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판 민주대연합 균열
        2010년 01월 20일 01: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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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우파 선거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가 51.61% 득표로 당선됐다. 국내 언론에서 ‘좌파’라 분류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합작’(스페인어로는 흔히 ‘콘세르타시온’이라 불림. 이하 ‘콘세르타시온’)의 후보이자 이미 1994~2000년에 한 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는 에두아르도 프레이 후보는 48.39%를 얻었다.

       
      ▲ 세련된 기업가의 이미지로 대선에 승리한 우파 후보 세바스티안 피녜라

    아니나 다를까 국내 우파 신문들(조중동)은 칠레에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우파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경축의 나팔을 불었다. 더 나아가 중남미의 좌파 붐이 이제는 온두라스 대선에 이어 칠레 대선의 우파 승리를 통해 우파 붐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며 축배를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확실히 우파의 승리다. 한데, 그렇다고 곧바로 좌파의 패배라고 할 수 있을까? 프레이 후보는 과연 ‘좌파’ 후보였는가? 칠레 좌파가 민주화 이후 다시 한 번 위기에 몰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콘세르타시온’의 이번 선거 패배가 그 계기라고 할 수 있을까? 진실은 우파 언론들의 호들갑 그 이면에 있다.

    ‘경제 유능 세력’으로 거듭난(?) 칠레 우파

    우선 피녜라가 승리한 배경부터 살펴보자. 그러자면 우선 칠레의 우파 정당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칠레 우파의 최대 주주는 ‘독립민주연합’(UDI)이다. UDI는 대선과 동시에 실시된 총선에서 하원 의석 37석을 획득해, 원내 제1당이 됐다. 이 당은, 우리로 치면, 한나라당의 민정당계쯤 된다. 피노체트 군부 정권의 적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피녜라는 UDI 소속이 아니다. UDI와 함께 ‘변화를 위한 연합’의 양대 축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 혁신’(RN)이라는 정당 소속이다. RN은 UDI보다는 덜 꼴통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당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당시부터 피노체트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UDI와는 선을 그었다. 이른바 ‘민주적 우파’가 자칭 타칭 이 당의 별칭이다.

    과거 대선에서 우파 선거연합의 후보로 ‘콘세르타시온’ 후보와 맞붙은 것은 UDI 소속의 호아퀸 라빈이었다. 그는 ‘콘세르타시온’ 후보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매번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UDI가 아닌 RN의 피녜라가 나섰다. RN이 갖고 있는 ‘민주적 우파’의 이미지가 우파 단일후보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피녜라 개인의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경제학 교수 출신에다 재벌 기업가다. 지상파 TV 채널을 소유한 미디어 재벌이고, 프로 축구단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한 마디로 ‘칠레의 베를루스코니’다.

    비판가들의 눈으로 보면야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악몽인 것처럼, 피녜라 역시 칠레 민주주의를 대자본에 헌납할 재앙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눈에 그는 침체 상태인 칠레 경제를 살릴 ‘경제 유능 세력’의 상징이다. 어찌 보면 2007년 한국 대선의 판박이 같기도 하다.

    사실 피녜라 역시 친지들이 피노체트 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바 있는 명문가 출신이다. 더구나 그가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피노체트 정권의 소수 대자본 살리기 정책 덕분이었다. 그는 피노체트 집권기에 칠레에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들여와 떼돈을 벌었다. 그는 분명 ‘피노체트의 자식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어쨌든 군화발로 사람들을 짓밟았던 경력은 없다. 그에게는 마치 빌 게이츠를 연상시키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깔끔하고 개명된 자본가의 모습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번에 칠레 국민들이 선택한 ‘우파’는 이러한 우파였다. 이번 선거 결과는 우파의 이미지 변신의 승리였던 것이다.

    칠레판 민주대연합 ‘콘세르타시온’

    한편 이번 대선의 패자인 ‘콘세르타시온’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칠레의 독특한 정당 구조를 짚어보아야만 한다. 조금만 들여다봐도, 단순한 좌우 대립 구도식 관전을 불허하는, 중도파, 좌파 내부의 복잡한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콘세르타시온’은 피노체트 정권 말기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이 정당 연합에는 기독교민주당, ‘민주주의를 위한 당’(PPD), 사회당, 급진사회민주당 등이 속해 있다.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당 조직을 유지하면서 서로 경쟁하지만, 대선과 총선에는 항상 정당 연합 차원에서 공동 대응한다.

