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는 삶의 과학이다"
        2012년 01월 25일 10: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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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은 불교는 "삶의 과학이고, 삶의 지혜"라며 "윤회는 옛 사람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명평화 운동을 대표하는 스님답게 "윤회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존재의 법칙인 생명의 순환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 6백년 은둔에서 벗어나는 중

    그는 또 "종교와 세상, 종교와 세속, 종교와 현실을 분리시키는 것은 관념적으로나 가능한 것"이며 "그런 관념적 생각을 말이나 글로는 얘기할 수도, 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며 지금 여기의 삶과 종교의 사회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법 스님은 최근 불교계에서 사회적 발언과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 "지난 94년 종단개혁 이후 불교가 역사와 사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며 이는 "조선조 5백년과 일제 36년, 해방 후 60년 동안 살기 위해 은둔하고, 사회로부터 소외 받았던 역사를 벗어나서 새로운 고민과 모색의 과정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법 스님은 지난 1990년 개혁 승가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만들어 청정 불교 운동을 이끌었으며, 1995년 지리산 실상사 주지로 부임하여 귀농학교, 대안학교, 환경운동 등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2001년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좌우익 이념 대립 희생자를 위한 지리산 위령제’와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지리산 1000일 기도’를 주도했다.

    도법 스님은 이후 생명평화 운동을 화두삼아 2004년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해 5년 동안 계속했다. 도법스님은 특히 화쟁위원회 위원장으로 4대강, 한진중공업 투쟁 등 주요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불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도 맡고 있다.  

    <레디앙>은 도법 스님을 만나 최근 조계종 일각에서 사회적 실천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한 배경과 불교를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조계종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 사무실에서 이뤄졌으며,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이 진행했다.

                                                      * * *

    – 스님께서는 불교는 평화의 종교, 행복의 종교이며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뒷부분의 뜻인 “삼계가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하게 하리라”는 대목이 불교의 역사적 존재 이유라고 하셨다. 세상을 구제하는 대자대비, 대자비심, 대자비행이 불교의 존재 이유이자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한 가치이면 목적이라고도 하셨다.

    세상을 구제한다는 것이 모든 중생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이라면, 평화와 행복의 조건을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면서 관념이나 신앙의 영역에서 찾을 수도 있고, 현실 사회에서 그런 조건을 만드는 길에서 찾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님께서는 불교가 관념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라 말씀하셨다.

    삼계 중에 물질에 속박돼 가장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는 ‘욕계’인 우리 현실 사회에서 평화와 행복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불교는 관념과 추상이 아니다

       
      ▲도법 스님.

    = 일단 불교라는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의 그 말씀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은 나의 진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바로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이 진위를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얘기는 달리 설명해보면 불교의 기본 사유방식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봤을 때 불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모든 존재 자체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런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추상적이라 하는데 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구라는 별, 좁혀서 지금 여기의 ‘나’라고 하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태양과 지구가 싸우지 않고 공존하기 때문이다. 둘이 평화롭게 공존하지 않고 싸우고 공존이 깨진다면 지구라는 별이 괜찮을까, 나라는 존재가 괜찮을까, 불가능하다.

    지구라는 공간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해와 달, 흙과 물, 동물과 인간, 곤충이나 미생물들 모든 것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나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건 사실이다. 현대과학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존재, 세계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려면 이치에 맞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그런 바람이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을 가르쳐온 것이 불교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존재는 거룩하다는 것을 깨닫는 게 지혜

    질문에 대해 얘기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의 뜻은 우선 어떤 존재도 다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다. 말 뜻대로 보면 내가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만으로 대단히 만족할 수 있고, 자부심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로 거룩한 존재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깨닫는 것이 지혜로움이다.

    대자대비는 그 존재의 거룩함이 억압당하지 않고, 손상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상대방도 존재에 대한 만족과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 하나하나가 스스로 또는 서로 간에 거룩함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고 자부심을 가지는 삶이라면 이것이 곧 평화로운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주체적인 삶을 실현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 관계의 삶에서도 이런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의미다.

    그리고 ‘일체유심조’를 얘기했는데, 이 말의 해석을 놓고 불교 내부 논란이 많이 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관념적이고 신비하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불교가 신비한 종교로 설명돼 심각한 모순과 부작용이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이 모순과 혼란, 고통과 불행에 빠지는 이유는 조작된 관념 때문이며 이 관념에서 깨어나고 그것을 벗어던지라는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는 후자 쪽이다.

    사찰도 사람과 돈이 들어와야 존재

    – 공존과 평화를 말씀하셨는데, 현실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공존하고 싶지만 다양한 이해관계와 사고방식 때문에 갈등하고 부딪치는 게 일상적이다. 조계종에서 ‘화쟁위원회’도 만들어서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

    = 종교와 세상, 종교와 세속, 종교와 현실을 분리시키는 것은 관념적으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 관념적 생각을 말이나 글로는 얘기할 수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에서 그게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보자. 거룩한 종교 공간이라는 사찰이 존재하고 유지되려면 어때야 되나. 사람이 와야 되고, 돈도 와야 되고, 온갖 것이 다 와야 된다. 이런 것들이 안 오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오지 않으면 절이 존재할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나. 불가능하다.

