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 민주주의에서 꽃피다
        2009년 09월 07일 04:2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부조> BC 440년경

    아테네의 발전과 소피스트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소피아(sophia)’의 인칭명사로서 ‘지혜로운 자’ 혹은 ‘현명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교육자’를 의미하는 이 단어의 특수한 사용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 그리고 많은 다른 철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기원전 5세기 말엽부터이다.

    그들은 인간의 탁월한 자질을 의미하는 ‘아레테(arete)’를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훌륭한 정치가나 웅변가가 되기 위한 훈련의 한 부분으로 문학뿐만 아니라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의학, 기하학 등을 가르침으로써 대학이 없던 시대에 훌륭한 교육을 제공했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프로디쿠스 등이 대표적으로 소피스트에 속하는 사상가들이다.

    보통 서양철학사에서 소피스트는 부정적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는 경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를 거치면서 절대론적 사고가 서양철학을 지배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상대론적인 사고를 대표하는 소피스트들은 비판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특히 소피스트들이 변론술을 가르치면서 보수를 받은 것이 부정적인 식식을 확산시키는 데 좋은 소재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당대의 소피스트인 히피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모았는지 자랑한다.

    “난 순식간에 시칠리아에서 150미나를 벌었고, 더구나 그 중 20미나는 달동네인 이니코스에서 벌었소.” 화폐 단위이자 무게 단위였던 1미나는 요즘 금값으로 환산하면 830만 원 정도에 해당한다. 프로타고라스의 경우는 한 과목에 2탈렌트를 받았다. 1탈렌트로 군함 한 척을 건조할 수 있었다는 화폐가치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프로타고라스는 당시 제일류의 조각가였던 피디아스보다 열배 이상이나 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수업료의 문제는 그들이 가진 철학적인 입장과는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에 해당한다. 이를 이유로 그들의 사상이 부당하게 왜곡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싼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들어오려는 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은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중 하나인 아테네는 귀족정, 참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혈족에 기초한 전통 사회가 물러가고 아테네에는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열렸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토론을 하고 다수를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국가의 중요한 사항이나 선출이 토론을 통한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느냐는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변론술은 어떤 세력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한 개인에게 있어서 입신출세를 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능력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조각인 <파르테논 신전 부조>는 당시 아테네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 신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수염이 덥수룩한 신과 청년의 모습을 한 신이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 모두 손짓까지 사용해가며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다.

    신들의 모습조차 인간에게 무언가 벌을 내리거나 명령을 하는 장면이 아니라 토론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할 정도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용솟음치고 있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른 쪽으로는 원래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기대고서 파라솔을 든 에로스를 묘사해놓았는데, 지금은 많이 파손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신에 의한 통치를 벗어나 인간에 의한 통치 이념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는 고대시대 인간 이성의 개화기를 상징한다. 이는 미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파르테논 신전 부조>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집트 미술은 다분히 정형화된 표현양식을 보여준다. 이집트 신전이나 피라미드의 벽화, 조각을 보면 개인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거의 동일한 얼굴과 동작의 표현이 나타난다. 이집트 미술은 모든 영역에서 전통양식을 따르려는 관례가 있었다. 그래서 확고한 이집트 양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 양식적 특징은 언제나 원형과 패턴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손발과 얼굴은 옆을 향하고 있으나 어깨, 가슴,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대상을 표현하는데 있어 세부의 상세한 표현보다는 대상의 본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표현 기술의 부족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몇몇 작품들을 보면 이집트에서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집트인들의 생생한 표현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서기좌상>(書記坐緣)이다.

    당시 식자층으로 존경을 받은 서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전체적으로 이집트 미술이 보여주는 경직성을 갖고는 있으나 세부의 표현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편이다. 살집이 잡혀있는 가슴이나 배의 묘사도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특히 눈과 코, 입, 귀의 표현을 보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지금 당장 어떤 말을 할 것만 같이 생생하다.

       
      ▲ 이집트 <서기좌상> BC 2498~2345

    그런데 왜 이집트인들은 이 정도로 발달된 표현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단순하게 보일 정도로 획일적으로 정형화된 표현에 치중한 것일까? 이것은 기술적인 한계나 막연한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기능성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의 권위를 체현한 절대적 존재였고, 미술은 파라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그 종교관도 현세적이기보다는 사후 세계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실에서 보이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이 아니라 추상화된 묘사를 통해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는 기능적 목적이 지배적이었다.

    이집트에서의 조형 감각은 종교관과 전제주의적인 권력의 성격에 의해 전통과 형식 속에 고착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해 그리스는 달랐다. 그리스인들 역시 국가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였으나 민주정의 실시에서 보이듯이 일정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다.

