빼놓으면 섭하지.

    이승만이 스물 여섯 연하의 유태계 오스트리아 이혼녀를 헌팅. . . . 아니 꼬신지 일년만에 결혼식을 올리러 뉴욕을 향할 때 프란체스카는 적이 불안했다. 인종적 혹은 민족공동체의 순결성이 흔히 강조되는 독립운동계에서, 그것도 한때 임시정부의 대통령에까지 올랐던 ‘독립운동의 상징’께서 백안의 이방인 처녀, 아니 이혼녀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충분히 알레르기 반응을 불러일으킬만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와이로 돌아갈 때 교민들의 동요는 더 심했다. 하와이 교민대표가 꼭 “혼자만 오시라”고 전보까지 보내기도 했다. 한데 이승만의 첫 부인이 아직 이혼절차도 없이 조선에 살아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진 않았을텐데, 그 누구도 ‘이중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것 같지는 않다. 백인 아내를 맞아들이는 건 불만이었지만, 남편의 생사도 모른채 별다른 법률적 절차도 없이 사실상 일방적 이혼통보를 당한 본부인과의 ‘의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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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위) 1904년 11월, 한성감옥에서 출소한 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이승만. 오른쪽의 여인이 결혼과 함께 씨만 뿌리고 하릴없이 감옥과 외국으로만 쏘다니던 남편을 대신해서, 옥바라지와 까다로운 시아버지 봉양, 그리고 병약했던 아들(모자쓴 아이)의 육아를 책임져야 했다. 박씨부인의 이 교과서적인 시집살이에 대한 대가는? 삼십년 넘게 기다렸는데 파란 눈의 여인과 함께 돌아와서는 면회도 안받아줬다.(사진출처 : ‘대통령 이승만’)

    (아래) 1935년 1월 24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하와이로 돌아왔다. 이때만해도 아직 한복이나 쪽진 머리와는 거리가 먼, 아직 ‘오스트리아녀’ 프란체스카일 때다. 교민사회가 잠시 술렁이긴 했지만, 프란체스카는 적어도 겉으로는 한인사회에 잘 동화되어 갔다.

    영혼의 찰떡궁합

    친구들 앞에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소개시키는 자리는 늘 긴장된다. 잘 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입방아가 끊이질 않게 마련이니. 이승만은 처음 두 번의 관문(1934년 뉴욕 결혼식과 1935년 하와이 귀환)은 베짱좋게 잘 통과했다. 뉴욕이나 하와이는 말 그대로 다문화 사회의 중심이요 ‘인종의 용광로’ 아니던가? 백인과의 ‘이중혼’ 따위의 문제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데 1945년 10월 14일 귀국길은 좀 달랐다. 태평양방면 미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내준 귀국특별기에 프란체스카의 좌석은 없었다. 국무부와 맥아더 사령부에서 프란체스카의 귀국을 막았다는 기록은 아직 보고된 바 없다. 혹시 공항에 박씨부인이 흥신소 직원들을 대동하고 기습이라도 할까봐 그랬나? 모름지기 간통고발에는 현장급습이 필수이긴 한데 . . . 아, 이때는 아직 남성간통죄 같은 것은 없을 때지 참. . . 그러니 뭐 아무리 용의주도한 이승만이라곤 해도 아직 법적으로 아내였던 박씨 부인을 경계하여 홀몸으로 귀국한 건 아닐테다. 이 사소한(?) 문제에 대해 누가 특별히 코멘트해 놓은 것이 없으니 맘대로 짐작할밖에.

    해방공간에서 가장 잘 들어맞던 법칙을 한 가지 꼽자면 그건 바로 “선착순”일텐데,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이 그에 해당된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내일 당장 찾아올 것 같던 ‘해방’ 대신에 점령군대가 입성하면서 유예되었던 독립, 해방의 상징은 러쉬를 이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귀국이었다.