    아까 얘기한 부처님 말씀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현실에서 이룰 수 있고, 진위 여부가 증명될 수 있다’는 불교적 사유방식에 따르려면 실제를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 실제는 절과 세속이, 종교와 사회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성속 불일불이(聖俗 不一不二), 원융무애(圓融無礙)라고 표현한다.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이름, 위치는 다르지만 한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동시에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오른손에 난 종기는 오른손이 치료할 수 없다. 왼손이 도와줘야 한다. 실제가 그러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야 한다.

    종교의 사회참여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물음은 종교도 모르고 사회도 모르는 질문이다. 관념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물음은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보면 그런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계종에서 화쟁위를 만든 것은 우리 사회의 현안과 질문에 응답해보겠다는 것으로, 본래 불교 취지와 자기 면모를 되찾아가는 것이며, 이 시대에 맞게 구성해가는 몸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을 있는 대로 보고, 사실에 맞게 행동하라

    – 신도이든 아니든, 일반 대중들의 시각에서 볼 때 불교 세계관 또는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들은, 대중들에게는 손으로 만져지고, 분명한 존재감으로 오는 모든 현상과 사회 현실, 사물, 의식 같은 것들이 없다거나, 실체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이런 게 불교에 쉽게 다가가는 것을 막고, 눈앞의 사회적 현실에 관심과 참여를 멀리 하게 만들어, 의도와 무관하게 현재 존재하는 사회적 직시하지 않고, 보수적 세계관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 그건 불교의 본래 취지를 잘못 파악해서 대단히 많이 왜곡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후기 대승불교를 지나면서 불교 사유방식을 더 단순화시킨 표현이 있다. 그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라, 즉 여실지견(如實之見) 그리고 그 사실에 맞게 행동하라, 즉 여실지견행(如實之見行)이다. 이것이 불교다.

    이게 동양철학적으로 보면 실사구시라고 말할 수도 있고,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과학적 사고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관면 추상 아니라 구체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정반대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불교를 현실에서 제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화엄경에 뭐라고 나왔는데, 부처님 뭐라고 하셨는데, 성철 스님이 뭐라고 했는데…”라고 말하면서 그런 거에 구애받지 말고, 지금 있는 사실을 잘 봐야 한다.

    실제를 잘 봐라. 그러면 거기에 문제도 있고, 문제의 원인도 있고, 해답도 있다. 사실은 이게 불교의 사유방식이며, 이렇게 문제를 다루면 명료해진다. 그렇지 않고 불교의 경전이나 고승들이 뭐라고 말했다는 등의 등의 얘기를 가지고 불교를 설명하니까 개념들만 잔뜩 쌓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부자는 행복하다? 새빨간 거짓말

    사회적 현상을 놓고 보자.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대표적 가치는 1등과 부자이다. 단순화시키면 “1등만이 희망”이고, “부자가 돼야 행복”하다는 말이다. 근데 정말 그럴까. 관념적으로 보면 그게 말이 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면 과연 그럴까. 내가 볼 때는 아니다.

    우리는 자꾸 관념적으로 문제를 보고, 다루면서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실제를 가지고 다루자고 하면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

    마치 아지랑이 쫓는 것과 같다. 아지랑이 다 있다고 생각하고 잡으려 다니지만 영원히 안 잡힌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 개념, 사고 같은 걸로 표현되는 가치나 목적, 그것이 1등이나 부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게 다 아지랑이로 실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믿고 쫓아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지랑이는 잡히지 않는 것이다.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뿐인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얘기한다, 실제와 거꾸로 돼 있다. 그걸 근거로 꿈을 꾸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한 마디로 전도몽상을 버려라, 그러면 해탈과 열반이다, 이것이 <반야심경> 핵심 원리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지, 실제로 확인해봐야 한다. “1등이 희망이고, 부자가 행복”이라는 부자논리를 실제로 확인해보면, 첫째로 이런 논리는 이뤄질 수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며, 그리고 이뤄지면 큰일 날 아주 위험한 거짓말이고, 또 현실로 이뤄진다면 아주 나쁜 거짓말이 된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이유

    왜 그런지 설명해보겠다. 실제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면 “나는 부자”라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지구촌에서 제일 부자라면 미국을 떠오르는데,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면 이라크전을 일으킬 수가 없다.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더 강자가 되고, 더 부자가 돼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라는 것은 이뤄질 수 없다.

    다음 골고루 부자가 돼서 행복하게 잘 살자고 얘기하는데, 만약에 70억 세계 인구가 모두 한국 사람처럼 부자가 돼서 먹고 쓰면 어떻게 될까. 인류문명은 마비되고, 에너지와 자원은 고갈된다. 이건 큰 문제이며, 골고루 부자가 되면 행복하다는 말은 위험한 거짓말이 된다.

