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정신적 페니실린'?
민주정부 대상의 전쟁...'심리전'
[정지된 역사-4] 사면초가 3부
    2013년 03월 26일 12: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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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 2부 기사 참조.  3부에 이어 다음에는 사면초가 4부를 게재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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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조국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긴급하게 요구되는, 우리의 해이해진 정신상태에 걸맞는 ‘정신적인 페니실린’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미 육군 정보참모장, W.G. Wyman 1946년 1월 12일)

“심리전이라는 용어가 일반화 되었지만 공개적인 적대행위가 없는 상황에서, 혹은 민주적인 정부와 국민들을 상대로 언제든지 적용될 수 있는 활동에 대해서 “교전수단(warfare)”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중략) 그래서 우리는 ‘심리작전(Psychological Operation)’이라고 쓰기로 했다.” (‘전략심리작전과 미국의 정책’)

OSS의 후예들과 전후 유럽의 심리전

정보조정국(COI)의 발족, 즉 정보의 수집-분석 업무와 심리전을 처음부터 통합된 전쟁부처로 출발했던 것이 일종의 원죄였을까? 그 후로도 이 두 업무, 즉 정보활동과 심리전(을 포함한 비정규전)을 통합하는 것은 거의 전통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 전통이 별 잡음없이 굳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비정규전이 가지는 특성상 의회와 여론의 통제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정보기관이 이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정책을 수행’하라고 만들어놨더니, 지들이 사실상 ‘정책을 결정’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국민의 감시나 여론은 물론이고 의회, 심지어는 행정부 내에서도 ‘고립된 섬’처럼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합의된 ‘국가 정책’의 혼선이나 일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영수증이 필요없는 예산의 집행”으로 상징되는 정보기관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미덕이 되기까지 했다. 그런 상하무시, 안하무인 이런 무대뽀 스타일을 ‘도노반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노반은 “소련정보는 캐고 다니지 마라”는 FDR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OSS 내에 소련관련 첩보수집을 전담하는 팀을 꾸리기도 했는데, 그 책임자는 CIA의 비밀작전부서의 초대 책임자가 되는 프랭크 와이즈너란 인물이었다.

이 무렵이 1944년 말이었으니, “도노반은 1944년 말부터 개인적으로는 이미 냉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런 개인들은 도노반 말고도 더 있었으며, 그 작은(?) 정성 하나하나가 모여 ‘냉전’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조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세계 각지의 “조숙한 냉전의 전사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건국 시조께서도 이름을 올려놓으셨으며, 남한의 미군 정보기관도 매우 중요한 배역을 수행했다.

요약하자면, 국가적 안보라는 이름으로 여론과 정책적 감시로부터 벗어나 있는 정보기관은 실천활동을 통해서 사실상 국가의 정책을 전환시키거나 변질시키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기구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실제 1944년에서 1950년 사이 냉전을 선도했던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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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북핵문제로 한창 시끄럽던 1994년 1월 18일 한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줄로만 알았던 제임스 울시 CIA 국장이 한겨레 카메라기자를 보고 기분나쁜 표정을 짓고 있다. 기자들의 정보력에 가끔 놀랄 때가 있는데 이 사진을 촬영한 한겨레의 기자가 어떻게 울시의 방한 사실과 동선을 파악했는지는 수수께끼다. 정보기관으로서는 보안에 실패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는데, 더더구나 이처럼 수장의 극비여행이 신문에 보도된 것은 시말서 감이었으리라. 제임스 울시는 최근 낙마한 장관 후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다시 공개되면서 한국에서만 두 번 물을 잡수셨다.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사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 이것은 미육군의 정보 책임자였던 와이먼의 표현처럼 일종의 “정신적인 페니실린”을 요하는 그런 종류의 ‘비정규전’을 의미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이 ‘반공 페니실린’을 손에 쥔 사이비 의사들이 차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크게 두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한국전쟁에서 그 위력을 선보인 바 있는 군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CIA였다. 한데 OSS가 보유하고 있던 이 주특기를 군부와 행정부가 각기 전달받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각기 도노반의 절친과 부관 출신이던 맥클로이(전쟁부 차관보)와 매그루더(전쟁부 정보참모장)였다.