    이들 가운데 귀국급행열차, 급행선, 급행기에 가장 먼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도움을 얻은 이승만과 하바로브스크의 소련군과 함께 주둔하고 있던 김일성이었다. 많은 동포들은 나름대로 독립 영웅들의 모습을 상상 속에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상해와 하와이에서 또는 뉴욕에서 그 정신적 고독과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민족 재생의 일념”으로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전념했던, ‘독립운동계의 고독한 수도승’ 이승만이 새파란 백인 여성의 팔짱을 끼고 트랩에서 내리는 모습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그림임에는 분명하다. “백발과 흰 수염 그리고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신화만 주워들었던 평양시민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사람은 ‘간달프’였지만, 정작 모습을 드러냈던 사람은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듯한 짧은 머리의 청년 김일성이었다.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반북 레파토리, 즉 ‘가짜 김일성론’에는 이 ‘비쥬얼 쇼크’가 적지않은 역할을 했고, 이승만 역시 그런 반향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라는 독립운동은 안하고. . . .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데 . . . 뭐 이런 수근거림말이지. 아무튼 프란체스카는 이듬해인 1946년 2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던 무렵 조용히 귀국했고, 이후 돈암장 외부에도 또 신문지상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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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1945년 10월 20일 연합군환영대회장의 이승만과 아놀드 군정장관” (NARA 소장)

    (아래)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환영 평양시민대회 당시 김일성과 소련 제25군 매클레르 중좌. (사진출처 :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가슴에 달린 훈장을 매만지고 있는 사람은 소련군 제25군 산하 정치 7부 부장이었다. 그의 임무는 현지 정세파악과 김일성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김일성장군환영대회’라고 부르는 이날 집회에 김일성은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수여한 이 훈장을 달고 나왔지만, 현재 북한의 공식 역사서의 사진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승만이 귀국 당시 프란체스카를 대동하지 않았고 또 한동안 부인을 돈암장에만 숨겨놓은 것과 비슷한 의도였을 것이다.

    비록 세대와 인종 그리고 문화의 거리가 멀고도 멀었지만,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전생의 부부였던 것처럼 죽이 잘 맞았다. 오스트리아에도 삼강오륜과 칠거지악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 받아서는 안된다”는 프란체스카 친정의 교육 덕택에 ‘아내 프란체스카’는 “여자는 말이 많아서는 안된다(Women should be….)”는 이승만의 여성관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이 뭐 껍데기만 서양여자지 신사임당의 재림이요, 육영수의 사표였다.

    환갑이 넘어서도 구멍 난 양말뒤축을 직접 꿰매 신으시고, 한복입기와 김치담그기가 취미생활이며, 남편이 하는 일에는 일언반구 댓거리 하지 않는 그런 교과서에 나오는 아내. 프란체스카가 남겨놓은 서너편의 글에서 이런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자필 회고이기는 하지만, 이런 모습이 그다지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말년의 프란체스카가 남긴 많은 사진들은 그같은 현모양처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찰떡궁합은 이런 ‘아름다운 부부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부부이기에 앞서 환상적인 동지였다. 특히 정적, 그것이 공산주의자가 되었건 온건좌파이건 중도파건 혹은 우파건 그리고 심지어 미국이건 간에, 자신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는 모두 격렬하게 비난했다. 다만 프란체스카는 특무대, 경찰,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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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1972년 한 행사장에서 인자한 아내가 강한 남자의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위). 박정희와 이승만은 모두 전처와 이혼절차를 밟지 않고 다른 여자와 결혼(혹은 사실혼 관계)했다는 점에서 ‘당대 남성의 모범’이었다. 여성잡지 ‘여원’과 조선일보사의 공동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펄 벅 여사가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아래. 출처는 모두 보도연감).

    1947년 한국의 전통무용가가 미국의 한 TV쇼에 출연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프란체스카는 오로지 “TV 출연을 후원한 인물이 펄 벅 여사”라는 이유만으로 불쾌하게 생각했다. 펄 벅은 해방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을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 참전국이던 프랑스신문에 반전칼럼을 기고하여 미 정보당국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런 그녀의 행동으로 FBI의 편지검열리스트에 그녀는 오랜 동안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똑같이 미정보기관 편지검열의 피해자였지만 프란체스카가 펄 벅을 동지라기보다 적으로 생각한 듯하다. “중국에 있던 시절부터 한국을 너무나도 방문하고 싶던” 펄벅여사가 이승만 부처가 쫓겨나듯 망명한 다음에야 찾을 수 있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겨우 서른 남짓이었을 무렵에 “한민족의 미덕은 양순함”에 있다며 그저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이승만의 여자답게, 프란체스카 역시 “그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인민들(people)에게 이념은 좋지 않다”며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정치의 주인공, 국민’에게 그저 지도자의 뒤만 따라올 것을 훈계했다.

