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선없는 전쟁인 심리전
    [정지된 역사-3] 사면초가 2부
        2013년 02월 28일 03: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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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보학 : 남산의 할아버지

    전선없는 전쟁인 이 심리전에서의 민간 역할의 중요성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마치 해방직후 ‘서북청년단’이나 ‘청년방위대(소위 청방)’ 대원들마냥 구글링과 신상털기를 통해 친북좌빨을 발본색원하려는 완장쟁이들께서 애국한답시고 설치고 다닌다.

    이런 난세에는 든든한 빽이 무엇보다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미국을 물고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안전한 투자(?)다.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의 ‘피조물’이라는 전반적인 이 글의 전제는 일종의 ‘쉴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필자도 대한민국의 아버지는 ‘미국느님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필자의 평소 생각보다는 조금 과장할 것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99.99% made in USA’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잊지말자. 특히 그것이 무시무시한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이야기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시작된다.

    히틀러 밟기

    (사진설명 : 1944년 1월 11일, 리버풀의 한 선착장에 내리고 있는 한 미군 병사. 사진에는 “미군병사들이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히틀러는 한동안 고생 좀 해야했을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유럽에 상륙하는 모든 미군들이 이 비슷한 의식을 거쳐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히틀러의 사진을 밟고 있는 저 사병(볼티모어의 Leslie Highman 병장)은 히틀러의 여러 만행들 가운데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만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태인 학살과 관련된 사진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공개된 것이다. 이래서 훈련이 필요한 법인데, 비록 밟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에 출병할 병사들은 앞서 보았던 것처럼 스탈린이라는 주적에 대해 분명한 적의를 가질 수 있었다. 사진출처 : NARA)

    미국 뉴욕

    (사진설명 : 1945년 5월 8일, 2차대전 종전일(V-E Day), 뉴욕의 한 극장에 내걸린 기록영화 ‘나치의 잔혹상’. 장사진을 이룬 뉴야커들의 표정을 보건데, 이들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임이 분명하다. 영화를 보고나면 저런 표정을 짓지 못한다.

    간판에 쓰여있는 “Official Army Signal Corps”는 이 영화가 미군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신호부대(Signal Corps)는 소련이 ‘제국주의 간섭전쟁’이라 부른 블라디보스톡 상륙작전에서부터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겪은 내외의 거의 모든 전쟁 및 평화시의 미군활동을 영상기록으로 남겨놓았는데, 유태인 학살과 관련한 많은 사진들 역시 신호부대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사진들은 엄격한 검열절차를 거쳐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상 19금 아니 한 99금쯤 되어야 할 사진들이 공개되는 데에는 특별한 정치적 고려가 필요했다.

    전장의 군인들을 전투행위가 아닌 기록활동을 위해 편성하고 또 전투부대의 거의 반보쯤 뒤에 배치하여 생생한 전쟁기록들을 남기게 한 것은 매우 영리한 판단이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유엔측이 심리전에서 활용했던 상당수의 사진들 역시 이 신호부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진출처 : NARA)

    1940년 대통령선거전에서 “여러분의 자식들 가운데 단 한명도 지금의 전쟁으로 인해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루즈벨트의 선거공약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빈말이 되어버렸다. 대공황과의 전쟁을 막 끝낸 루즈벨트는 신속하게 전시체제로의 전환을 위해서 여러 가지 기구들이 필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간 미연방정부가 가져보지 못했던 독특한 기관 즉 첩보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장준하, 김준엽 등 우리의 독립활동과 관련해서도 익히 잘 알려진 전략첩보국(OSS)가 그것이었다. 일본의 빠른 항복 때문에 무산되긴 했지만 OSS는 광복군을 활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했으며, 광복군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이 주제는 다른 곳 어디에선가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니 넘어가자.

    그 어떤 ‘육사 말석 졸업생’께서 적군과 자국 시민을 분간 못하셨던 것은 아마도 학과 공부(특히 ‘군인과 윤리’같은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축구팀 골키퍼 하시느라 바빴기 때문일테지만, 컬럼비아 대학 축구팀 ‘와이드 리시버’로 활동하며 ‘와일드 빌’이라는 별명을 얻은 윌리엄 도노번은 우수한 성적으로 법대를 마쳤다. 게다가 대공황을 거치며 다우지수가 바닥이 아니라 아예 지하 5층쯤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에 그는 이미 백만장자 변호사로 월스트리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뭐 이래서 학생은 과외활동도 중요하지만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 한다.

