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그 잔혹사
[정지된 역사] 여자이야기-1
    2013년 04월 24일 05:41 오후

Print Friendly

고1

고2

사진 설명 : (위) 1950년 8월 29일, 남한의 한 여학생이 부두에서 Unicorn호의 접안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항.(NARA 소장) (아래) 10.26 사건 관련 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다음 귀가하는 “그때 그 여인들” (보도사진 100선)

어떤 연예전문 사진기자의 별명이 “숨막히는 뒤태”라고 붙은 이유는 전적으로 그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들의 제목 덕택에 붙여진 것이다. 뭐 그 사진기자로 하여금 호흡곤란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과 원인은 다를지언정, 현대사를 담고 있는 사진속의 여성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필자가 딱히 여성문제에 조예가 깊은 것도 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도 주로 남성들이었기에 그들이 주목한 ‘여성’이란 주제를 또 피할 수는 없겠다. 이번 회에는 그와 관련된 사진들을 몇 컷 살펴보도록 하겠다.

울부짖는 여성들

크고 작은 전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전쟁이 초래하는 무수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장면은 싸늘한 남성들의 주검과 그 옆에서 서거나 앉아 통곡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인민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사건’의 대표격인 ‘함흥대학살’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함흥, 원산, 흥남, 평양 등지에서 적게는 수 천명에서 많게는 “수 십만명”까지 즉결처형을 했다는 사실은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에 나선 미국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선전수단’이다.

특히 38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던 워싱턴의 입장에서는 북한정권의 ‘야만성’은, 논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아리까리하던 38선 북진에 대한 훌륭한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불과 1950년 7월 말까지만 해도 국무부의 전문가들은 “38선 이북에 대한 유엔군 군사작전에는 새로운 안전보장이사회 결정이 필요하지만 그 결정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며, 38선 북쪽은 쳐다보지도 말 것을 권고하던 차였다.

그럴싸한 명분도 없었으며, 게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한반도는 미국의 “안보가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지역”도 아니었을 뿐더러 38선이 남쪽으로 위협받았을 때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북진으로 위협받을 경우 “중공과 소련과의 갈등”은 불보듯 뻔했으니.

고3

고4

사진설명 : (위) “1950년 10월 19일, 함흥. 약 300명의 정치범 죄수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이들은 산채로 매장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질식사한 시신들이다.” (NARA 소장) 한국전쟁 동안 공산측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사진들 가운데 하나이다.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포함하여, 교전과정에서 발생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emage)’와 달리, 가해자가 분명히 드러나는 민간인 학살은 전쟁의 쌍방 모두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훌륭한 선전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울부짖는 여성은 가해자의 잔혹성과 비윤리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아래) “독소전 당시 독일군에 학살당한 시신들 속에서 아들을 찾은 한 어머니가 울부짖고 있다. 1942년 4월 4일, 우크라이나의 Kerch 인근.” (NARA 소장)

한국전쟁에 대해서 유엔이 내린 세 가지의 중요한 결정, 즉 6월 25일의 “38선 침범은 침략행위이니, 즉각 38선 너머로 퇴각하고 이를 존중할 것”, 6월 27일의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그리고 10월 4일의 38선 북진 결정은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모순이 존재한다. 예의 그 “니가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 논리”가 여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어쨌거나 공산측의 38선 침범은 침략행위였지만, 유엔측의 38선 북진이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쪽의 정부가 반윤리적이고 반민주적이라는 ‘필요조건’이 필요했고 퇴각하는 인민군들의 만행은 적절한 알리바이였다. 뭐 정치적으로 이용했거나 어쨌거나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다.

한데 비슷한 일은 유럽에서도 있었다. 독일이 소련에서 저지른 만행은 미국의 2차대전에 참전한 연합국 특히 미국의 도덕적 기반을 튼튼히 해주었다. 유태인 학살이 있기 전, 독일군은 크렘린을 향하는 도중에 숱한 민간인을 땅 속에 묻었는데,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저질러진 대규모의 학살은 1942년 봄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동토의 땅”이었기 때문에, 언 땅이 녹기 전까지는 시신을 발굴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1942년 늦봄부터 속속 드러난 나찌의 우크라이나 학살은 곧 다가올 훨씬 더 큰 재앙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연합국의 도덕적 우위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였고. 그래서 “4월 5일까지 엠바고 이후 일제보도”라는 지침까지 충실해 만들어서 활용했다.

