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의 시대 가고 개혁의 시대 왔다"
        2011년 03월 29일 05: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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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시작에 앞서

    이 글은 민주주의 복지사회연대(준)가 4월 16일(토) ‘복지국가 진보정치연대’라는 본 조직의 출범을 앞두고 내부 토론용으로 작성된 글이다. 현재 진보신당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진보정당’ 논의는 지방선거 참패와 독자생존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을 근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논의 발생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매우 수세적이고 복고(復古)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3.27 당 대회 결과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이 제출하는 ‘도로민노당’ 방식의 통합안이 다수에게 수세적, 복고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필자는 2008년 이후 일관되게 <레디앙>과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 한국 정치가 ‘초록+복지’의 가치를 중심으로 기존 정당질서의 틀을 뛰어넘어 전면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바로 ‘가치중심 정치재편론’이다.

    필자의 이러한 판단에는 현재 한국정치 정세가 87년에 버금가는, 그야말로 ‘격변기’라는 상황판단이 깔려있다. 이러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진보정치세력은 가장 먼저 정치적 격변기의 ‘본질’과 ‘동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어봐야 한다.

    그에 입각할 때, 진보적 정치재편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은 ‘운동권 정당’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한국 정치의 발전 단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정치정세의 변화, 민심의 변화, 경쟁 정당의 변화 등을 일관된 분석틀로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허심탄회한 토론과 비판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 보다 공세적이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정치재편 전략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의 제출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그리고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은 그간 복지국가 담론을 주도해왔던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복지국가 시민 정치포럼’을 중심으로 최근에 공개 발표한 입장이기도 하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은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더욱 실천적으로,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은 ‘가치중심 정치재편론’

    현재 정치권에 제출된 정치재편 담론은 크게 보면 가치중심 정치재편론과 세력중심 정치재편론이 있다. 전자는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후자는 정당의 개수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것으로 보이는데 △민주당까지 포함하여 다 합치는 백만민란 △비민주 통합론(국참+민노+진보신당) △운동권정당 대통합론(민노+진보신당+사회당) △급진좌파 마이너 통합론(진보신당+사회당)이 존재한다.

    ‘가치재편’ 필요성에 대한 이해 – 복지국가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단계’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정리해보면, 그간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 △산업화 △민주화의 과제를 거쳤다. 김일성/이승만 ⇒ 박정희 ⇒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정치지도자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와 함께 등장했다.

    2002년 노무현의 집권과 2004년 열린우리당의 과반 집권은 ‘민주화 쟁취의 종결자’ 역할을 했다. 처음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를 소위 민주파가 장악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97년 김대중의 집권이 DJP연합의 형태로 중도보수 및 충청도 지역주의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 실패의 본질적 문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상태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복지민주주의=복지국가)로 이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80년대적인 민주개혁 과제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2004년 4대 개혁 입법은 그 절정이었다.

    이는 민생고로 고통 받고 있던 국민들의 외면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철없는 정치세력’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즉, 조중동 등의 언론환경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서민대중의 엄호’를 받지 못했기에 실패한 것이다.

    유럽 민주주의 200여년을 통해 본, 민주주의의 발전 경향

    약간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민주주의의 발전 경향은 3단계로 정식화해볼 수 있다.

    첫째, 민주주의적 ‘제도 쟁취’ 단계이다. 자유권적 민주화(=정치적 자유주의)의 시대이다.(~1920년대 즈음) 둘째, 쟁취한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서민대중의 ‘물질적 해방’(=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추구한 단계이다. 복지국가 시대이며, 복지 민주주의 단계이다.(~1970년대 즈음) 셋째, 복지국가가 일정 단계에 진입하자 ‘의식적 해방’(=삶의 만족감)을 추구한 초록 민주주의 단계이다. 환경문제를 포함한 신좌파적 의제의 부상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물론 압축사회라는 특징에서 유럽과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장집 교수 말대로 민주주의는 ‘절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 같은 것은 없다. 보수파 주도의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이고, 진보파 주도의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이다. 남는 것은 ‘정치(력)’뿐이다.

    그렇게 볼 때, 의회제도와 선거제도가 정착한 한국사회의 당면 과제는 세계사적 민주주의 단계론에 입각해서 볼 때도, ‘복지 민주주의’(=복지국가)로 이행해야 하는 단계인 것이다.

    정치적 세력재편의 이해 – 민주파(개혁파)의 역사를 중심으로

    87년 민주항쟁으로 실시된 직선제 이후 한국정치는 지역주의 대립구도가 전면화되었다. 평민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김대중당이 그랬다. 이때 한국정치의 대립구도는 영남-호남의 지역대립 구도가 한축이었고, 민주파-보수파의 대립 구도가 다른 한축이었다. 김대중의 핵심 정치전략 및 유권자 동원전략이었던 ‘호남+386 전략’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적 대립구도는 단순히 혹자의 말대로 ‘만들어진 현실’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유럽과 미국 역시 ‘지역적 정치대립구조’를 일정 단계에서는 드러냈다.

    그건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필연적 파생물이다. 왜냐면, 산업화는 산업지대와 농업지대의 갈등이라는 ‘지역적 갈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층적으로는 산업자본가+산업노동자를 한편으로, 지주+농민을 한축으로 하는 ‘계층적 갈등’도 내포하게 된다.