    미군정 당국자조차 “일본경찰 출신이 다수라는 점과 미곡수집에서 경찰이 보인 강압적 태도가 폭동의 주요 원인”이라 꼽던 남한경찰의 공안탄압에 대한 반응도 걸작이다. “경찰이 빨갱이를 잡아들이면 무엇하나요? 군정이 그들을 모두 석방시켜버리는 걸”이라며, 오히려 미군정의 인권행정(물론 미군정의 대좌익정책은 ‘인권’이나 ‘공정’같은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을 원망한다.

    프란체스카가 이런 한탄을 할 무렵, 서대문 형무소의 정치범의 수는 일제말 총독부가 세워놓은 재소자 기록을 연일 경신중에 있었다. 좌우와 남북의 갈등이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모두가 우려”하던 시절의 거의 유일한 통합운동이던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김규식이건 하지건 그 누가 되었건 한국인들의 합작을 주장하는 이들은 반역자(traitor)”라고 맹비난하며, 철로 위를 향해 달리던 충돌 직전의 두 열차를 세우기보다 석탄을 들이 붓던 여자였다.

    어디 이 뿐이랴? 돈암장 깊은 곳에 숨어있던 프란체스카는 경무대로 옮겨가면서 보다 노골적으로 국정 개입(?)에 착수했다. 프란체스카는 국회프락치사건과 관련하여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6명의 국회의원을 구속했다는 대검의 발표가 있기도 전에 이미 관련자들의 체포 계획을 알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승만의 정적제거쑈에 불과했던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한 코멘트도 4.19 데모대를 향해 “크렘린의 조종을 받는 공산분자들”이라고 일갈하던 이승만과 크게 다르지 않다.

    500명의 군사고문단의 철수와 관련하여 60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했어요. 이같은 행위는 우리나라의 국방계획에 대한 분명한 도전행위입니다. 북한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국회부의장이 이 모든 행동의 리더입니다. 아마 국회 전체에 대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게 될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체포가 있은 이후에 국회가 정신을 차렸어요. 현재까지로만 보면 이제야 그들이 정치만이 아닌 그들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1949.6.21)

    국회에 파국이 닥칠 것이라는 그녀의 경고가 집행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소장파’라는 이름으로 ‘남북통일 결의안’등을 제출하면서 “결국 내전이 발생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국회의원 15명이 체포되면서, 우리의 제헌국회는 좌초하고 말았다.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 관저를 물색하는 것처럼 “여자의 손이 필요한 일”에 관계했던 정도는 시비거리도 아니다.

    장면은 이승만 부부의 워싱턴 현지 에이전트였던 올리버 부부를 통해 전달되던 프란체스카의 ‘사적인 훈령’을 처리하느라 적잖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

    임병직의 귀국이 늦어지자 “외무장관에 (임병직 말고) 다른 사람이 임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를 껄”이라고 큰 소리 치는 장면이나, 꼴뵈기 싫은 중도파 김규식계 사람이던 기획처장을 기어코 경질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신상정보를 줄 때까지 발표하지 말 것”이라고 했는데 공보부 사람들이 “내게 알리지도 않고(without my knowing it) 발표”했다며 역정을 내는 대목에서는 신사임당이 아니라 미실의 환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은 그녀의 외침대로 “나는 거의 한손만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다”고 외치는 모습에서는 장판교상의 장비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 무엇이 되었건 간에 경무대 담장 너머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프란체스카의 본모습은, 백발에 비녀 꽂고 맘씨 좋은 미소를 날리시던 말년의 ‘이화장 할머니’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사족이긴 하지만, 비록 남편을 잘못만나 외곬수가 되었지만 그래도 천성이 탐욕스럽고 오만방자하던 그런 여성과는 격이 달랐던 점은 인정해야겠다.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하고 대통령직에 오른 남편과 듀엣을 이뤄 시민들 상대로 삥을 뜯기 바빴던, 그렇게 챙긴 돈의 일부를 토해내면서도 못내 아깝고도 억울해하던 그런 부류의 “턱이 길어 슬펐던” 어떤 아지매하고 비교한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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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피난지 대구의 관사에서 대통령 영부인의 모습. 1951년 11월 5일” (NARA 소장) 전쟁통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촬영을 위해 한복을 잊지 않고 챙겨입은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한복에 대한 예찬론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매일 매일 입는 것은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고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래)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 유배길에 오르고 있는 전두환·이순자 부부. “경제사범이 많은 것은 한번 해먹고 재산을 은닉한 뒤 몇 년 교도소에서 살다오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안철수 의원의 발언이 다시 떠오르는 장면이다. 안의원은 저 말 뒤에 뭔가 더 살벌한 이야기를 보탠 듯도 한데, 돈 때문에 사람 목숨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필자의 소신상 인용은 생략했다.