한데 흥미롭게도 그 규모에 있어서는 히틀러의 민간인 학살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질적으로야 크게 차이가 없는 소련군의 ‘카틴 대학살’에 대한 대응은 약간 달랐다. 미소협조가 중요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소련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했던 루즈벨트는 이 사안을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냉정한 전략가는 윤리적인 문제와 외교적인 문제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거 우리 근대화의 아버지께서 한일외교정상화를 추진하실 적에 내세우신 절대명제이니, 박 대통령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로써는 가슴깊이 새겨야 할 행위준칙 가운데 하나로 삼아야 한다.

아무튼 루즈벨트에게도 당장의 군사동맹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윤리적 논란거리’를 굳이 거론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알게 된 사실 한가지, 한국전에서 민간인 학살의 신호탄은 38선 이남에서 먼저, 그리고 대대적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굳이 이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에서의 만행(war acrocities)이란 이름으로 남겨진 미군의 사진들은 대부분 1950년 10월 이후의 사진들이다. 그 전 약 석달 간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진행된 민간인 학살, 그리고 그 현장에서 울부짖던 할매와 아지매들의 모습을 미군들은 굳이 담아놓지 않았다.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쪽편의 문제는 저쪽편에서 잘 기록해두었으니 말이다.

고5

고6

사진설명 :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해방일보에 실린 유엔측의 전쟁범죄 고발 기사. 해방일보 8월 30일, 9월 9일자 기사. (NARA)

소비에트의 기계적 ‘농업집단화’가 초래한 비극을 빗댄 “(1930년대의) 대기근 동안 죽어나간 사람들의 통계보다 손실된 가축에 대한 통계가 더 정확하다”는 슬픈 농담은 남에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60년 전에 종료된 전쟁이 초래한 인명피해에 대해서 아직도 완전한 통계나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피학살자) 숫자에 대해서 학자들이나 남북한의 각 정부기관이 제출한 숫자들은, “megadeath”나 “megacorpse”라는 신조어를 낳은 20세기의 신경향에 발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기껏해야 백만 단위정도까지만 서로 맞춰놓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통계나 연구보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많은 자원이 낭비되어 왔음은 비단 한국전쟁 연구 경향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절대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또 일어날지 모를 전쟁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또 통제하기도 힘들 것이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은 피해 통계의 집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처럼 예상이 뻔한 희생자와 비극의 규모에 대한 걱정보다 “이번에도 또 니가 먼저 시작하는 거임. 이거 중요한 거고 더 중요한 건 우리보다 너네가 더 작살날 거라는 거임”이라며, 전쟁과 그로 인한 비극을 무슨 골득실차 정도로 이해하려는 분들이 아직도 계시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자리에.

그러니 저렇게 울며불며 돌아오지 않을 아들과 남편을 부르짖는 사진 속의 할매와 아지매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해 국가라는 존재가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쯤은 쉬 짐작할 만하다.

어떤 학자는 한국전쟁으로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여성의 수가 30만을 넘어갈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1952년경 정부의 “전쟁미망인에 대한 공식통계는 10만” 남짓이었고, 그나마 “1960년대부터는 2만 7천 정도의 군경미망인”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한다.

과장된 여성성과 거세된 여성성

고7

고8

사진설명 : 피난 수도 부산시청 출입구에 걸려있던 상상화(?)와 ‘종군화가단’의 작업모습 1952년 여름. 종군화가단은 국방부 정훈국에 소속되어 한국전 기간동안 삐라에 들어갈 삽화를 비롯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화가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국방부 정훈국은 동경의 유엔군사령부나 미8군 사령부 예하의 심리전 부서들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독자적인 삐라와 심리전 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이 사진을 그리고 있는 네 명의 화가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한다.

절멸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원할 이상적인 존재로 여성이 형상화되는 것은, 오랜 가부장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논개·유관순같은 토종(?) 여인들과 이 “자유의 여신” 혹은 잔다르크 같은 용병(?) 여인들을 두고 종군화가단 사이에서 작은 논란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논개나 유관순 언니가 상징하는 ‘외적의 침입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레토릭은 이미 북한이 유엔의 개입이후, 아니 1946년 이후 독점하고 있던 구호였으니 딱 맞아떨어지는 오마주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전세계의 ‘자유진영의 대표’들이 참전하고 있는 이 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후방의 선전전은 여러모로 ‘인터내셔널’한 의미를 담아야 했을 것이다.