    종교도 현세적인 성격이 강해서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신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섞여있기조차 했다. 인간만이 자연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고 있던 그리스인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고 이를 더 완전한 이상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려 했다. 이에 따라 미술적인 조형감각은 사실적이며 동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파르테논 신전 부조>를 보면 인물의 묘사가 상당히 사실적이다. 좌우에 있는 남녀의 얼굴을 보면 이집트 회화나 부조에서 나타나는 측면의 묘사를 보여주고 있지만 중앙에 있는 남성은 얼굴을 살짝 틀어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보여준다.

    왼편 남성의 몸도 이집트적인 좌우대칭을 벗어나서 현실적인 조형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옷을 잡고 있는 여인의 섬세한 손과 가슴의 굴곡을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몸을 휘감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그리스 인들의 사실주의적 표현이 어느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었던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리스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인 사고는 본래적인 것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상당 기간 신화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미술도 그 영향을 받아서 신화가 지배하던 시기의 그리스 조각들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형화되고 경직된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자리를 잡고 나서야 새로운 표현양식이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리스인들에게 누가 본격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이성의 세례를 주기 시작했을까? 그 첨병 역할을 했던 것이 자연철학자들이었다면 소피스트는 인간 중심 사고를 활짝 꽃피우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그리스인들의 인식이 신비스러운 주술적인 힘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면, 소피스트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인간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정치질서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와 자연을 벗어나서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소피스트는 그 이전까지 그리스 철학의 흐름을 두 가지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나는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연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나가고자 하였다.

       
      ▲ <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철학자라 할 수 있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였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타고라스>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아테네에서 종교를 반대하는 언동 때문에 신을 부정하는 자로 고소되었고, 그의 저작인 <신들에 관하여>는 불태워지기도 했다.

    이 저작의 현존하는 부분은 프로타고라스가 신들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신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또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그들의 형상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제의 모호함과 인생의 짧음 등 확실한 지식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는 “사람에게 삶을 위한 지혜는 전해지게 되었지만, 나라나 사회를 이루기 위한 지혜는 주지 못하였네. 그것은 제우스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세.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제우스가 있는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또한 제우스의 호위병들은 매우 무서운 존재였네. 그는 숨어 들어가 헤파이스토스의 불과 아테네의 지혜를 훔쳐내어 사람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일세. 이렇게 해서 인류에게는 생존의 길이 열리게 되었네”라고 주장한다.

    지혜를 통해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립하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법이 귀족계급의 대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이 정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합의의 결과라는 학설을 밝히려고 하였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소피스트만은 아니었다. 자연철학자들 역시 이성을 통해 자연의 근원을 탐구함으로써 그 이전까지의 신비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피스트는 신을 넘어서는 것과 함께 동시에 자연철학의 한계도 함께 넘어서고자 하였다.

    서양 철학사에서 소피스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철학에서 인간철학으로의 전환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우주만물의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근원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피스트에게 주된 철학적 관심은 인간의 정신과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자연철학자들이 만물의 척도를 자연의 근원과 법칙에서 찾으려고 했다면 소피스트는 만물의 척도를 인간에게서 찾으려 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라는 주체가 판단을 위한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피스트들은 그들의 관심을 신이라는 추상 관념으로부터, 또한 자연이라는 외적인 대상으로부터 인간 자신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로 전향시키는 역할을 했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는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일정하게 독립된, 때로는 자연과 대립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은 문화나 법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고, 내부의 분열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가 보기에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치이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때문에 프로타고라스는 금지와 형벌, 정의가 인간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 그리스 항아리그림 <글을 읽는 여인>(왼쪽)과 <글을 배우는 소년>

    소피스트들은 신이나 자연을 넘어서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지혜를 획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교육을 꼽는다. 특히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시켜나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

    프로타고라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는 그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만을 배우게 될 것이며 다른 쓸데없는 것들은 배우지 않게 될 걸세. 그렇다면 아에게서 배우는 것이란 어떤 것이겠나? 그것은 바로 자기 집안을 올바로 다스리는 일일세. 그리고 공공 사무를 처리하거나 논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이고 그 밖에도 가장 유능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과정을 익혀주는 것이라고 하겠네.”라고 한다.

    그리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소피스트들이 그리스 인문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리스에는 일종의 교육 부흥이 있어났다. 당시 교육의 열기는 그리스 항아리 그림인 <글을 읽는 그리스 여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한 여성이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프로타고라스는 “교육에는 소질과 연습이 필요하다. 배움은 젊을 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글을 배우는 소년>에서 보이듯이 당시에 소년 시절부터 교육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피스트와 직접 민주주의의 발전

    교육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은 단지 소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 시민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정치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치적 능력은 교육을 통해 계발되고 발전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수행할 수 있는 평균적인 시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훌륭한 인간 혹은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는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덕성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라며 시민에 대한 교육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반박하면서 “토론 대상이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덕성에 관계되고 정의와 절제에 의해 견제되어야 할 경우에는 어떤 사람의 의견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당연한 일일세. 인간은 본래 누구나 그 덕을 분배받고 있네. 나라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말일세.”라고 강조한다.

