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경동에 가면
    [잡식여자의 채식기] 야채칼국수로 때운 휴가
        2013년 02월 07일 10:2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틀 휴가를 받았다.

    어제는 아들 녀석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우동 한 그릇 먹으니, 아들을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그렇게 휴가의 절반을 보냈으니, 남은 하루라도 휴가답게 보낼 수 있었으면.

    먹구름이 꼈다. 게다가 으슬으슬 추운 날씨다.

    아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으니 11시다. 사무실 밖에서의 시간은 왜 이다지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것일까?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 얼큰한 걸루다.

    아침은 먹지 못했다. 며칠 전 친정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말아준 김밥이 냉장고에 남아있었지만, 차가운 김밥은 먹기가 싫었다. 남편은 학교에 가서 채식뷔페를 먹겠다고 했다.

    휘경동에나 가야겠다. 길찾기 어플을 돌려보니,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대에서 271번 버스를 탔다. 파란 버스에 실려 내다본 회색빛의 서울이 지루했다. 충정로-광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는 지나는 내내 스맛폰에 눈을 박고 인터넷 판 뉴스를 읽었다. 뉴스는 온통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소식뿐이다. 온통 열여덟 열여덟 할 일들로 도배된 뉴스를 보고 나니, 가뜩이나 배도 고픈데, 더 기운이 빠진다. 이꼴저꼴 보기 싫어 속세를 뜨자니 남편이 숨겨놓은 천사 옷을 찾을 수 없고, 이민을 가자니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조건을 갖추는 게 더 큰일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 귀천(歸天)해서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다고나 말할까부다. 반어법으로다가.

    허기진 몸이 휘경동에 도착하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었다.

    삼육의료원 정문 옆의 초록뜰. 여기가 이 먼 휘경동까지 온 이유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야채칼국수를 시켰다. 낙타와 동행하면 그는 들깨칼국수, 난 야채칼국수를 시켜 나눠 먹었다. 혼자오니 한 가지 밖에 맛 볼 수가 없는 게 아쉽군.

    들깨칼국수는 담백하다. 야채칼국수는 담백하면서 얼큰하다. 참깨를 베이스로 해 담백하면서, 후추와 고춧가루, 청양으로 개운하게 얼큰한 맛을 냈다. 국물까지 다 핥아먹고 나니, 일하시는 분이 오늘은 아들을 안 데리고 왔냐고 묻는다. 우리 아들, 초록뜰에 가면 꼭 밥상에 올라가서 수저통의 수저를 다 꺼내 놨다. 내가 뒤따르며 수습을 한다한들, 에너지로 똘똘 뭉친 녀석을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 늘 그분에게 걸렸다. 좋은 분이셔서 “그러면 안 돼~”하고 넘어가셨지만 내 생각에 우리 모자는 그분의 진상손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지 싶다.

    휘경동

    출처 blog.naver.com/PostList.nhn?blogId=luvu8081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 더 먹고 싶었다.

    사실 매번 그랬다. 양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장정이 한 끼 든든히 먹을 수 있는 양을 주기 때문이다. 통곡류로 만들어진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어진 국수에 비해 속이 편했다. 그래서 배가 벌떡 일어나게 먹고도 소화가 잘 되니 더 먹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포만감이 뇌로 전달되는데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포만감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야채국수에 들어갔던 재료들을 수첩에 적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포만감이 잠시 온 듯싶더니 휙 하고 지나갔다. 어차피 오늘 내 휴가인데, 뜨끈하고 개운한 야채칼국수나 실컷 먹자. 뜨끈한 바닥에 뭉개고 앉아서 국수나 한 그릇 더 먹어야지. 이 먼 데까지 왔는데, 게다가 과식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는 남편도 없겠다. 근데 한 그릇을 더 시키는 게 왠지.. 요샛말로 뭐 팔린다. 옆자리에 손님이 들어와 주문하는 틈에 나도 새로 주문을 했다.

    야채칼국수를 한 그릇 더 주문하자, 사장님이 일행이 오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자 곤혹스러우셨는지 양이 적었으면 국물과 밥을 더 줄 테니, 그걸 먹으란다.

    대략 난감.

    아낙이 칼을 꺼내 들었으면 깍둑무라도 썰어야지. 난 국수를 먹어야 겠다.

    “사장님, 제가 야채국수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요. 아침을 아니 먹고 왔더니 아무 생각 없이 금새 다 먹어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다시 한 그릇 찬찬히 먹으면서…

    그제야 주문을 받아주신 사장님, 게다가 글을 쓰겠다는 말에 재료를 설명해주시겠다며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으신다. 내가 여기 몇 년 단골인데, 남편이랑 애기 안 달고 갔더니 날 못 알아보시는 게 분명했다.

    “이 국수는 면이 특별하지요. 백밀가루가 아닌 통밀, 현미, 밀싹, 아마씨, 울금을 넣어서 만들어요. 국수가 익으면서 국물에 이 맛이 우러나는데, 이게 독특한 맛을 나게 합니다. 그리고 통곡류로 넣어서 섬유소가 많기 때문에 소화에 좋아요. 드시면 속이 편하실 거예요.”

    아. 정말 날 못 알아보시는구나. 내가 다 아는 얘기, 알다 못해 줄줄 외는 설명을 또 해주시네. 계속 듣는 것도 바쁘신 사장님께 결례이지 싶어 말씀드렸다. 내가 비루먹은 낙타의 안사람이라고. 사장님이 깜짝 놀라신다. 가족이랑 함께 오지 않아서 못 알아 봤다고. 진작 말했으면 설명 안 했을 텐데. 머쓱해 하셨다.

    일하시는 분이 다시 야채칼국수를 가져다 주셨다. 젓가락질을 하다 보니 두 그릇째 칼국수를 다 비웠다. 나의 휴가 둘째 날. 나는 무엇을 하였나? 언젠가 두 그릇을 꼭 먹어보리라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보람되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가지 했으니. 덕분에 너무 배가 불러서 집에 들어와서 잤다. 잘했지 싶다. 이렇게 쌀쌀한 날 싸돌아다녔으면, 돈이나 쓰고, 잘못했으면 감기 걸렸을 텐데. 그리고 휴가는 그렇게 지나갔다.

    필자소개
    ‘홍이네’는 용산구 효창동에 사는 동네 흔한 아줌마다. 남편과 함께 15개월 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느라 집안은 늘 뒤죽박죽이다.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식 생활양식에 맞추며 살고는 있지만, 평화로운 삶, 화해하는 사회가 언젠가 올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