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삭기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과 송경동 시인.(자료=이은영 기자) |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인 기륭전자(주) 노사가 농성 1,895일만에 ‘노사합의서’를 작성하며 오랜 갈등을 마무리했다. 노사는 조합원 10명에 대한 고용보장에 합의해 사실상 노조 요구를 회사쪽이 수용한 셈이다.
고용보장, 유예기간 두기로
이로써 20일간의 단식과 18일간의 고공시위 등을 벌인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 등 조합원 10명은 6년 만에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기륭전자 노사는 지난 30일 오후 6시경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잠정합의에 도달했다. 조합원 10명에 대해 1년 6개월 후까지 순차적으로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번 합의에는 경영상의 이유로 1년 6개월 뒤에도 고용이 어려울 경우, 다시 1년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두기로 하는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늦어도 2014년 전까지는 조합원 10명 모두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사는 또 해고 기간의 임금과 위로금 명목의 화해협력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고용이 유예될 경우 생계비도 지급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사는 상호 제기된 가압류, 손해배상, 고소, 고발 등 모든 민․형사상 소송 등에 관하여 상호, 철회․취하하고, 합의 즉시 상호 취하서, 처벌불원 탄원서 등을 제출하며, 향후 상호 간의 민형사상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이를 묻지 않기로 했다.
기륭전자 측은 그간 직접고용만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지난 2008년과 2010년 2차례의 교섭에서도 잠정합의까지 이끌었으나, 매번 최동렬 기륭전자 회장의 ‘직접고용 반대’ 입장에 부딪혀 백지화됐다. 때문에 이번 기륭노사의 직접고용 합의를 이끌어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기륭전자 측은 노조의 농성이 장기화됨에 따라 외부 투자가 원활치 못했고, 주가도 떨어지는 등 기술개발에 필요한 자금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합의의 배경
이외에도 노동계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옛 부지를 매입한 코츠디앤디가 아파트형 공장 건설이 지연됨에 따라, 시공사인 한라건설로부터 손실 보전에 대한 압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자, 기륭전자에 손해배상 청구 의사를 밝힌 것도 노사 타결을 압박하는 직접적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지난 10월 13일 잠정합의 번복과 이후 강행된 굴삭기 투입으로 기륭사태가 또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회사는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같은 직접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노동조합이 기록적인 장기 투쟁을 어려움 속에서도 이어왔으며, 이와 함께 지속적인 연대가 이어져왔다는 사실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장기간의 투쟁 속에 회사의 회유책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조합원들은 단련돼왔다.
실제로 지난 13일 회사의 잠정합의 번복 후,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자회사로의 고용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노조는 이를 거부했다. 노조가 ‘참담하게’ 당한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2008년 노조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자회사로의 재취업안을 제안했지만, 회사는 당시 이를 거절했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자회사로의 고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며, 김소연 분회장은 “자회사로 들어갈 거였다면 투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임금이나 위로금을 포기하더라도 직접고용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조는 지난 2005년 투쟁 시작 이후 3번째 단식에 들어갔으며, 합의안 번복 후 공사 강행을 위해 진입한 굴삭기를 맨몸으로 막아 그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며 "이번이 아니면 죽겠다”는 각오로 대응했다.
간접고용자의 직접고용 쟁취 큰 의미
▲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1895일간의 투쟁을 이어오며 2차례의 고공농성과 3차례의 단식을 진행했다.(자료=정택용) |
이번 기륭전자 노사 합의의 가장 큰 성과는 ‘간접고용 노동자의 직접고용 쟁취’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정기간 유예기간을 둔 점이 “다소 아쉽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미 대공장은 물론 중소영세업체에서 간접고용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고용 쟁취는 실질적이며 동시에 상징적으로도 중요한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 분회장은 “유예기간이 있어 다소 아쉽기도 해도, 기륭전자로의 복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불법파견에 대한 책임을 기륭전자 측에 지우겠다는 노조의 입장이 관철됐다”고 말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한국사회에서 합법과 불법을 떠나 간접고용은 일반적 고용형태로 자리 잡은 상황이며, 특히나 중소영세공장이 밀집한 지역 공단에서는 불법파견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에,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정말 어려운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지난 7월 22일 대법원의 사내하청 노동자 불법파견 판결 과 맞물려, 투쟁을 통한 ‘직접 고용’ 쟁취라는 차원에서도 노동계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기륭전자의 합의가 당장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나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고용을 이끌어내는데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직접고용 투쟁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희망준 합의
이 소장 역시 이번 기륭노사 합의와 관련해 “실제로 간접고용 문제와 관련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불법파견 고용형태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즉 중소영세업체는 물론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까지 희망을 주는 합의”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이번 기륭전자 노사 합의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으로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승리했다는 점을 꼽고 있다. 현 정권 집권 이후 강도 높게 밀어붙인 노동유연화 정책, 공공부문 선진화 정책, 개정 노조법, 파견범위 확대시도 등 계속된 반노동정책에 노동계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이런 가운데 6년간의 싸움을 이어온 기륭전자의 합의가 장기투쟁 사업장의 또 하나의 희망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투쟁 당사자들에게는 ‘끝까지 싸우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이 많이 허물어진 게 사실”이라며 “기륭 합의를 계기로 반전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합의는 6년 동안 힘겨운 조건에서도 버텨오며 마음을 모아 싸운 조합원들이 만든 성과”이라며 “(고용기간 유예 등과 관련해) 유불리를 떠나 불법파견 판정까지 받고도 억울하게 노동조합의 깃발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개인적인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이 싸움이 옳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던 기륭 조합원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볼 때 이번 투쟁을 ‘절반의 승리’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1일 국회 조인식 후, 오후 4시경 가산동 기륭전자 구사옥에서 보고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며, 오는 5일 승리보고 대회를 끝으로 1895일간의 농성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1895일간의 기륭 투쟁의 발자취
2005년 7월 28일 이현주 조합원의 해고로부터 시작된 기륭전자 노사의 싸움. 당시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결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은 근무기간 1년 미만 노동자에 대해서도 전원 해고를 진행했으며, 노조는 그해 8월 24일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2차례의 고공농성과 3차례의 단식, 목숨을 내놓고 진행된 김소연 분회장의 94일간의 단식. 삭발, 한나라당 당사 진입, 원정투쟁, 삼보일배 등 그야말로 “안 해본 것 없이 다 한 싸움”이었다. – 2005년 7월 5일 노동조합을 결성(생산직 300여 명 중 정규직,계약직,파견직 함께 약 200여 명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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