    진부하지만 끈질긴 이야기

    프란체스카 할머니의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 모습의 괴리를 감안해보면, 지난회에서 보았던 사로잡힌 여군포로가 머리를 밀렸던 것은 그녀로부터 여성성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시너드 오코너나 리아같은 빡빡머리 여가수는 절대 군 위문공연에 초대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녀들로부터 무언가 여성적인 것을 제외할 때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그녀들의 실체, 본질, 적나라한 모습에 주목한 것은 바로 우리의 방첩기관들이었다. ‘여성 코스프레’에 대해 방첩기관이 특별히 주목해 왔다는 것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붉은 마타하리적 존재”는 아마 대공업무 종사자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용어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여기엔 국경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방첩대가 특별히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지목했던 세 부류 가운데 단연 주목을 받았던 것도 바로 여성이었다.(나머지 둘은 “노인과 어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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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 “20세, 부산의 여학생이자 공산주의 지도자인 한 여성이 국군 수도사단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이 여성은 전쟁발발 이전부터 공산주의자였다. 1951년 12월 13일” (NARA 소장)

    (아래) :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유엔의 방어선을 침투하려던 북한여성을 미보병 제40사단 잭 패트리 소위와 한국 통역관이 심문하고 있다. 1952년 4월 12일” (NARA 소장) 위쪽 사진 속의 여성과 비슷한 나이에 북한여군으로 포로가 되었던 류춘도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지 얼마 안되어 ‘묘령의 여간첩단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모두 17명의 ‘여간첩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류춘도와 서울에서 함께 공부했던 고아 출신의 친구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저 “무시무시한 고문”이라고만 설명했던 류춘도와 달리, 점령과 전쟁기간 동안 한국 정보기관의 고문방식에 대한 인상적인 설명은 그들과 긴밀하게 협력했던 미군들이 잘 기록했다.

    북한당국이 평양의 최승희 무용학원 졸업자들 가운데 미모가 뛰어난 40인을 선발하여 피난민으로 가장시켜 남쪽으로 침투시키려 한다는 한국경찰의 보고가 접수되었다. . . .이들은 특히 뛰어난 외모를 기준으로 선발했는데, 남한 부대에 매춘부로 침투하여 군인들로부터 첩보를 수집하려는 목적이다.

    믿을만한 첩보에 따르면 북한정부가 약 500여명에 달하는 젋은 여성 간첩요원들을 남한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한다. 선발된 모든 여성은 적어도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갖추었으며, 각종 간첩활동에 관한 3달 간의 훈련코스를 거쳐야 한다. 이들은 통상 미군들과의 교제를 활용하여 남한당국의 수사를 피하려고 한다. 이 그룹의 상당수는 유엔군 댄스홀이나 매음굴에 취업하고 있다.

    현재 남한 내의 게릴라는 모두 35,000 정도 규모다. 이 가운데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여성 약 5천명은 유엔 후방에 매춘부 등으로 투입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한 휴전회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전쟁이 막 1년을 넘어설 무렵 미 방첩대(CIC)가 작성한 첩보보고서에는 “미모의 간첩” 스토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휴전회담장 너머로 매일 300회 이상 출격하던 미공군의 폭격에 맞서, 공산측이 내놓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저런 여성의 탈을 뒤집어쓴 “간첩”들이란 건데 . . . 뭐 북한당국의 요원선발기준이 “박색의 여성일수록 서비스가 좋다”는 그분의 ‘통찰’과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린다.

    어쨌건 전쟁당시 미군 CIC는 특정한 여성의 징후를 통해 간첩을 색출하고자 했다. “젊고(young)”, “고학력이며(well educated)”, “미모를 갖춘(beautiful)”, “춤 잘추는(good at dance)”이라. . . 이거 SM 엔터테인먼트 오디션 요강에서 본 듯도 한데. . . 아무튼 간첩학교 입교조건으로 꽤 까다로운 셈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첩보를 미군 당국에 제공했던 것이 대부분 남한경찰의 정보계통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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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위) “해병대의 바커스 상병이 인천 럭키스트라이크 클럽에서 한국 여성과 춤을 추고 있다. 1952년 7월 30일” (NARA 소장)

