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농민들의 '빈곤 자살', 그 이유?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농업 개혁과 농민 저항 운동(3)
        2013년 01월 21일 11: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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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혁명’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채 인도의 농업은 1990년도까지도 여전히 침체일로를 걸었다. 비단 농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도 경제는 소위 힌두 성장률이라고 조롱을 당하던 1~2%대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인도 경제가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은 1991년 외환위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강제적으로 시장 개방을 결정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이후 경제가 완전히 개방되면서 인도 경제는 국내총생산, 산업 생산, 농업 생산 등에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제 인도는 떠오르는 신흥 시장의 대표 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다. 델리 위성 도시인 구르가온(Gurgaon) 같은 도시는 한 집 건너 외제차고, 한 동네 건너 쇼핑몰이며, 외국 나갔다 오지 않는 사람은 눈 씻고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인도 도시의 중산층과 부자가 샴페인을 터뜨리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인도 농촌 각지에서는 농민들의 연쇄 자살 사건이 터졌다.

    지난 10년간 자살한 농민의 수는 15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했던 2006년 한 해 동안만 1만 7,060명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특히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뜨라 주에서는 인도 전체에서 자살한 농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4,453명이 자살했다.

    이름하여 빈곤 자살. 그들이 자살을 결행할 만큼 그렇게 굶주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적인 면화 재배지로 유명한 데칸고원의 마하라슈뜨라 주 비다르바(Vidarbha) 지역으로 한 번 가보자.

    그들이 빈곤한 것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빚을 지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빚은 잘못된 정책을 세운 정부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기업의 이윤만을 위해 농민을 속인 다국적 기업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세계화의 그늘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인도 정부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을 하고 그것을 계기로 농업 시장을 개방하고 값싼 수입 면화와 미국산 변형 종자를 들여왔다. 값싼 수입 면화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면화 값은 폭락하였고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정부는 미국산 변형 종자를 권장하였다. 여기에 다국적 기업 몬산토(Monsanto)는 하루 100번 이상 텔레비전 광고를 내보냈다. “이 종자는 농약을 뿌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도 이제 백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디오를 장착한 차로 자극적인 광고 영화를 틀어주면서 농민들을 유혹했다. 그 광고에는 심지어 힌두교의 신과 여신도 등장하였다. 세계화 때문에 면화 값이 폭락하는 위기 속에서 정부의 권고와 다국적 기업의 광고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농민들은 토종 면화를 버렸다. 심지어는 그 동안 재배하던 검은콩, 녹두, 참깨 등을 포기하고 몬산토의 변형 면화 종자를 사들여 재배했다. 물론 모두 빚으로 사들였다.

    문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구조 속에서 발생한 가격 경쟁력이었다. 인도 정부는 세계무역기구 등에 가입해 농업 보조금을 없앨 수밖에 없었지만, 완전한 기계화 기업농의 환경 속에서 재배된 미국산 면화와는 애초에 가격 경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었다.

    미국의 농민들은 뛰어난 기계화 영농 속에서 개인의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는데다가 농산물 가격에 직접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소득 보험 지원, 재해 복구 및 구호 지원, 은퇴나 탈농 지원, 구조 조정 지원, 환경 보전 지원, 낙후 지역 개발 지원, 공공 비축을 위한 지원 등 다양한 사회 보장 시스템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가 지불하는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싼 가격을 책정하여 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인도 농촌엔 그러한 사회 복지나 보장 제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농사를 망치면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가 없다. 따라서 세계화 속에서 농촌 시장의 개방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결국 면화 시장을 개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새 종자를 심으면 정부 지원금도 나오고 비료와 농약도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너도나도 변형 종자를 심었다.

    그렇지만 광고와는 달리 새로운 변형 종자는 해충에 취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농약을 필요로 한다. 농민들은 종자와 농약 모두를 같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구입한다. 그런데 결국 변형 종자를 심으면서 열매 안에 벌레가 파고들어 열매가 떨어져 버리는 헬리오티스라는 병이 돌았고, 점점 농약 값이 많이 들어 농민들은 점점 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빚을 많이 지게 되면서 농민들은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가는 곳은 사채업자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빚을 내어 구입한 그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결국 수천 년 동안 이곳 농민들에게 큰 소득원이 되어준 ‘하얀 황금’ 면화는 절망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이 지역 농민 340만 명 가운데 90% 이상이 지고 있는 빚과 사채업자의 잔인한 협박 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신장과 같은 장기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길까지 택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살한 한 인도 농민의 장례식 모습