때마침 피카소가 ‘신천대학살’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을 북한에서 보란듯이 떠들어 대고 있던 무렵이었으니, 이 살아있는 전설인 피카소의 “극심한 선전 미술”에 맞서려면 ‘미술사에 빛나는 걸작’은 못되어도 걸작의 ‘흉내’ 정도는 내야했으리. 하지만 이 민중을 이끄는 ‘대한’의 여신이 썩 좋은 패러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날 일부 뉴라이트들은 프랑스혁명조차 종북 아니 좌빨들의 ‘폭도들의 단순 폭동’이라고 결론내리는 지경이니, 프랑스혁명에 대한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뭐 당대의 미술가들이 60년 뒤에 강림할 돌연변이들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건 종군화가단은 이 전쟁이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으로 지켜내야 할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 한국적 버전의 성스러운 전쟁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독창성이 결여”된 이 모작행위에 대한 미술계 내부의 비난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림이 내걸린 시기도 여러모로 좋지 못했다. 벽화가 내걸릴 즈음 “전선의 후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장본인은 “이승만 자신”이었다는 촌평이 나온 곳은 남한을 지옥에서 건져내겠다고 사지로 뛰어든 미국의 대사관이었다.

미대사관의 불평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유엔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무색”케했던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을 지칭한 것이었다.

고9

고10

사진설명: (위) 1950년 8월경, 장소와 소속이 분명치 않은 북한여군과 동료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NARA 소장)

(아래) 1950년 11월 22일, 점령지역 시찰을 위해 함흥공항에 내리는 이승만 부처와 김현숙 소령. 꽃다발을 든 이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이다. (NARA 소장) 김현숙은 한국 여군의 아버지 아니 어머니라 불리는 여군창설의 주역이다. 1949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선무요원으로 참가한 바도 있던 김현숙은 전쟁 와중에 설치된 육군본부 여군과의 초대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여군창설과 “멸공전선”에서 보인 그녀의 뛰어난 활약을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했을터인데, 대한민국 공식 “여군참전사”의 서술자들은 “집에 돌아와서는 매우 가정적이었으며 특히 동양자수와 요리 및 고전무용에 수준급”이었다는 친절한 설명을 빼먹지 않았다.

긴 머리나 풍만한 가슴(비록 모작에서는 원작과 달리 가슴을 모두 가린 상태였지만)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전쟁은 조화되기가 쉽지 않다.

허나 전쟁은 젠더를 구분할 줄 모르는 법이다. 총에도 또 폭탄에도 눈 혹은 페르몬 감지기능 같은 것이 달려있을 리가 없다. 실제 전장의 호출에 응하면서, 그 어떤 남성들보다 전투적인 여성들도 있었다.

“비겁한 사나이는 자성하라! …. 요즈음 모병을 실시하고 있는 중대한 위란기 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겁한 남자들은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며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경향이 많은 모양인데, 이러한 남자들의 비겁한 태도에 많은 우리 여성들은 통한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1950년 8월 23일, 여자의용군 편성책임관 육군소령 김현숙 담화)

이 여성들은 데모에 나서지 않는, 아니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기 두려워하는 남성들에게 ‘거세용 가위’를 보내는 대신 자기들이 직접 참전하는 길을 택했다.

국난을 맞이하여 조국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병역기피는 강제징집이 제도화 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며 병역기피와 계급·계층 간에는 일정한 함수관계가 있다고 통계는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피부로도 잘 느끼고 있다. 한국전쟁의 병역기피와 동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1960년대 “남의 전쟁”에 강제동원된 빌 클린턴 같은 미국의 청년들에게 캐나다와 유럽에로의 도피성 유학을 알선하던 신흥 사업아이템은 일찍이 한반도에서 먼저 출현한 바 있었다. 한류 사전에 이런 것도 좀 넣어주면 좋겠는데…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치르시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미군 정보기관(CIC)에서는 “한국의 고위 공무원들의 자제 등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미군이나 유엔 등에 취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CIC 신분증을 비롯한 연합국 기관의 제증명서를 위조·변조하는 알선업체들을 단속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셔야 했다.