OSS의 자산이 공중분해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던 맥클로이는 전쟁부의 정보통이던 매그루더에게 OSS의 자산을 이어받아 전략정보대(SSU, Strategic Services Unit)를 담당하게 했다. 전략정보대는 중앙정보단(CIG, Central Intelligence Group)을 거쳐 1947년 CIA로 이어지는 기관인데, 1945~1947년 이 CIA의 전신인 두 기관은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물론 “억울한 시체”는 제법 남겼놓았지만) 비밀리에 대소심리전과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매그루더는 미 군부 내에 심리전 전담부서를 완성하는 데에도 일조를 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심리전 이야기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은 SSU와 CIG의 활동을 보자.

OSS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는 정보활동의 베테랑 매그루더는 새롭게 편성된 전략정보대 내부에 심리전과 특수작전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는데, 간판만 바꿔 달았을 뿐 그 인원과 편제는 OSS의 것을 그대로 흡수했다.

이들은 냉전이 아직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있던” 1945년 6월에서 이듬해 12월까지 런던, 파리, 로마, 비엔나, 그리스, 카이로, 중경, 캘커타, 뉴델리, 랭군 등지에서 공산주의와 사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협력했다. “크렘린을 싫어하는 공산주의자들까지 포함해서, 열쇠따기범, 위조지폐범, 납치협박범”에 이르기까지.

이 무렵 스위스의 안가에서 유럽의 ‘비밀작전’을 지휘하던 알렌 덜레스(몇 년 뒤 CIA 국장이 된다)의 말처럼 “나치당원들을 일부 끌어들이지 않고는 절대로 기차를 달리게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 약간의 변명을 해줄지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이들과 전혀 계통을 달리하던 남한의 ‘조숙한 냉전주의자들’과 하는 행동이 거의 빼다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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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48년 4월, 파리의 버팔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프랑스 공산당의 한 집회 장면. 깃발을 든 인물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강경한 군사주의자로 유명했던 안드레 마티(Andre Marty)”라는 인물이고, 단상의 여성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이 1945년 프랑스 총선에서의 공산당 약진으로 부총리에 올랐던 모리스 토레스(Maurice Thorez)다. 집회는 “소비에트 혁명의 이상을 위해 미제를 축출”하기 위한 프랑스 인민 단합대회(?)였다고 한다. 이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빵을 앞세운 미국의 원조공세(마샬플랜)를 물리치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었다. 사진출처 : NARA

SSU와 CIG 그리고 CIA의 활동 가운데 흥미로운 것들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이었다.

1945년 여름과 1946년 여름 사이, 프랑스 광산과 운수산업의 주요 노조는 대대적인 파업을 요구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목표는 프랑스의 유럽부흥계획(마샬플랜) 참여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CIG는 1946년 가을경 프랑스 공산당이 권력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고 예상했는데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당시 프랑스 노조의 위력이었다. 공산당과 노조 그리고 파업의 상관관계는 필자도 공산당원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정서적인 상관관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것은 2차대전 이후 미군이 진주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파업=공산당의 정치투쟁’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이다. 웨스트포인트에서 수학시간에 이런 등식을 가르치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안그러고서야 전세계 미국의 정치군인들의 사고가 이렇게 ‘공산당마냥’ 천편일률적으로 딱 맞아떨어질 수는 없다. 전세계의 모든 미군 정보보고서에서 Strike는 경제항목이 아닌 정치항목 혹은 ‘파괴행위’(sabotage)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아무튼 2차대전 후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왔던 노동쟁의의 배후에 마르크스나 레닌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이 문제가 노사협상 같은 것으로 풀리기는 어렵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들 냉전의 전사들은 파업과 노조의 활발한 활동을 ‘공산화의 전단계’로 이해했다.

그리고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파업을 중지시키기 위해 프랑스 노조 대표들과 기업가들을 상대로 한 매수, 뇌물 공작이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돈 가운데에는 프랑스의 공산화를 우려하는 미국 민간단체의 돈까지 세탁을 거쳐 활용되었다.

