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주의의 뒤틀림 & 통진당 사태
        2012년 09월 18일 08: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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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의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에 대해 조희연 선생이 자신의 페북에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라는 것과 유비시키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조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기고 글로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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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대학원수업을 하면서 지역주의 문제와 최근 통진당 사태를 연결시켜 사고하게 되었다. 지역주의에는 두가지 큰 측면이 존재한다. 지역차별에 반대하는 호남민중의 진보적 저항과 그러한 저항에 대한 정치적 굴절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전근대적 차별에 묵종하던 호남민중이 박정희 시대 이후의 ‘근대적’ 차별에 저항하면서 이를 문제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적인 발전이다. 호남차별에 대항하는 호남민중들의 저항이 광주학쟁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권리의식과 정치의식이 발전되게 된 것이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민교협 공동의장)

    이런 점에서 나는 지역주의에는 ‘진보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집단, 서발턴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통상 사회적 차별들은 그 차별을 받는 집단이나 개인이 이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 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이 지속된다.

    그러나 어떤 계기나 점진적인 역사적 발전으로 인하여 ‘임계점’을 지나게 되면,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그 차별을 문제시하고 그것에 저항하게 된다. 때로 지배적 집단은 폭력으로 이를 억압할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정치적’ 쟁점이 된다. 한국사회에서도 지역차별은 그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 차별의 그러한 ‘정치화’과정에는 복잡한 요소들이 개재된다. 그것에 대해서 응전하기도 하고, 왜곡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 하나는 그러한 차별에 대한 저항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른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를 하거나 어떤 그러한 사건이 터질 경우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차별받는 집단의 저항의식의 성장과 정치화를 ‘왜곡’시키게 된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지역적 차별에 대한 호남민중들의 ‘정치화’ 과정이 왜곡되는 과정을 겪는다. 특히 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특히 그 분열의 책임은 호남을 대표하는 김대중에게 쏟아졌다)로 인한 도덕적 비난을 계기로 하여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지역패권적 세력은 김대중을 공격하고 지역차별에 대한 호남민중의 저항을 왜곡하게 된다.

    이 두가지 점이 결합되어 나타난 ‘괴물’ 같은 현실이 바로 88년 4월 총선을 통해서 드러난 지역주의 정당질서이다.

    지역주의 정당질서는 그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호남의 지역적 차별에 대한 저항은 ‘국민적’인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부가 되면서 진보적 동력으로 승화되어 표현되었고 그렇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88년 이후에는 전혀 반대가 된다. 88년 이전에 김대중에 대한 호남의 지지와 성원, 결합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동력이고 독재정당들에 대항하는 중요한 저항의 성격을 가졌는데, 88년 이후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왜곡 투영되면서, 대구경북의 민정당에 대한 몰표, 부산경남의 김영삼에 대한 몰표와 동일한 ‘지역감정에 기초한 지역투표’로 왜곡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전선이 복잡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호남과 나머지 전체의 대립구도가 나타나게 된다. 후자에는 진보적 지식인도 일부가 된다.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에서 지적한 것은 내가 여기서 지적하는 첫 번째 측면을 강조하고 위한 것이었다. 이는 지역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정치지도자와 대중의 관계가 왜곡되게 굴절되는 것을 의미한다영남의 보수적 엘리트들은 그동안 독재세력이라는 것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김대중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같은 똑같은 인간이 되면서 그러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고 이제 마음놓고 지역주의라는 이름으로 김대중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자,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차별에 대항하는 피차별집단의 권리의식 확대와 저항적 의식의 확대(정치화)와, 그것이 특정 계기에 의해 왜곡되는 과정이 지역주의에 개재되게 되는 것이다. (왜곡된 정치화 과정)

    이것을 통합진보당 사태에도 적용해보자. 통합진보당으로 상징되는 반미자주파, 민족해방파, NL파, 그 중의 일부로서의 ‘주사파세력’은 80년대 초반에는 거대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부로, 87년 이후에는 민주개혁 민주주의운동과 민중생존권 투쟁을 선도하는 대중적 세력으로서 성장해왔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87년 김대중의 이른바 ‘도덕적 오류’(분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통진당 당권파 세력이 국가보안법 질서에서 ‘친북세력’이라고 매도당하면서 최고의 탄압을 받으면서 성장해왔다(앞서 지역주의의 전자의 측면. 진보적 측면이다).