    아무튼 이 범상치 않은 이력의 월스트리트 변호사는 1940년 7월, 영국이 나치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비롯 유럽의 전황을 점검하라는 FDR의 특명을 받고 런던으로 향했다. 이 여행에서 보고, 듣고, 배운 ‘팩트’를 한 축으로, 공화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개입주의’(unilateral interventionism)의 지지자이자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종교적 소명의식을 또다른 축으로 삼아 그가 결론은 비밀활동을 전담할 새로운 무기였다.

    당대의 최고 물리학자들의 협업 프로그램이던 ‘맨하탄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핵무기보다 훨씬 더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거의 순전히 ‘도노반 메시’의 단독돌파에 가까웠다. 돈벌이가 보장된 로펌을 떠나 박봉(?)의 공직을 받아들인 도노반이 FDR에게 제시한 조건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포스터

    (사진설명 : ‘타임라이프 2차대전’에는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무서운 얼굴이 대학살의 피바다와 불타는 건물 위에 으스스하게 떠올라 있다. 적에 대한 증오심을 부채질하기 위해 만든 선전 포스터의 하나이다. 1942년에 뉴욕의 현대미술관 주최 포스터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한 작품이다. 전시정보국은 약 200점의 출품작을 각 공장과 공공시설 벽에 붙이게 했다.”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은 OSS의 ‘형제기관’으로 같은 아버지(COI)를 두고 있었다. OWI는 미국 내에서의 각종 선전활동, 즉 심리전을 담당한 기구였는데, 반나찌 문화선전 뿐 아니라 친소비에트 선전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2차대전.)

    “정보조정국(COI)과 관련된 활동은 오직 대통령에게만 직보한다, 의회는 물론 다른 어떤 기관의 감시로부터도 자유로운 비밀자금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정부부처들은 도노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제공해야 한다.”

    그가 내건 조건들은 보자면 이 정보조정국은 ‘중앙정보부 조직법’이라는, 법조문을 가장한 일종의 ‘통지서’에 의거 쿠데타 발발 두 달만에 출현했던 우리의 정보기관을 쏙 빼닯았다. 돈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요구사항이 ‘관료체제’에 의해 워싱턴에서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암, 그래도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인데 우리와 사정이 같아서야 쓰나.

    아무튼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이후 전략사무국(OSS)과 전시정보국(OWI)으로 이어지는 정보조정국(COI : Coordinator of Information)이었다. 이 기관의 임무는 간명했다. “병렬적인 부서들이 수집한 정보를 중앙집중화 할 수 있는 단일한 기관”을 창설하여 “모든 정보의 집배기관(clearinghouse)”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도노반의 이 프로젝트는 군부와 국무부 그리고 FBI 등의 경쟁·시기 등으로 인해 미완인 채 접어야 했지만, 저 두 개의 단어는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중앙집중’과 ‘집배기관’ 심리전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주제에서 엿볼테지만, ‘정보기관’에게 이 정보의 ‘중앙집중’ 혹은 ‘바텀업(bottom-up)’ 방식은 유일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활동 원리가 된다.

    그리고 이는, 정보기관의 수많은 촉수가 수집해 온 방대하면서도 병렬적인 그리고 다원적인 첩보들(information)이 단일한 프리즘(≒이데올로기)을 통해 마치 5천 피스짜리 퍼즐조각을 끼워맞추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찬탁친소친공=매국’, ‘반탁반소반공=애국’ 혹은 ‘종북좌빨’ ‘애국보수’ 등등으로 그려내는 저들의 귀신같은 능력을 설명해 주는 열쇠다.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그리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닦아주신 미국의 첫 번째 ‘정보기관’에는 그 출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아주 굳건한 직능이 두 가지 부여되어 있었다. 첫째는 위에도 설명된 정보의 수집 및 분석이라는 기능이요, 두 번째는 작전임무(Operation)에 관한 것이었다.