    새 번째, 누구는 부자가 돼서 배 두드리며 희희낙락하고, 다른 누구는 가난하다고 아우성치면서 산다면 하면 행복한가? 이건 나쁜 거짓말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비인간적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게 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부자가 되면 행복하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새빨간, 아주 위험한, 나쁜 거짓말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삶을 이렇게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 불교다.

    – 말씀은 그런데 그래도 1등을 하고, 부자가 되면, 끊임없는 욕망으로서 부자가 아니라, 당장의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스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든다.

    = 사실은 쉬운 일 아니다.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아지랑이가 있다고 믿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말을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질문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조금 더 많이 갖자, 조금 더 편하게 살자“ 소박하게 말하면 이런 내용일 것이다. 길게도 말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60년 역사를 놓고 보면 정부 수립 당시 우리 국민소득은 1백 달러도 안 됐다. 지금은 죽네 사네 하지만 2만 달러다. 물론 사람마다 편차는 있다. 그런데도 아우성이다.

    흙 밭과 마음 밭 균형과 조화 이뤄야

    삶에 대한 만족도, 자부심, 보람, 따뜻함, 평화로움 이런 것이 모두 ‘박살’이 나 있다. 방금 말한 우리의 소박한 바람은 이뤄졌다. 지금 대다수 삶들은 배고프지 않고, 헐벗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왜 지금도 삶이 따뜻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만족스럽지 못한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로 짚어 봐도 소박한 부자들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 경험 속에서 무수히 확인된다.

    그래서 불교는 두 가지 얘기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흙 밭을 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마음의 밭을 가는 것도 필요하다. 이 둘이 늘 공존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뤘을 때 우리가 희망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

    지금은 흙 밭만 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그 균형이 깨졌다. 이건 큰 문제라고 본다. 흙 밭과 마음의 밭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불교에서는 중도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불교를 삶의 과학이라고 본다. 근데 불행하게도 불교인들이 정반대로 삶을 다루고 있다. 깨달음이나 종교, 수행 이름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삶은 지금 현재밖에 없다

    – 종교를 내세와의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삶의 과학, 삶의 지혜라고 표현하셨다.

    = 엄밀하게 보면 늘 삶은 지금 현재밖에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오늘 도둑질하지 않으면 내일 감옥에 갈 가능성은 없다. 오늘 도둑질하면 내일 감옥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삶은 그런 것이다.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현재를 제대로 살 때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삶과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게 불교적 사유방식이다.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매몰되거나, 미래의 환상을 좇거나 그러고 있다. 종교라고 하는 것들도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해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신비한 다른 곳에서.

    기독교도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면 내가 아는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해석될 걸로 본다. 기존의 관념을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 삶의 과학, 지혜, 실사구시를 강조하셨는데 불교에서도 내세를 설명하는 말들이 있지 않나?

    = 많다. 지옥, 아귀, 축생 같은 것들이 그렇다. 불교가 윤회를 가르치는 종교로 많이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불교는 연기론적 세계관과 중도적 사유방식을 가지고 지금 여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도록 삶을 다룬다.

    그럼 전생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나, 확인할 수 있나, 실현할 수 있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문제를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게 불교다. 내세도 마찬가지도. 그럼 현재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럼 윤회는 뭐냐,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하는 문제가 나온다.

    현재를 제대로 살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죽으면 지옥 가고, 아귀가 되고, 천상에 가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 그런데 이건 옛날 사람에게 삶을 잘 보고, 파악하고, 다루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효과적인 설명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실제가 아니다.

    실제는 요즘 말로 하면 생명의 순환질서라든지 생태적 순환질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세상 이치이고, 관계의 순환질서라고 하는 존재의 법칙과 질서다. 관계의 순환질서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것을 신화적 설화적으로 묘사한 것이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이런 개념이라고 본다.

    물이 산에서 흘러 바다로 갈 때,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수가 되고, 자갈밭을 만나면 여울물이 된다. 다 똑같은 물의 흐름인데 이름이 다르다. 생명이 존재 법칙, 관계의 순환질서에서 나타난 현상을 현성 범주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다뤄갈 수 있도록 소설적으로 묘사한 것이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윤회설이라고 본다.

    지금 여기 흙탕물이 있다. 과거의 흙탕물로 흘러 온 거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나. 현재 물이 과거 영향 받았더라도 정화시키는 노력하면 정화가 가능하다.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물을 잘 정화시키면 미래는 맑은 물로 흘러간다. 결국 현재를 어떻게 보느냐가, 어떻게 사느냐가 과거로부터 자유, 미래의 창조가 좌우된다고 본다. 과거에 빠지지 않고 미래에 현혹되지 않고, 현재를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는 이처럼 지금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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