    190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 연립정부론과 정치연합 담론은 모두 노동계층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당이 ‘농민계층’과 정치연합을 할지 말지의 문제가 핵심쟁점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베른슈타인에 의해서 제기된 수정주의 논쟁의 발단이 그러했고, 1932년 스웨덴 사민당과 농민당의 연정, 1933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모두 ‘노동-농민 정치연합’의 사례들이다. 그리고 남부문제 테제로 유명한 이탈리아 공산당 그람시의 정치전략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대중 정치세력이 민주화도 주도하고, 지역주의적 성격도 동시에 가지게 되었던 이유를 이러한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7년 IMF 구제 금융을 기점으로 그리고 2004년 민주파의 원내 과반을 기점으로, 민주화의 과제도 산업화의 과제도 크게 보면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근본이유는 ‘민주화 이후’의 과제였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복지국가의 과제를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로 채택하지 않은 것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파의 성찰적 접근 – ‘양극화 갈등’을 정치적 핵심 갈등 축으로 채택

    2010년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무상급식으로 드러난 ‘복지국가’에 대한 유권자의 강렬한 열망이다. 다른 하나는 야권난립구조를 타파하는 야권(후보)단일화이다. 단일화된 야권후보에게 유권자들은 표를 몰아주었다.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이러한 민심의 두 가지 특징은 한마디로 ‘민심의 진보화’로 요약할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서민대중의 민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렴 및 반응하고 있는 정당은 민주당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2010년 10월 전당대회를 통해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고 야권단일정당이라는 정치재편 담론을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간의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에서 의미하는 바는, 드디어 민주당이 ‘양극화 갈등’을 핵심적인 정치 의제로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역시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정당구도에서 의미하는 바는 민주당이 핵심 정치의제로 ‘양극화 갈등’을 채택했다는 측면에서, 진보정당의 그것과 ‘질적인’ 차이점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남는 것은 국민들은 체감하기 어려운 ‘양적인’ 차이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진정성’같은 추상적인 말 뿐이다.)

    진보파의 성찰적 접근 – ‘혁명의 정치학’에서 ‘개혁의 정치학’으로의 이행 필요성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뿌리는 사회주의운동이다. 북한식 모델 추구는 NL(=민족해방파=자주파), 소련식 모델 추구는 PD(=민중민주파=평등파)이다. 전자는 김일성주의를, 후자는 레닌주의를 사상적 뿌리로 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사회주의’(=사민주의)를 배격했다는 점에서 모두 체제론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적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국 진보를 대표하게 되었을까? 그 핵심 이유는 국제적 원인과 국내적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국제적 시각에서 조망해보면, 소련-중국-북한과 미국-일본-남한이 서로 대면하고 있는 한반도가 ‘냉전구도의 핵심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세력은 냉전적 대립 구도에서 소련-중국-북한 편에 섰던 셈이다.

    이중에서 NL(민족해방파)는 북한식 모델을, PD(민중민주파)는 소련식 모델을 지향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국내적 시각에서 조망해보면, 오랜 군부독재 시절의 체험이 핵심 원인이다. 그만큼 혁명의 열정은 강렬한 것이었고, 해방을 향한 운동의 추억은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요인은 89~91년에 걸친 동유럽 및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적 체제 실험 모두가 실패로 입증되었다. 냉전적 대립구도의 한축이 붕괴함으로 인해 냉전은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국내적 요인이었던 군부독재는 92년 문민정부, 97년~02년 김대중-노무현의 당선을 거치며 한국의 문민화 혹은 민주화는 ‘불가역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를 요약하면, ‘혁명의 시대’는 사라지고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혁명은 상대방의 절멸(絶滅)을 추구한다. 기존 질서의 부정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혁명 시대의 정치학은 절멸적 사고, 비타협적 사고, 반(反)정치적 사고, 체제 부정적 사고가 오히려 혁명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상주의적 정치관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시대의 정치학은 이와 달라야 한다. 개혁의 시대에는 현실주의적 정치관이 필요하다. 물론 장기적으로 이상주의적 꿈은 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힘을 통해 ‘점진적’ 사회변화를 일구어야 한다. 한마디로 냉철한 현실 정치적 마인드에 입각하여 점진주의적 해방을 기획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보다 높은 내공과 세련됨을 필요로 한다.

    민주노동당 시절 및 진보신당의 정치적 오류와 시행착오는 본질적으로 ‘개혁의 시대’에 ‘혁명의 정치학’을 털어버리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예컨대, 민주노동당 시절 사회운동정당론이 활개치고, 의원은 당직을 맡을 수 없게 만든, ‘공직자의 당직에 대한 겸직금지’ 등이 다수의 집합의지로 관철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혁명 시절의 열정이 너무나 뜨거워서, 그 뜨거운 열정에 자신들이 데어버린 것이다.

    이제 진보파는 ‘혁명정치 시대’의 이론-가치-정서-정치 전략을 폐기하고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 정치시대’의 이론-가치-정서-정치 전략을 적극적으로 채택해야 한다. △의회주의 △입법주의 △국민정당론 △적극적 연합정치는 모두 이러한 ‘개혁정치 시대의 정치학’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입 이후, 개별 의원들의 화려한 원내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적인 차원’에서는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누적하지 못한 핵심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정치행위 주체의 ‘시대적 간극’ 혹은 ‘시대적 낙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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