    그리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정치적인 결정에 필요한 덕성을 갖추고 있고 또한 이를 교육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 이전까지의 귀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 지금까지 말한 신화나 이론으로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이 밝혀졌으며, 또 실제로 아테네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의 자식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자식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네.”라고 한다.

    또한 “너의 나라 시민들은 그가 대장장이든 구두수선공이든 국가적 업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과 이러한 능력은 가르칠 수 있고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아무리 비천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더라도 그리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교육을 통해 중요한 결정에 직접 참여할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태어난 가문과 타고난 재능을 중요시하던 전통적인 관점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으며, 각 개인은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의 재능을 계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 그리스의 <아고라>

    그런 점에서 그의 교육 이념은 일반시민교육, 즉 평등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 기술이 부재한 인간의 상태를 이기적 상태로 이해했다. 오직 자기만의 생존과 이익에 관심을 갖는 이기성에 기초해서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가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등한 시민교육을 통해 누구나 정의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익히고 시민들에게 부여된 의무, 즉 의회와 법정에 참여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정치적 결정 사항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중요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반영한다. 출생과 직업 때문에 시민이 국가기관에 종사하는 것에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방식으로 국가기관에 종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사고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변론술은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격하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의사를 반영하는 방법이 평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소수의 능력이 아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법적·정치적 자격과 지위를 부여받을 때 모든 시민에게 정당한 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의 형성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 된다. 그리스 시민들은 중요한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결정이 필요할 때면 공공의 광장 역할을 하던 <아고라>에 모여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민 스스로가 폴리스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소피스트의 변론술은 단순한 ‘궤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합리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장황한 문학적인 수사와 신의 권위에 의존하는 수사를 넘어서서 명확하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소피스트의 변론술은 논의에 있어서 호메로스의 시적 전통을 간결하고 명확한 산문 형태로 바꾸었다. 대표적인 소피스트에 해당되는 고르기아스가 레온티노이의 사절로서 아테네 의회에서 한 연설은 그 내용보다도 언어적 특징 때문에 주목받았다고 한다. 그가 구사한 명확한 수사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을 경악시킬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아테네 사회가 변론술에 집착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피스트와 상대론적 인식

    소피스트의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상대론적 사고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할 때,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각각 다르므로 인간이 처한 제각각의 상황에서 사물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대론적 사고를 구체화하여 그는 <프로타고라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네도 알다시피 음식이나 약이나 그 밖의 많은 것이 어떤 것은 사람에게 해롭고, 어떤 것은 사람에게 유익하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네. 그리고 사람에게는 도움도 해도 되지 않지만 말에게는 유익한 것이 있고, 소나 개에게만 유익한 것도 있네. 그런가 하면 그런 동물에게는 유익하지 않지만 나무에게는 유익한 것이 있네.

    또 같은 나무라 하더라도 뿌리에는 유익하지만 싹에는 해로운 것이 있네. 예컨대 퇴비 같은 것이 그러하네. 퇴비는 어떤 식물이든지 그 뿌리에 주면 이롭지만, 새싹이나 새 가지에 뿌리면 모두 말라버리게 되네. 또한 올리브기름은 식물이나 동물의 털에는 큰 해를 끼치지만, 사람의 보발이나 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유익한 것일세.

    이와 같이 선이란 복잡하고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 마지막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올리브기름은 신체의 외부에 대해서는 유익하지만 신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크게 해로운 것이라네.”

       
      ▲ <고르기아스>

    고르기아스 (Gorgias)는 상대론적 진리관을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까지 명확하게 확장한다. 그는 “어떠한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비록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원하거나 생성되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성되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로부터 또 비존재로부터도 어떤 것은 생성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고르기아스는 <헬레네의 변론>에서 상대론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직접 실현해보이고 있다. 트로이 전쟁의 동기가 되었던 헬레네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론적 인식을 논증한다.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한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다툼에서 심판자 역할을 했던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 그리스 조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라오콘>일 것이다. 당시 트로이의 제사장이던 라오콘이 그리스의 계략을 알아차리게 되자, 그리스 편이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뱀을 보내어 두 아들과 함께 그를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뱀에 칭칭 감겨 몸부림치는 인체의 역동적인 동작, 특히 뱀에 물린 라오콘의 경직된 옆구리 근육, 불시에 뱀에 감겨 공포로 가득 찬 그의 표정 등의 묘사가 놀랍기만 하다, 또한 다리의 근육과 핏줄은 금방 터질 것만 같이 생생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보고 베드로를 조각했는데,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라오콘>의 묘사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자기 작품을 마구 내리쳤다고 한다.