    1963년 12월 22일, 트루먼은 자신이 산파역할을 했던 CIA의 비밀작전에 대해서 힐난하는 기고문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바 있는데, 당시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이게 다~~ 댁이 대통령할 때 만들어진 전통이오!”라고 받아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거짓이다. 누구보다 CIA의 전통을 잘 알고 있던, 무엇보다 OSS 소속으로 그 자신이 “태생기 미정보기관의 비밀작전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의 주인공”이라 불리우던 덜레스가 내막을 몰랐을 리가 있나. 그냥 트루먼이 얄미워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 전통은 CIA의 전신이던 정보조정국(COI)이 첫발을 내딛던 때부터 갖고 있던 전통이었다. 정보와 작전. 이 두 상이한 활동, 앞선 첫 번재 연작글에서 1970년대 CIA 개혁논쟁 당시 분석기능을 철저하게 강조하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CIA 비판론자들이 늘 지적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정보기관이 왜 요인암살, 경제전(economic warfare), 선거지원, 여론조작, 반란진압과 같은 ‘천한 일’에 끼어들어야 하는가라는 문제 말이다.

    이 문제는 주제를 달리해서 좀 더 살펴볼 기회가 있으니, 여기에서는 한가지만 확인하고 넘어가면 된다. 즉 정보기관이 출범할 때부터 이 두 기능, 즉 데이터의 수집-분석과 같은 ‘정신노동’(물론 수집업무 자체도 스파이 활동을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이를 ‘지적인 활동’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과 비밀작전이 상징하는 ‘육체노동’이 처음부터 통합된 형태로 출범했다는 점이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고 또 국내에서의 활동을 엄격하게 제한당했기(사실 1941년 무렵에는 그럴 필요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때문에 이 비밀작전은 미국 국경선의 외부에 국한되었던 반면, 국내에서 보다 할 일이 많았던 우리의 중앙정보부는 이 비밀작전을 ‘수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꿔치기했다는 차이는 있다. 근데 뭔가 좀 트릿~하다. 전부 과거지사다. 과거지사. 김대중납치사건, 증권파동, 1963년 대선, 1980년 언론조정, 그리고 예외적이었던 몇 몇(!) 간첩단조작 사건까지.

    와일드

    (사진설명 : OSS의 창설자이자 자유진영,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에 있어서만큼은 “암 유어 파더~”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윌리엄 도노반. OSS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미군의 지휘를 받도록 형식적으로나마 합참(JCS) 산하에 배속되었지만, 사실상 군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활동에 있어서는 현지의 군으로부터 파견, 지원을 받는 체제였지만 OSS의 정책은 전적으로 도노반과 루즈벨트 등 극소수의 인물로부터 나왔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결합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보조정국 아래에는 크게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담당하는 부서(R&A), 대외선전업무를 담당한 해외공보처(FIS) 그리고 ‘비밀첩보 및 파괴활동’ 전담부서까지. 이 신생 부서에서 도노반을 도와 대독, 대일 작전을 지휘한 두 명의 보좌진이 있었다. R&A의 책임자인 하버드 사학과의 랭거 박사(Dr. William L. Langer), 그리고 FDR의 연설문을 작성하기도 했던 극작가 셔우드(Robert E. Sherwood)였다. 잘 모르긴 한데 아마 랭거 박사도 FDR의 친구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친구의 친구였지 싶다. “인사에는 등신”이었던 어떤 대통령과 인선방식이 참 많이 빼닮았다. 물론 그거 말고는 닮은 데라고는 없지만. 아무튼. . .

    선진 영국의 첩보시스템(007에 등장하는 MI 6)과 영국 육군이 자랑하던 비정규전 부대(게릴라전, 파괴, 테러 그리고 심리전 등)에 홀딱 반한 도노반이 1941년 현재 연방정부와 미군 조직에는 전혀 없었던 이 부서들을 몽창 섞어서 일종의 ‘절대반지’를 만들어 놓긴 했는데, 출발부터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서 그림설명에 나온 것처럼 셔우드는 아무리 전쟁상황이라 해도 미국이 ‘흑색선전’(Black Propaganda), 즉 “비공식적인 출처로부터 얻은 첩보를 통한 선전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셔우드는 “(선전이란) 철저히 팩트에 입각해야만 하며 궁극적으로는 진실이 널리 퍼져나가도록 해야만 한다”며 픽션만들기를 업으로 삼던 사람답지 않게 순진한 척을 했다. 때문에 “전시의 선전은 다다다다다..다..다..다..사..사.. 사기야, 사기(deception)!”라고 외치던 도노반과 같은 밥상 받기에는 여러모로 거북한 모양새였다.

