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희망’ 글 싣는 <레디앙> 납득 안돼
        2009년 09월 07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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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희망’의 지난 글을 보고 다시 반론을 펴야 할 지 망설였다. 내 비판을 반박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궤변의 정도는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남은 쟁점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반론을 펴기로 했다. ‘민주희망’의 대안이 엉터리라면, 나를 비롯한 맑스주의 좌파들의 대안은 어떤가 밝힐 필요도 있다.

    이번 글에서 ‘민주희망’은 주로 제 삼자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혼란스런 논지와 궤변을 변호한다. 마치 인기 개그 프로에 나오는 “그럼 이 분들도 뭐라 할 수 있어요?”라는 대사를 연상시킨다.

    ‘민주희망’은 내가 자신에게 “정형근 ‘찬양’”이라는 누명이라도 씌운 듯이 반발하더니 이어지는 글의 절반이 정형근 칭찬이다. 나아가 이젠 광주 학살을 지지한 “원조보수” 김용갑까지 “격 있는 보수”라 일컫는다.

    그리곤 이 황당한 ‘반공 우익’ 칭찬 릴레이에 심상정 전 대표와 손호철 교수까지 끌어들인다. 욕을 먹어도 혼자 먹긴 싫다는 것인지, 심 전 대표를 끌어들이면 비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시도가 ‘반공 우익을 찬양’하는 행위에 면죄부를 마련해 줄 순 없다. 비판 받아야 하는 건 심 전 대표와 손호철 교수의 김용갑에 대한 잘못된 언급이지 내가 아니다.

    진보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반공 우익 정치인 칭찬은 어디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지금은 우익 및 한나라당과 진보․개혁적 대중의 간극이 매우 멀어져 있는 상황이라 심 전 대표도 ‘민주희망’의 이런 ‘끌어들이기’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이념”을 거부한다면서 “변혁 이념”만 문제 삼는 위선

    ‘민주희망’은 “어떤”과 “이념”을 구분하기 위해 하부영 울산혁신네트워크 의장을 인용한다. 중요한 것은 문구가 아니라 발언의 취지다. 하 의장 역시 “무슨 사회주의냐, 누구를 위한 사회주의냐”가 중요하다면서 “이념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념을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하고 우리들의 삶하곤 관련이 없다”는 것이 “소련이나 중국이나 북한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하부영 의장은 옛 소련과 중국, 북한을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수립한 사회주의 사회로 보고 있다. 하 의장에게 “이념”은 그래서 “변혁적 사회주의”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주의 사회가 실패했거나 불가능하다면, “어떤”은 중요해도 “이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사회의 내용물을 일컫는 “어떤” 자체가 바로 “이념”이다. 사회주의의 ‘가치’를 말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주의 “이념”일 뿐이다.

    또한 다함께처럼 옛 소련 등의 실패를 시장 자본주의와 똑같이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국가자본주의체제의 실패로 보는 “이념”도 있다. 이 경우, 여전히 “변혁 이념”은 그 효용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하 의장이나 ‘민주희망’이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이념 일반”이 아니라 “변혁 이념”이다. 물론, 두 사람을 동렬에 놓을 순 없다. 하 의장이 이념적 좌표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진보를 추구하는 실천 안에 있는 반면, ‘민주희망’의 실천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희망’의 하 의장 인용은 부정직한 것이다. 오히려 한때 좌파에서 우향우 하던 끝에 ‘대한민국 정통성 인정론’으로 전향해 뉴라이트와도 ‘합리적 대화’를 하겠다는 주대환 씨를 인용하는 것이 정직한 인용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론과 이념”에 대한 이런 사기적 용어법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부영 의장이 말한 “진짜 가정을 꾸리고, 서로 공동체 지원하고 아끼고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바닥부터의 혁명”조차 심대한 위기로 빠져들고 있는 자본주의를 공격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자본주의에서 진보의 가치 실현이 가능한가

    자본주의는 개별 자본들의 이윤 동기를 기본 동력으로 하는 체제다. 그런데 새로운 이윤은 시장에서 서로 교환․거래한다고 창출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강탈조차 사회 전체 부의 총량을 늘리는 게 아니다. 그건 사회 안에서 부를 서로간에 ‘이전’할 뿐이다.