돈이 전달되는 루트 역시 OSS와 SSU가 일찍이 닦아놓았다. 프랑스 내의 미국인 사업가들 등으로 구성된 비밀네트워크 조직은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했다. 이들을 통해 언론, 상공회, 방송국, 출판사 등 기름칠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달러가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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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위) 1946년 5월 1일,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한 동경의 주민들. 이날 황궁(Imperial Palace) 광장에는 패전 이래 가장 많은 인파인 30만명이 몰려들었다. (아래) 1946년 2월 9-12일 간 베를린에서 열린 점령당국과 노동자 대표 간의 ‘파괴된 노조 재건을 위한 회의’ 장면. 연단의 배후에 엥겔스 초상이 걸려있는데 사진 오른쪽 끝부분에는 마르크스 초상도 그려져 있었다. 당시 점령당국의 일원으로 독일점령 미군사령부의 노동문제 전문가도 참석하고 있었다. 사진출처 : NARA

한데 이 반공캠페인 와중에 흥미로운 심리실험이 한 가지 진행되었다. 당시 CIG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필름 중간에 특정한 필름컷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잠재의식 속에 반공, 반소와 같은 이미지를 심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잠재의식을 이용한 광고(blipvert)’는 팝콘과 콜라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크렘린과 프랑스 노조에 대한 반감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참 뭘 저렇게까지나…’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CIG는 이 작전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네. 물론 그 근거는 1947년 프랑스 대선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연합의 정권장악을 저지했다는 것 뿐이지만.

여담이지만 얼마전 한국의 50-80년대 영화필름을 디지털화하는 작업 와중에, 저명한 국제영화제의 상까지 받았던 모 감독의 영화필름 중간에 저 블립버트 이미지가 끼어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단다. 뭐 그 무렵의 대한민국은 온 세상이 반공이미지 투성이였을텐데 새삼스럽게 잠재의식까지 신경을 쓰셨던 섬세한 권력자의 마음 씀씀이가 참 애잔하다.

아무튼 1946년 당시 파리는 “앵글로 아메리카의 모든 심리전을 실험하는 무대”였다. 최근 문화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진 바 있는 각종 잡지, 라디오 방송, 문화예술인들의 모임 등에 대한 지원과 후원까지 포함해서, ‘조숙한 냉전의 전사들’은 다가올 냉전에서 활용될 무기들을, 백악관의 주인이 “종로로 갈지, 명동으로 갈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부터 무차별적으로 현장에서 휘두르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런 현장전사들의 ‘도노반식 활동’은 정책결정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밝혀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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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살포한 삐라 가운데 하나이다. 1946년 파리지앵들을 상대로 활용된 블립버트 이미지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쇠스랑과 망치로 대변되는 이 이미지는, 1948년경 프랑스 공산당원들에게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이 표식은 죽음과 노예의 표식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앞서 이미 이 표식은 매국, 반민족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1946년경 강릉의 한 조기축구팀원 11명이 몽땅 미군 방첩대로 연행되었던 것은 이 팀의 공격전술이 ‘왼쪽’ 미드필더 중심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유니폼 상의에 그려진 ‘쇠스랑과 망치’ 문양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예닐곱 명의 노동자들이 30여명의 우익청년단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유도 저 표식을 공장 담벼락에 붙이려 했다는 이유였다.

나이키의 그 유명한 ‘갈고리 문양(Swoosh)’을 단돈 35달러만 받고 디자인해 준 한 여대생이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가담한 바 있다는 설을 근거로, 나이키의 ‘스워시’ 역시 쇠스랑을 모방한 것이라는 소문도 한때 있었다. 제대로 유통도 안된 이 악성루머의 근거지는 아마 ‘아디도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출간된 한 단행본(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에 이 삐라의 총천연색 화보가 실려있다. 사진출처 : NARA

CIA가 출범한 이후 벌어진 이탈리아 공작은 좀 더 진전되고 세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작전이 대부분 “주권 프랑스 정부에게도 비밀로 한 채 진행된” 일종의 주권침해였다면,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한 민관군, 아니 미국-캐톨릭-이탈리아 우파의 연합작전이었다.