       
      ▲ <라오콘> BC 150~50년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헬레네로 인해 10년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그녀를 악녀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었다. 이 악녀 헬레네를 고르기아스는 결코 악녀가 아니라고 변론한 것이다. 그는 헬레네가 트로이에 납치된 것은 운명이나 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는데, 인간이 신의 의지나 운명을 미리 알고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또한 폭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는데, 폭력은 휘두르는 사람이 나쁜 것이지 그 희생자는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헬레네가 애욕의 포로가 되었는데, 애욕, 즉 에로스는 신의 일종으로 인간의 의지로서는 항거하기 어려운 질병 같은 것이니 이것에 걸리는 것은 죄가 아니고 불행이기 때문에 헬레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이 논증을 통해 고르기아스는 절대의 악도 절대의 선도 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조금 입장을 달리하면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된다는 것이다. 소피스트의 상대론적 태도는 그들의 경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은 아테네가 아닌, 외국 태생으로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아테네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행하던 도중 많은 나라를 보고 풍속이나 관습이 나라에 따라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언급 속에는 "스파르타에서는 소녀가 체조를 하거나 속옷을 입지 않고 걸어 다니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오니아에서는 보기 흉하다고 생각한다"라거나 "마케도니아에서는 딸은 연애를 해도, 남자를 사귀어도 좋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양쪽 모두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말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다양한 여행 경험이 소피스트를 자연스럽게 상대론적 인식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소피스트의 상대론적 태도는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국가>에서는 절대적인 올바름과 정의, 즉 보편타당한 덕과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 맞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불과한 것이므로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선생께선 올바른 것과 올바름, 올바르지 못한 것과 올바르지 못함에 관해서도 그토록 캄캄하셔서 다음과 같은 사실조차도 모르고 계실 정도입니다. 말하자면 올바름과 올바른 것이란 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와 통치자에게 편익인 것이지만 복종하며 섬기는 자에게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올바름과 올바른 것이란 실은 강한 자와 통치자에게 편익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특히 참주 정치가를 예로 들어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이는 남의 것을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깡그리 하죠. 이런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의 일부를 어떤 사람이 몰래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처벌을 받고 큰 비난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신전 절도범, 납치범, 가택 침입 강도, 사기꾼, 도둑이라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못된 짓들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그런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 받은 사람이라 불리지요.”

    진리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은 보편적인 진리는커녕 대체로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배자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혹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고 있다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절대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진리나 도덕을 통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일반 사람들은 덕이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보고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소피스트와 세계시민사상

       
      ▲ <소피스트를 묘사한 판화>

    소피스트의 상대론적 진리관은 세계시민사상의 가능성을 여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도시국가를 표현하는 폴리스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폴리스에 소속된다는 것 자체가 한 개인의 원천적 특권이자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자기 폴리스를 떠나서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 간주되지도 못하였고, 추방이나 망명 등 어떤 이유로든 폴리스라는 정치, 법률 조직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그만큼 폴리스의 법과 도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대해 소피스트의 한 사람인 히피아스(Hippias)는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는 “법률은 만인의 폭군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수없이 우리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히피아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특정한 폴리스의 법에 국한되는 사고를 비판하면서 세계시민사상의 지향을 보여준다.

    "이 자리에 계신 시민 여러분, 제 생각에는 우리 모두가 친척이요 친구요 동포 같은 시민입니다. 법률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인간이라는 자연본성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유사한 것은 본성으로 유사하며 인류를 제압하는 법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본성에 어긋나게 강요하는 일이 흔합니다." 일종의 탈도시국가적 사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국가적 사고의 틀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는 견유학파의 사상과 일정한 친근성을 가진다. “개같이 사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견유학파는 보다 본격적으로 세계시민사상을 펼쳤다. 이들이 개같이 사는 사람들로 불렸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폴리스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 순수한 자연인으로서 처신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들 사이의 인습적 장벽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견유학파를 대표하는 디오게네스(Diogenes)는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나는 세계시민이요, 세상이 내 도시국가"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혹은 비극 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나는 도시도 없고 집도 없이, 조국으로부터는 떨어져 나와 떠돌면서 하루의 음식을 구걸할 따름이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크라테스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면서도 재산과 사회 신분을 기꺼이 포기한 사람답게 "내가 나온 지방으로 말하면 빈곤과 암울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방의 시민이올시다. 스승 디오게네스가 곧 나의 도시국가올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스 사회에서 절대론적 사고는 국가라는 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이른바 주류철학은 고대국가의 형성기에 필요로 되는 국가의 원리와 법률을 뒷받침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국가철학적인 요소가 강했다.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혹은 씨족이나 부족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인위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황이나 조건과는 무관하게 확정적인 기준 역할을 하는 절대론적 사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국가라는 절대 보호막을 의식의 지평에서나마 극복하는 일은 상대론적인 사고에 의해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