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의 마음치유 이야기-11
    "그 사람 감정에 같이 머물러주기"
        2012년 11월 30일 12: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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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차다. 평택 송전탑 위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매섭고도 서늘하다. 좁고 위험한 공간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어떻게 힘을 전할까?

    레디앙에 ‘봄비의 마음치유 이야기’가 올라오면 신속하게 이 곳 저 곳으로 내 글을 날라다주는 고마운 친구, 복기성 동지도 송전탑위에 올라가있다. 힘 내라고, 건강하라고, 지치지 말라고 기도한다.

    힘내라고, 건강하라고 지치지 말라고 기도하게 하는 동지가 또 한 명 있다. 한진에서 만났던 ‘사발’이라 불리던 동지.

    그는 부끄럽다며 과정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과정을 펼치는 공간에 미리 내려와 문을 열어놓고, 방을 치워주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수시로 들여다봐주곤 하던 마음 따뜻한 동지였다. 마지막 과정이었던 1박2일 합숙 때 승합차 운전을 위해 따라왔다가 엉겁결에 함께 과정을 하게 된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날이 무딘 과도를 갖고 다니며 봄나물을 한 움큼 캐는 수줍은 촌 총각이었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동안 시간이나 공간적인 제한 때문에 하지 못했던 분노의 감정을 만나보기로 했다.

    불을 끄고 방 안을 어둡게 한 다음, 모두 벽을 향해 앉아 자기 앞에 놓인 배게로 힘껏 방바닥을 치기로 했다. 남 눈치 보지 말고 내 마음 속 분노를 다 꺼내보기로 했다.

    소리가 나오면 소리를 지르고 눈물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며 내 감정에 머물러 보기로 했다. 먼저 마음 속 느낌을 불러오기 위해 ‘분노 치료글’을 읽었다.

    분노의 물꼬를 터

    억눌려 있는 내 안의 분노를 터트려.
    나를 병들게 하는 화를 쏟아 내.
    꾹꾹 화를 참는 ‘착한 병’에서 벗어나.

    화를 참아 병들고,
    화에 휘둘려 아픈 가슴.
    내 상한 감정을 씻어내.
    나를 집어 삼키고
    너를 상처 입히는 분노를 내보내니 내 마음이 편안해.

    화가 쌓이면 눌렸던 스프링이 튀듯 폭발해.
    물이 넘치는 논에 물꼬를 터주듯,
    분노의 물꼬를 터 넘치지 않고 흐르게 해.
    분노는 내 삶의 에너지야.(아리랑풀이 연구소 치료글)

    사진 =아리랑풀이 연구소 어린이 연수(www.arirangfree.or.kr/info/bbs/tb.php/notice/395)

    방안엔 둥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다란 덩치의 동지들이 하나 둘 배게로 방바닥을 치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과정 안에서 소리를 쳐 본 경험이 있는 동지들은 그래도 익숙한 몸짓으로 배게를 치는데 처음 과정에 들어온 사발은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나 둘 목소리가 높아지고 북소리는 커지자 가만히 앉아있던 사발도 드디어 배게를 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감정이 올라오는 걸까, 순한 몸짓 어디에 그만큼의 분노가 들어있었을까 싶게, 어떻게 그 화를 다 참고 살았을까 싶게 온 힘으로 배게를 치는 사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20여분 온 힘을 다해 감정을 내어 놓고 나서 다시 둥그렇게 모여 앉았을 때, 사발이 말했다. 미운 사람들 100대씩 때려주고 싶었노라고, 실컷 때려준 것 같은데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고.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하자고 했더니 가만히 한참을 앉아만 있었다. 이전 과정에서 복수 노조 후배를 만나 크게 소리치고 화를 토해냈던 동지가 사발에게 ‘소리 지르라고, 욕하라고, 나도 답답하고 미치겠더니 소리 지르고 터지고 나니까 살만 하더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숨만 크게 들이쉬고 내쉴 뿐 욕 한마디 안 나오는 사발,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아주 한참 후에 ‘개새끼’ 라고 작게 내뱉는 사발.

    동지들이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사발이 시원해질 때까지 사발의 마음을 들어주자고 하곤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앉아있던 사발이 천천히 혼자서 속 끓이고 있던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복수노조로 간 후배 이야기를 할 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에선 눈물이 마구 흘렀고 목소리도 갈라져서 나왔다. ‘네가 어떻게 자본을 이길 수 있느냐고 말했지, 네가 지금 이렇게 복수 노조에 간 것, 얕은 꿀 한 방울에 넘어간 것, 그래 처자식이 있어서 그랬다고 치자, 그래서 그랬다고 치자’ 라고 말하며 눈물을 계속 흘렸다.

    가슴이 답답해 자기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흐르면서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사발에게 가장 조용한 친구가 다가가 어깨를 잡아줬다.

    동지들도 ‘털어놓아야, 내어놓아야 산다.’고, ‘그러다가 죽는다.’고 나지막한 소리로 사발을 지지해줬다.

    사발이 눈물만 흘리고 있어 우리가 사발 대신 욕을 하기로 했다. 소리도 질러주었다. 사발의 분노가 밖으로 터져 나오도록 우리가 사발의 감정에 정성을 모아주었다.

    동지들의 모습에 힘이 생겼나, 사발이 소리 내여 욕을 했다, 배게로 땅바닥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러는 사발 모습이 외로워도 보이고 안타깝게도 보였다. 한참 몸부림치던 사발을 동지들이 안아줬다. 그 품에 안겨서 사발이 아이처럼 몸을 떨며 한참을 울었다.

    1박2일 과정을 마무리할 때 사발에게 동지들이 애정을 전했다.

    ‘의욕이 많고 열정적인 사발인데 제대로 풀리지 못하는 현장 때문에 지치는 것이 안쓰럽다.’ ‘어제 밤, 응어리를 꾹꾹 누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내 이빨이 갈릴 정도였다.’

    ‘술 먹어도 속내를 이야기 잘 안하는데 그 모습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냥 속 시원하게 툭툭 털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열정도 고민도 같이 나누자’고 손을 내밀었다.

    동지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발이 답했다. ‘속내를 털어 놓는 게 실은 참 어색했었노라고, 그러나 어제 하루 짧은 시간인데도 뭔가를 스스로 내어놓았더니 시원하다고. 전투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 스스로를 묶어 놓았던 것 같다고, 여전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조직만을 위한 최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내가 스스로 억누르면서 나도 모르게 참 많은 짜증을 내고 있었다는 걸 느끼겠더라고, 받아주니까 들어주니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고맙다고, 참 고마웠다’고 마음을 내어놓았다.

    듣는 우리도 따뜻해졌고 말하는 사발 표정도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졌었다.

    마음치유라는 것, 그 사람 감정에 같이 머물러 주는 것.

    같이 울어주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손잡아 주는 것.

    지금도 어느 길목에서 투쟁하고 있을 사발에게 ‘힘내라’고 내 마음을 보낸다.

    송전탑 위에서 투쟁하고 있는 복동지에게도 ‘지치지 말고 힘내라고, 꼭 건강 하라.’고 내 마음을 보낸다. 내 사랑도 같이 보낸다.

    필자소개
    홀트아동복지회 노조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아리랑풀이연구소 그룹 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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