2차 대전 종전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 가운데 하나였다. 그람시라는 이탈리아 국보급(?) 공산주의자가 남긴 유산의 덕이 한 몫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비에트 블록 외부의 유럽에서는 가장 많은 진성 당원(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성당원이란 당비를 꼬박꼬박 내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을 거느린 공산당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북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를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것도, 또 희생을 치른 것도 공산당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전후 연립정부를 리드하던 강력한 정치세력이었고, 이는 미국에게는 꽤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1948년 이태리 총선은 전후의 ‘광란’이 그대로 헌정체제로 굳어질 것인지, 그래서 남유럽 전체가 공산주의의 희생양이 될 것인지를 가늠지을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그리스와 터키가 위험한 판에 바티칸이 코 앞에 있는 이탈리아까지? 도노반의 후배들이 맹활약했다.

한데 선거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의 싸움이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걸 조달할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1947년 10월경에는 아직 CIA에 예산배정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따라서 약간의 편법이 동원되었다. 첫 번째는 직접 밀반입이었다. CIA 요원들이 직접 수송했다. 뭐 사과상자를 활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는 어차피 정부 예산으로 집행되는 건데 마샬플랜 자금이건 환율안정자금이건 간에 닥치는대로 빼돌렸다. 이 돈은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미국 상사들의 계좌를 거쳐 이탈리아의 정치인, 우파종교단체, 언론인 그리고 일부 부패한 노조간부들의 계좌에까지. 1948년 4월까지 CIA는 이렇게 조성된 자금 2천만 달러를 이태리로 공수했다.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국의 이태리계 저명인사들(유명 복서 로키 그라시아노,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엘레노어 루즈벨트 등등)의 이태리 우파를 향한 응원메시지가 담긴 VOA(미국의 소리 방송) 방송, 공산당에게 투표하면 마샬원조는 1센트도 못받을 것이라는 미국 외교관리들의 으름장, CIA가 후원하던 이태리계 신문사의 “고국에 편지보내기 캠페인(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 다 죽는다~~)”,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반공희극영화 “Ninotchka”(1939년작)가 절찬리에 재개봉되기도 했다.

당과 저명한 공산당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공산당 명의로 된 문건들이 조작되거나 날조되기도 했는데 섹스스캔들을 터트리는 역할은 오늘날 뉴데일리같은 악성 찌라시들이 전담했다. 물론 여기에는 CIA의 성금이 꼬박꼬박 입금되었다.

반파시즘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대중적 명성을 훼손시키기 위해, 서류와 문서 그리고 사건을 날조하고 거기에 섹스 스캔들까지 덧붙이는 것. 딱 1년의 시차가 나지만 조선공산당(1946년)과 이탈리아공산당(1947년)이 비슷한 수법으로 당했네.

아무튼. . . .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로마 카톨릭도 작은 배역을 맡았다. “공산당에게 투표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라며 설교하시던 이태리의 주교들 및 Pius 교황까지 끼어들어서. 한데 이 로마 카톨릭은 이로부터 한 10여년 쯤 지나면 저기 극동의 한 영감쟁이한테서 “공산주의의 배후세력”이란 핀잔을 듣기도 했다. 여호와도 냉전의 간접 피해자 중 한명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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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위) 1945년 5월 11일, 로마에서 열린 움베르토 2세의 왕정복귀 반대 집회. 로마의 Del Popolo 광장에 이탈리아 공산당을 비롯한 공화파 여섯 단체가 10여만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움베르토 2세의 왕위 즉위 이튿날 왕정복귀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아래) 1942년 4월 2일, 대독방송으로 첫 전파를 쏘아올린 미국의 소리(VOA)의 1956년경 현황을 보여주는 도표. 록키 그라씨아노,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이 전파를 타고 이탈리아로 전달되었다. VOA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대량해고 사태가 뒤따랐던 대표적인 ‘심리전 두고’ 즉, 군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한데 유럽에서 대소 심리전의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라디오 자유유럽(Radio Free Europe)이 설립되기 직전부터 다시 사세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도표가 작성될 무렵인 1950년대 중반에는 절정을 맞았다. 사진출처 : NARA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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