    칠레 현대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이 조합이 얼마나 어색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번에 ‘콘세르타시온’ 후보로 나선 프레이는 기독교민주당 소속이다. 기독교민주당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좌파 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이다. 내부에 사회민주주의 추종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 성격은 미국 민주당 정도에 가깝다.(혹은 한국의 민주당?)

    과거 아옌데 민중연합 정부 시절 기독교민주당은 여당인 사회당, 공산당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며칠 전에는 군부의 행동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해서 쿠데타를 촉발하고 이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 전임 대통령이자 콘세르타시온 대선 후보 에두아르도 프레이

    이번에 ‘콘세르타시온’ 후보로 나선 프레이는 바로 당시에 아옌데의 정적이었던 전임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반의 아들이다. 프레이 전에 ‘콘세르타시온’ 소속으로 민주화 이후 첫 민선 대통령이 된 파트리시오 아일윈도 쿠데타에 동조했던 기독교민주당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이 사회당과 함께 정당 연합을 구성하고 있다. 과거의 적과 동지가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기독교민주당을 포함한 반아옌데 우파 세력이 불러들인 군부 독재의 악몽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가 장기화되자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유일 합법 야당이었던 기독교민주당도 반정부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의 쿠데타 옹호자들이 이제는 인권 투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피노체트 정권 말기에 사회당 세력과 손잡고 ‘콘세르타시온’을 결성했다. 한 마디로 칠레판 민주대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 이르기까지 칠레 정치를 지배한 것은 단순한 좌우 대립 구도가 아니다. 피노체트 정권의 악몽을 사이에 두고 우파 일부와 다른 우파 일부 및 좌파가 대치한 형국이다.

    한편 기독교민주당의 변화만큼이나 사회당의 변화도 이러한 좌우합작의 배경이 되었다. 아옌데 정부가 붕괴한 이후 사회당은 지하 민주화 투쟁과 해외 망명 생활의 시련을 견뎌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옌데 정부에 대한 평가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전망을 놓고 당 내 분파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치열해졌다.

    기나긴 논쟁과 분열 뒤에 결국 당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호르헤 아라테가 주도하는 당 내 우파였다. 이들은 과거의 사회주의 시도 대신에 이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웠다.

    80년대 후반까지도 사회당은 아직 국내에서 불법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군소 좌파 정치조직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한 당’(PPD)이라는 합법 정당을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당을 통해 기독교민주당과 정당 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민주화 이후 사회당은 합법화됐다. 그러나 PPD는 이미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자립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회당과 PPD는 서로 다른 독자 정당으로서 ‘콘세르타시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두 당에는 아직 상당수의 이중 당적자가 존재한다. 바첼렛 현 대통령 전에 대통령을 역임한 리카르도 라고스도 사회당과 PPD의 이중 당적자다. 독특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민주화 이후 계속 정권을 잡아온 ‘콘세르타시온’은 우경화된 사회당과 원래 중도 우파였던 기독교민주당 사이의 정책 합의 기조를 쭉 유지했다. 그 핵심은 피노체트 정권의 시장지상주의 경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다만 약간의 사회 개혁 조치로 이를 보완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피노체트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도, 이번 대선을 포함해, 칠레 유권자들이 선택한 것은 결코 좌와 우 사이의 선택이 아니었다. 원판 피노체트주의와 그 ‘민주화’된 수정판 사이의 선택이라고 해야 맞다. 칠레판 민주대연합은 이러한 제한된 양자택일 구도가 계속 유지되는 데 아주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변화의 조짐?

       
      ▲ 대선에서 젊은 돌풍을 일으킨 무소속 마르코 엔리케즈-오미나미 후보

    ‘콘세르타시온’의 첫 번째 대선 패배는 이런 구도에 커다란 균열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대선 과정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났다. 첫 번째 조짐은 사회당을 탈당한 무소속 마르코 엔리케즈-오미나미 후보가 불러일으킨 돌풍이다.