    “눈부신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이윤’의 획득은 기업주들이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제공한 임금 이상으로 노동을 시키는 데에 달려 있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착취가 자본주의의 근본 요소다. 그런데 사회의 부를 만들어내며, 수적으로도 다수인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려면 그들을 분열시켜야 한다. 성과 인종, 민족과 성정체성, 출신 지역과 학벌 등에 따른 온갖 차별과 억압은 여기서 비롯한다.

    또한 개별 기업들은 ‘시장’을 통해서 경쟁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하나같이 노동자를 쥐어짜는 데 열중하게 된다. 또 이것이 가난한 대중의 삶에 필요한 것들은 적게 생산하고 환경 파괴를 낳는 자동차를 과잉 생산하는 이유다.

    이런 체제에서는 안정적으로 “서로 공동체[를] 지원하고 아끼고 배려하고 존중해주는”(하부영) 사회를 만들 수도 없고 유지할 수도 없다. 자본가들은 착취하고 억압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시장 경쟁이 초래한 경제 위기와 그 고통을 노동 대중에게 전가한다.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밑바닥 삶의 현장을 개선하고 삶의 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반공 우익을 찬양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민주희망’ 같은 이들의 “변혁 이념” 비판이 옳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변혁론은 현실의 실천에서 도출된 결론

    맑스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즉 자본주의 아래서 겪는 밑바닥 삶의 고통이 자본주의에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없애자는 “변혁 이념”을 제시한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한 19세기 이래, 사민주의라는 대표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고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실패했다.

    유럽의 ‘제3의 길’ 실험은 가장 최신의 실패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스웨덴 모델도 세계자본주의의 침체 속에서 그 주역 중 하나인 사민당에 의해서 한걸음씩 계속 후퇴하고 있다.

    저들은 우리 편의 저항으로 자신들의 권력이 뿌리에서 흔들릴 때가 되서야 개혁에 나선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 속에서 사민주의가 ‘개혁 없는 개혁주의’로 전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쓰디쓴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맑스주의적 좌파의 ‘책임 정치’다. 그리고 그런 진실을 평범한 다수가 일상의 경험과 저항의 실천 속에서 체득하고 사회 변혁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이다.

    이것이 현실과 이론이, 실천과 이념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서만 진실로 “사회적 힘”이 형성될 수 있다.

    <레디앙> 필자 선정 … 진보의 정체성은 지켜야 하지 않나

    한편, 나름의 편집 방침을 감안하더라도 <레디앙>이 진보 언론답지 않게 반공 우익들을 칭찬하는 ‘민주희망’의 글을 선정적 제목을 달아가며 지속적으로 게재한 것은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이다. 지난 봄 뉴라이트 계열인 ‘열린북한방송’ 대표 하태경의 글을 연재하다시피 했던 것은 더욱 그렇다.

    대체로 북한 문제가 주된 소재인 경우가 많은데, 마치 “적의 적은 친구”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 격언은 틀렸다. 적은 적은 친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뉴라이트는 북한에 비판적인 진보라고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진보의 북한 비판은 우익의 북한 비판과는 달라야 한다. 그 점을 망각한 옛 소련 비판자들이 매카시즘을 추종한 극단적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진보의 비판이 우익들의 비판과는 달랐듯이 말이다.

    우파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정치인인 주대환 씨 등의 글을 싣는 것은 <레디앙>의 성향에 비춰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의 정체성조차 흔드는 글을 ‘비판적 논평’ 없이 게재하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최근에야 ‘민주희망’이 지난 3월 <레프트21> 창간시 필진 참여를 자원하는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근 ‘민주희망’이 보이는 정치적 지향을 보면 참 모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민주희망’이 대학 1학년 시절 <대자보>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훌륭한 진보적 정치인(국회의원)이 목표라면 당장의 유명세보다 자기 신념의 내용과 일관성부터 확립하는 게 먼저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형근과 김용갑을 칭찬하면서 ‘나는 변절하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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