    결국 농민들은 자살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농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자 정부는 놀란 시늉을 했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2006년 7월 비다르바 지역을 직접 방문해 면화 재배 농민에 대한 대규모 지원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후 정부 대책이 효과를 보인 결과는 아무 데서도 나오지 않았다. 농민들의 대량 자살 추세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인도 농민의 빈곤 자살은 데칸 고원의 면화 문제만은 아니다. 데칸 고원의 면화 재배지로부터 출발한 농민 자살은 안드라 쁘라데시, 까르나따까, 마디야 쁘라데시, 찻띠스가르 등 마디야 쁘라데시와 이웃하고 있는 여러 주와 인도 최고의 곡창 뻔잡으로 번졌다.

    그러면 여기서 뻔잡 주의 농촌으로 눈길을 돌려 보자. 뻔잡 주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두 지구에서만 해도 최근 몇 년 간 3000여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뻔잡은 인도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인도의 곡창 중의 곡창이다.

    1960년대 인디라 간디의 주도 아래 본격적으로 실시된 ‘녹색혁명’으로 농업 생산력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녹색혁명은 전체 생산량의 증가는 가져 왔지만 그 안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부농과 소농 및 농업 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농업 시장이 개방되기 이전의 보호무역주의 아래에서는 정부가 실시한 공공 분배 제도 덕분에 곡창 지대 뻔잡은 인도 전역에 필요할 때에 적절한 가격으로 식량을 제공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뻔잡은 이를 통해 인도 전역의 농민 공동체를 세계 가격의 급속한 상승과 하락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91년 시장 개방 때문에 인도 정부가 농업 보조 정책을 축소 조정하면서 보호무역주의는 중단되고 뻔잡의 역할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000년 수확기가 끝날 무렵, 정부 보조가 점점 축소되면서 공공 분배 제도의 밀과 쌀을 구입할 수 없게 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인도 전역에 걸쳐 굶주리게 된 반면, 뻔잡의 곡물 창고는 팔리지 않은 쌀로 넘쳤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을 비롯한 농업 선진 국가들은 자기 나라 농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였고, 그 결과 전 세계 곡물 가격이 하락하였다. 이제 뻔잡의 농산물은 가격 경쟁력에서 완전히 밀려나 농업 붕괴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악화되면 될수록 농민들은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처음에는 은행 대출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사채로 가게 되고 결국 사채는 농민을 자살하게 만든다.

    가장의 죽음은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것이 뻔잡의 문제고, 인도 농촌의 문제며 세계화 속에서 미국과 유럽의 농업 선진국에게 시장을 내 준 전 세계 농민들의 빈곤 문제다.

    그들의 절규에 대해 정부는 방치 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은 그들의 과격 시위만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도시의 부자들은 농민들이 국제 정세의 현실을 모른다고 비난하기 일쑤다. 일부 기업을 위해 수억의 농민들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세상, 1년 내내 농사지었지만 곡물 값이 개 사료 값보다 못한 세상에 농민들은 살고 있다.

    사위가 캄캄한 백척간두에 선 농민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코앞에 닥친 대출 빚을 갚을 수 없어 좌절에 빠진 농민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들은 극단의 수단 밖에 택할 수 없었다. 2005~2007년 사이에 3,028명의 농민이 목숨을 끊었으니, 매년 1,000명 이상의 농민들이 목숨을 끓은 것이다. 2008년에도 마찬가지로 1000명이 훌쩍 넘었다. 그야말로 농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쑤셔 밀어 넣는 형국이다.

    문제의 근원은 세계화에 있다. 미국 정부가 주동하고 한국 정부가 솔선수범하는 그 세계화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제도가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특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인간 존중, 생명 존중을 짓밟고 생산과 효율만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수출을 위한 생산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점에서 문제다. 따라서 수출이 아닌 지역 시장을 위한 생산이 되도록 경제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그 안에서 시장 논리 및 효율성 대신 평등과 생태 그리고 연대의 가치에 접근하는 세계화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들불같이 번지는 농민들의 자살도 막을 수 있다. 인간의 생명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이 또 있는가?

    글을 쓰는 동안 한진중공업 노동자 가운데 또 한 분의 젊은이가 자살을 했다. 이 짐승 같은 세상 어떻게 막을 것인가? 도처에 한 숨 뿐이다. 사위는 어둡고, 뚫고 나갈 출구는 보이지 않고 답답함 뿐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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