    엔리케즈-오미나미는 본래 사회당 하원의원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민주당 소속의 구 정치인 프레이가 ‘콘세르타시온’의 단일 후보로 결정되자 당을 탈당하고 과감히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20.14%라는 놀라운 지지를 얻었다(지난 해 12월에 치러진 1차 선거 결과. 프레이 후보의 득표율은 29.60%였다).

    엔리케즈-오미나미는 특이한 가족사의 소유자다. 그의 친부는 아옌데 정부 시절 사회당, 공산당보다 더 왼쪽의 입장에서 아옌데 정부를 비판했던 ‘혁명좌파운동’(MIR)의 지도자 미구엘 엔리케즈다. 미구엘 엔리케즈는 쿠데타 이후 쿠데타군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고아가 된 마르코를 양자로 삼은 것은 사회당의 저명한 지도자 카를로스 오미나미였다. 그래서 마르코는 엔리케즈-오미나미라는 두 개의 성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엔리케즈-오미나미 후보가, 자신의 생부처럼, 주류 좌파 세력을 ‘왼쪽에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당의 중도좌파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프레이보다는 좌파였다. 그는 프레이의 우파 배경과 구 정치인 이미지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또한 젊은 층의 공감을 살만한 문화 좌파적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엔리케즈-오미나미 후보 자신이 아주 젊은데다가(1973년생이다!) 영화 감독 출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 좌파 이미지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엔리케즈-오미나미의 정치적 장래가 어떨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과감히 깨버린 칠레판 민주대연합 구조(‘콘세르타시온’)를 더 이상 예전 그대로 유지하기는 힘들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엔리케즈-오미나미의 돌풍에 호응한 민심은 바로 그러한 변화에 대한 기대였다.

    두 번째 조짐은 ‘콘세르타시온’ 바깥의 좌파를 재편하려는 시도로부터 나타났다. 공산당, 휴머니스트당, 기독교좌파당 등의 정당 연합인 ‘포데모스’(“함께 하면 칠레를 위해 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긴 문구의 약자)의 후보 호르헤 아라테가 6.21%를 득표한 것이다.

    공산당은 아옌데 정부의 주축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칠레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정당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콘세르타시온’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 계속 주변화됐다. 이 당은 20여 년간 우파 선거연합과 ‘콘세르타시온’의 각축 속에서 한 석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장지상주의 정책에 맞서 새롭게 성장하는 신노조운동과 긴밀히 결합해 제도 정치 바깥에서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휴머니스트당, 기독교좌파당 등 다른 군소 좌파 정당들과 함께 ‘포데모스’라는 정당 연합을 결성해 ‘콘세르타시온’과 경쟁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포데모스’의 단일 후보인 

       
      ▲사회당의 역사적 지도자이자 이번 대선에서 급진좌파 후보로 나선 호르헤 아라테

    아라테가 사실은 사회당의 역사적 지도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위에 잠시 이름이 나온 것처럼, 그는 민주화 시기에 당 내 우파의 입장에서 사회당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피노체트주의 경제 기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당에 반기를 들고 2009년 1월 일군의 동지들과 사회당을 집단 탈당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아옌데주의’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포데모스’에 참여했고, 그 지도자 아라테가 ‘포데모스’의 예비 경선에서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것 역시 엔리케즈-오미나미 돌풍과 마찬가지로 칠레 좌파 정당 구조가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칠레 사회 세력의 실제 대립 구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피노체트 대 반피노체트’ 식의 정당 구조를 지속시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콘세르타시온’ 내에서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 한 예가, 대선과 동시에 실시된 총선에서 ‘콘세르타시온’과 ‘포데모스’가 일시적 선거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그 결과 공산당이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3석의 하원 의석을 확보했다.

    대선 결과를 놓고 ‘콘세르타시온’ 소속 정당들이 어떠한 평가를 내놓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포데모스’와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선거연합을 결성한 것 자체가 상황 변화를 일정하게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과연 칠레 좌파의 전면적인 재구성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남미 좌파 붐의 지속 여부에 대한 진정한 판단 준거는, 당장의 선거 결과가 아니라, 이러한 근본적 재구성의 의미 심장한 흐름들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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