    이들 둘을 친구로 두고 있던 FDR이 결국 조정에 나서서, 군사첩보 및 정보활동과 비밀작전은 도노반의 OSS에게, 그리고 정보조정국의 선전관련 부서들과 기타 연방정부 산하 공보업무를 맡은 몇몇 부서들을 통합하여 전시정보국(OWI)를 만들었던 것이다.

    새로운 부서는 극작가는 아무래도 공신력이 약하다 싶어서였는지, 유명 저널리스트이던 CBS의 엘머 데이비스(Elmer Davis) 기자를 발탁했다. 기자출신의 이 문화방…아니아니 전시정보국 국장님께서도 법인카드로 맛사지도 받으시고 명품구입도 좀 하셨나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파워와 업적만큼은 못지 않았다. 신문, 잡지, 영화, 방송, 연극, 사진에이전트 등등 당대의 미국사회가 갖고 있던 “설득의 과학”을 총동원하여 미국의 전쟁노력과 추축국의 사악함을 선전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적어도 교전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심리전이 자국 시민들(과 중립국 및 추축국 국민들까지)을 목표로 삼은, 첫 번째 공식적인 활동이자 기관이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국 미국시민들을 향한 이 “첫번째 화살”이 노리던 주과녁은 ‘반파시즘’이라는 점이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 전시정보국의 정책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고되거나 혹은 창고관리직으로 옮겨간 기자나 언론인은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포스터1

    정신대

    (사진설명 : 1942년 전시정보국(OWI)이 제작-배포한 2차대전 관련 포스터. 어떤 통계는 2차대전 기간 동안 미국 노동자들이 전시동원에서 제공한 무상노동일수를 “약 1억일”이라고 계산하기도 했다. 할배할매에서 소년소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시산업에 동원되었던 이 노동자들의 ‘자기헌신’은 전후 세계적으로 노동계급이 정치적 약진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고, 이 세계적 조류에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던 아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으로 잠시 유보해두었던 노동자들의 자기권리 요구에 대해 본토(워싱턴)와 지부(남한)의 두 미국 권력이 제시한 대응카드는 동일했다. 트루먼도 존 알 하지 주한미군사령관도 모두 탱크를 동원한다는 협박(1946년 전미탄광노조의 파업에 대해 트루먼이 주방위군의 “탱크를 동원하겠다”는 협박으로 겨우 진정시켰지만, 하지는 협박이 아니라 실천에 옮겼다. 다만 탱크가 아니라 장갑차였을 뿐)을 통해서 파업은 모두 진압되었다. 아래 사진은 1945년 10월 19일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큐슈 하카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들. 사진 설명에는 “8세에서 14세까지의 한국 소녀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 출처 : 노스웨스턴대학 디지털 도서관 (http://digital.library.northwestern.edu/), NARA)

    전시정보국이 비록 선전관련 업무를 독점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다 알다시피 음지의 전사들이 그냥 그렇게 자기들 밥그릇을 뺏길 사람들인가? 전례없는 미디어를 동원한, 일종의 ‘인셉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의회를 비롯한 여타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비판으로 이 ‘비정상적인 기구’가 종전과 함께 사라진 반면, OSS는 몇 차례의 변태를 거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냉전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노반이 의지의 사나이였다. “고분고분 말 잘듣는 대령 한트럭보다 반항심 가득한 열혈 대위 한명이 더 낫다”는 말을 밥먹듯 하면서, 여론과 공권력의 감시 따위는 아랑곳하지 말고, 자신의 소신껏 ‘공작’을 추진하는 것이 정보원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강조하던, 여러모로 우리의 정보기관이 나아가야 할 길까지 닦아놓으신 그런 큰 인물이셨다. 선전 아니 심리전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전시정보국에 일임한다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노반은 OSS에 심리전 부서를 따로 두었다. 사무실 밖에서 언뜻 보면 잘 이해안되는 명찰까지 붙여서 말이다. “Morale Opertaion”

    (계속 ‘사면초가’ 3부로 이어짐)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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