증명서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이면 아주 효과가 좋았고, 그 중에서도 끝내주던 끝발인 미군 CIC 소속이라면 100% 징집을 면할 수 있었다.

대전에 있던 한 업체는 아예 타이프리스트 여러 명을 고용해서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CIC 한국직원 증명서들을 찍어대기도 했다니, “전쟁은 곧 돈이다”라는 스팀슨 전쟁부 장관의 말씀은 십여년이 지난 한국전쟁 당시에도 여전히 금과옥조였던 셈이다.

전쟁을 당하고도 나 몰라라 하는 이런 “부유층” 남정네들 때문에 천 명 너머 모집되었던 여자의용군들과 그보다 더 많았던 여군간호부대원들과 여자학도병들의 존재는 더욱 빛을 발한다. 물론 명예에 항상 동반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전선에서의 위험을 꼽자면 첫 번째가 전사 혹은 부상이겠지만, 그 못지 않은 것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두려움이다.

고11

고12

사진설명 : (위) 1950년 8월 3일, 함안 부근에서 미 제29보병연대 수송팀 군인들에 의해 생포된 북한의 여성 (NARA 소장)(아래) 1989년 3월 22일, KAL 858기 폭파사건 재판정에서 흐느끼고 있는 북한공작원 마유미 (사진보도연감, 1989년)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파르라니~” 밀어버리는 징벌(?)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혹은 그것이 어떤 의미의 징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군과 아마도 통역관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국인(혹은 “Nisei”였거나)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북한 여군에게는 아마도 ‘거세’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미군들이 이 사진에 대한 설명으로 “여성 포로(woman captive)”라고 써놓지 않았다면 여군인줄도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막 육박전을 끝낸듯 얼굴 한쪽에 뭍어있는 핏자국이나 곤두선 손 등의 핏줄은 ‘戰士’의 모습 그대로다. 미 제29 보병연대원들에게 사로잡힌 이 북한여군의 소속도 이름도 그리고 사진이 촬영된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도 알 길은 없다.

1953년 8월과 9월에 진행된 포로교환 당시 맹렬히 연합국측의 포로심사에 맹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간섭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던 자원송환 북한여군의 행렬 속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미군에 대한 잔혹행위에 가담한 것이 밝혀져서 이튿날 처형”되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과 범죄행위(?)가 좀 다르긴 하지만, KAL 858 폭파사건으로 한국으로 압송된 공작원 마유미의 모습은 정반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비정규전’을 치르고 있던 남북한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던 ‘여성전투원’ 마유미가 남한 사람들에게 보여준 이미지는, 거세되었다기보다 ‘치장’된 것에 가까웠다.

여성스러운 긴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하는 머리핀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한 손수건과 같은 소품 덕택인지 모르지만, 재판이 있기 전부터 공작원 마유미에 대한 형집행 정지를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형반대론자들만큼이나 ‘그냥 남자니까!’인 경우도 많았다.

이 설명하기 너무 간단한 ‘휴머니즘의 폭발’ 현상에는 말끝마다 “숨막히는 뒤태” 운운하는 부류의 기자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뭐 안봐도 뻔한 이치 아니겠는가?

지난 2일 각신문들의 김현희에 대한 보도태도는 어느 면에서 볼 때 객관성을 잃고 있었다. (중략) 각 신문들은 무려 열한달만에 등장한 김현희를 한결같이 경쟁이라도 하듯 1면에 5단, 6단 크기의 얼굴 사진을 내세우며 시시콜콜한 그의 지난 생활 모습을 알렸다. (중략) 지난 1월 16일 조선일보는 “초췌하지만 흰 얼굴의 미인인…”, 중앙일보는 “뛰어난 미모가 특히 돋보인 김현희…”, 한국일보는 “특히 김현희는 미모와 좋은 성분…”등에서 보도한 것에서 이번에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중략) 일본의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국내에 흘러들어온 “김현희의 미모에 반한 일본 청년들이 연애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가족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등의 오락성 선정기사와 다를 바 없었다. (1988년 12월 6일자, 한겨레 신문)

(2부에 계속)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