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속하고 통렬한 복수? 부질없다"
        2009년 10월 06일 04: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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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지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아내의 친구와 바람이 난 남편. 이것만 해도 충분히 16부작 드라마 한편을 찍을만 하건만, ‘이놈의 남편새끼’는 한 술 더떠 이혼을 거부하는 아내를 죽이려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내. 무엇이 정의이겠는가? 맞다. 복수다. 누가 이걸 욕하겠는가?

    복수의 이유는 분명하다. 나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남편이 만들지도 모르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막고, 남편과 같은 일을 꿈꾸고 있는 또 다른 미친놈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한다.

    자, 응징 시작. 복수를 위해 단 며칠만에 외국어를, 그리고 미술, 메이크업, 재즈댄스를 섭렵한 후. 점 하나를 찍고 남편에게 접근한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남편. 접근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이 죽이려 했던 아내인 걸 전혀 모르고 있다. 통쾌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 스토리를 막장이라 욕한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가?

    답 : 응징과정(방법)
    정답해설 :  지문은 인기드라마였던 ‘아내의 유혹’을 요약한 내용이다. 남편 교빈(변우민)에 복수를 하는 아내 은재(장서희)의 얘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남편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이 드라마가 ‘막장’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통렬한 복수를 위해 드라마의 디테일을 완전히 뭉갠 탓이다.

       
      ▲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한 장면

    아무리 응징을 위해 위장이 필요하다지만, 꼴랑 점 하나 찍은 걸로 극중 남편(변우민)과 시청자가 속아주길 바란 점이나, 아내(장서희)가 며칠 만에 모든 능력을 완비하는 걸 시청자가 납득하길 바란 작가의 무식&배짱이 비난의 포인트였다.

    하지만, 워낙 드라마 전개가 빠르고, 복수가 통렬한 터라 사람들은 ‘막장’이라 욕하면서도 이 드라마를 봤고.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생각해 볼 문제 – ‘나영이’사건 혹은 ‘조두순’ 사건.

    어린이를 참혹하게 성폭행하고도 12년형을 받은 사건(세간에서는 ‘나영이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조두순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왠지 둘 다 거북한지라 ‘12년형 사건’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12년형 사건’의 후폭풍을 지켜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 적어도 속세에 사는 사람 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뉘우침도 없는 범인에 대해 이러한 관대함을 보일 사람은 없을 거다.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둥, 용서하는 게 결국 이기는 거라는 둥 – 이거다 개소리다. 가해자들이 발 뻗고 편안히 잠들기 위해 고안해 낸 개수작이 아닐까 한다.) 단언하건데, 응징이 필요하다는 데는 좌파,우파를 떠나 다들 동의를 하는 부분일 거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다. 응징의 방법. 아무리 복수가 필요하다지만, 점 하나 찍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도 찝고, 뼈도 깎고, 코도 세우고 – 챙겨야 할 디테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형벌의 역할. 피해자와 범죄에 분노한 타인들의 응징욕구를 채우는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게 옳은 건가 그른 건가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 역할을 부정하면 그 다음 문제가 발생해버린다. 바로, 법질서 전체에 대한 불신. 이번 ‘12년형 사태’에서 형벌의 이러한 기능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12년 형이 불충분하다 생각한 사람들은 일제히 판결에 관여한 검사, 판사부터 형벌을 규정한 법정형까지 비난하고 나서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형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당해 범죄자가 재범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래서 제2~제3의 피해자를 방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가혹한 형벌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범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혹시 기억하는가? 한 2년전쯤 일산의 한 아파트에서 괴한이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던 사건. 그 사건의 범인은 동종전과로 10년형을 살고 나온 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CCTV가 있는데도 범의를 억제하지 못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응징욕구만을 충족하는 데 그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암시하는 사례라 하겠다. 만약 이 인간이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10년 전. 단호한 응징만이 아니라, 이 인간이 출소한 이후 재범을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가 필요한지 좀 더 세심하게 고려했더라면 일산의 어린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12년형 사건’의 후폭풍은 어떠한가? 신속한 전개, 통렬한 복수만을 생각할 뿐. 챙겨야할 디테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건이 터지자 마자 나온 한나라당의 ‘유기징역 상한 폐지’ 주장. 그리고 ‘응징하고 싶지만, 화학적 거세는 너무하다’라는 인터뷰를 한 진중권씨의 글에 ‘찢어죽인다는 둥’ ‘악마 조가놈을 사형 시키자는 둥’ ‘진중권 딸도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는 둥 리플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이것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세심한 고려는 온데간데 없고, 강력한 처벌을 해야한다는 주장만 일방적으로 나오고 있고, 한 술 더떠 유화적인 의견을 내놓은 진중권 씨에게 때려죽일 듯 달려들고 있다.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라면, 다양한 논점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나와야 할 텐데 이러한 논의가 원천봉쇄되고 있는 형국이다.

    살 맞대고 산 남편 앞에 꼴랑 점 하나 찍고 나타난 부인. 이게 과연 효과가 있는 대응책인지 없는 대응책인지에 대한 관심도 없이, “에구 속시원하다” “남편 새끼 혼쭐이 나겠구만” 박수를 치며 통쾌해 하는 ‘아내의 유혹’ 시청자들과 ‘12년형 사건’에 무조건적인 분노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건만, 막장드라마를 욕하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왜들 이러나? 분노하는 것 좋다. 물론 다들 정의감에 이러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잖는가? 자꾸 욕해도 막장드라마가 나오는 이유는 뭐겠는가?

    ps – 점 하나 찍고 서민행세 하는 그 양반. 점 하나 찍은 대책을 들고 이 판에 끼어들었다. ‘막장’의 제왕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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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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