    그러나 통진당 사태에서처럼 ‘도덕적 오류’(부정선거 문제에 대한 ‘미시적’ 항변, 중앙위의 폭력사태 등)로 인하여, 통진당 당권파 세력의 위상은 굴절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통진당 당권파세력과 대중의 관계가 왜곡되게 굴절되면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통진당이라고 하는 ‘부도덕한’ 세력 대 나머지 전체세력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당권파는 공안기관의 개입이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진보적-급진적 세력이 엄혹한 조건 속에서 성장해가지만, 일단 일반 상식의 수준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면 그것을 계기로 파죽지세로 보수세력이 공격해들어오는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지역주의의 왜곡된 ‘정치적 구조화’ 과정에 대해서는 이번에 제가 낸 <민주주의좌파, 철수와 원순을 논한다>의 6장에도 썼다).

    여기에 한가지 더 붙여보자.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멍애(김대중은 이에 대해 너무 억울해하고 항변해왔고 그것을 강준만선생이 잘 드러냈다)에 의해서 김대중은 ‘정치적 확산’이 제약을 받게 되었다. 확장성을 일어버리게 된 것이다. 92년 대선 패배 후, 92년 정계은퇴에까지 이른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 확장성을 상실한 고통스러운 상태를 김대중이 극복하게 된 것은 김대중이 뉴디제이플랜 등을 이유로 이미지를 전환하고자 노력한 것이 성공을 거두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왜곡을 매개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보수세력의 파국적 상황—도덕적 문제가 대단히 ‘미시적’인 것이 될 정도의—이 출현함으로써였다. 97년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나는 97년 외환위기로 인해서 보수세력의 ‘통치능력’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상황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97년에 정권교체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당권파는 아마도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전진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012년 통진당 사태 이후 통진당 당권파와 대중의 관계는 변화했다. 이제 당권파를 국가보안법 질서 하에서 ‘외재적’으로 강압으로 억압하던 보수세력은 ‘도덕적’으로 당권파세력, 주사파세력을 매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통진당 사태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국가보안법 질서, 분단체제 하에서 가장 엄혹하게 탄압받으면서 그것을 깨기 위해 노력해오던 집단은 ‘탄압받으면서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집단’에서 이제 ‘도덕적 결함’을 갖는 부도덕한 집단이고 이제 그에 정서적 연민을 않가져도 심리적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집단으로 왜곡되게 재규정되게 된 것이다(물론 97년 외환위기와 같이 어떤 계기가 다시 지형 자체를 변화시켜 줄지는 모르겠다).

    나는 통진당 사태에서 신당권파(지금은 탈당 ‘새정당(추)’가 됨)의 입장에 무조건으로 동조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당권파의 ‘전략적 사고전환’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던 것도 이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권파 집단은 김대중이 정확히 지역주의의 부상과정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항변했던 것처럼 ‘미시적’으로 항변했다. 87년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민주당은 ‘4자필승론’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2012년 당권파는 이를 반대파에 의한 ‘권력투쟁’이고 잘못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 배후에는 공안기관의 음모가 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항변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의 이른바 ‘부도덕한’ 행위에 의해서 왜곡되게 ‘구성된’ 것이었다. 그래서도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나는 ‘도덕적’이라는 것에 따옴표를 계속 붙였다. 그 의미도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이제 한동안 당권파는 스스로가 부여한 ‘도덕적’ 계기에 의해서 구성된 반(反)당권파적 질서, 반(反)반미자주파적 질서에 고통받으면서 활동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진보세력 일반도 이러한 왜곡된 질서에 영향을 받으면서 전진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깝다. 역사라는 것이 지그재그로 전진하기 때문일까? 1987년 이후 진보적-급진적 세력이 이처럼 대중으로부터 ‘질타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문재인-안철수를 뛰어넘는 ‘제3후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던가. 우리 모두가 성찰적으로 상황을 음미해보자.

    필자소개
    성공회대 교수. 민교협 공동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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