    (아래) “부산의 미군부대 담장 바로 옆에 있던 매음굴(house of ill repute) 내부. 작은 방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철거되었음. 1952년 5월 17일” (NARA 소장) 1951년 7월, 피난 국회에서는 ‘전시생활개선법안’이라 이름 붙여진, 소위 접객업소의 접대부 고용금지 법안을 토의했다. 논란은 “외국인 접대에 관하여 필요한 때에는 특례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할지 여부를 두고 일어났다. 결국 이 조항은 삭제되었지만 “대통령이 필요에 따라 예외를 둘 수 있다”는 구절을 살려두면서 폐지된 조항의 실효를 도모했다. 자신들을 위해 ‘여성접대부’를 합법화 할 수도 있다는 이 과도한 호의(?)를 미군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특히 미군들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특별한(?) 자질을 가진 여성들을 북한이 훈련시키고 있다는 첩보를 동시에 알고 있던 미군 첩보장교들이 들었으면 말이다? 뭐 ‘이 나라는 원래 그런가부지, 빨갱이고 파랭이고 간에. . . .’라고 생각했겠지. 미국인들을 상대할 때에 이 특별한 형이하학이 효과적이라는 신념은 그 뒤로도 꽤 오래 지속되었다. 미국의 소비자를 위해 내놓은 월드 스타 싸이의 신곡 뮤직비디오도 아마 그런 부류에 속하지 싶다.

    ‘유엔마담’, ‘양공주’라는 신조어들이 나돌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미군의 ‘요시찰 대상’에 포함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미군 CIC가 “후방에 투입된 매춘부를 위장한 여성간첩”을 5천명으로 추산한 것은 1951년 8월 무렵이었고, 학자들이 1952년 경 유엔마담의 숫자가 대략 2만 5천명 정도 된다고 추정하고 있으니, 어림잡아 계산해도 매춘 여성 다섯명 가운데 하나는 “붉은 마타하리적 존재”에 해당하는 셈이다.

    지난회에도 잠시 나왔지만 유엔마담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던 여성들 가운데는 전장에서 희생된 미망인들도 적지 않았다. 가족을 잃거나 보살펴줄 친인척이 없는 고아가 택할 수 있는 많지 않았던 선택 가운데 하나가 ‘양공주’였다.

    사회적인, 관습적인, 생물학적인 그리고 또 인종적 차별구조에 놓여있던 이들에게 이제 이념적인 억압 하나가 더 얹어졌다. 코너에 몰린 이들은 대개의 경우 특별한 항변의 기회도 또 지원해줄 사람도 갖지 못한채, 막무가내의 무고와 고문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잠시 등장한 류춘도가 목격한 여성이 그랬고, 김수임도 잊어서는 안된다.

    여성이 분명한 피해자인 사건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여성일 수밖에 없는 성범죄에 대한 통계나 자료가 유난히 빈약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을축대홍수에 쓸려간 가축에 대한 통계가 실종된 사람에 대한 통계보다 더 정확”했다는 미군정 군사관의 촌평이나, “오랜 동양의 전통으로 인해 휴머니즘에 반하는 인명의 경시라는 주제는 아시아 지역의 인민들에게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며 중공측의 세균전 공세에 특별히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비웃던 워싱턴의 미군 고위 관리들은 우리의 ‘기록부실’을 탓할 자격이 별로 없다.

    1945년 9월 8일 이래로 남한에 깊이 개입했던 그들 역시 여성에 대한 기록이나 관리에 소홀했던 것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1952년 1월의 첫 두주일 동안 남한의 청년단체를 경무장시키기 위해서 이승만 정부가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 미군 M-1 소총이 무려 12,554정”이라며, 한자리수 단위까지 세세하게 기록해놓았던 이들은 남한 점령 3년과 한국전쟁 기간동안 미군이 가해자인 성범죄가 과연 몇 건이나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주한미군 헌병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단속해야 할 사건들이었다. 이 인종주의, 섹슈얼, 이데올로기, 첩보전 등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발생한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김수임 간첩사건이었다. ‘궁만튀’(리비도를 주체하지 못하는 철없는 십대들이 길가는 아무 여성이나 골라 가슴을 만지고 튀는 행위를 ‘슴만튀’라 부르며 범죄를 놀이화시키는 용어에서 파생되었다. 정확히 2013년 5월 8일부로 만들어졌다. )라는 기상천외한 행위로 우리 현대사의 대표남성 명단에 이름을 올리신 어떤 분과 비슷하게, 김수임 체포 이틀 전에 황급히 미국으로 튀었던 베어드 대령은 다름 아닌 헌병대 사령관이었다. <‘여자이야기 3부’에서 계속>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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