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의 이름으로 결혼을 질문하다
        2008년 12월 19일 08: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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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은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상적 관계에서는 갈등이나 고뇌 따위로 마음 볶일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터이다. 그런 관계 안에서는 굳이 영화로 뽑아낼만한 별 신통한 얘깃거리도 없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영화나 소설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두고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거의 정상에서 벗어난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이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서 만들어지는 상처를 극복하든, 파국을 맞든 서로의 관계가 예전과 달라지게 만드는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단골 소재다.

    아내의 이름으로 질문하는 영화들

       
      ▲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그렇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그렇고,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도 그렇다. 이 영화들은 둘 사이의 합의뿐 아니라 사회적 승인을 거친 정상적 관계의 기본 단위인 ‘결혼’에 금이 가는 순간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해 묻는 한국 영화들이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2006년 문학공모전에서 당선된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모두 2006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가 뒤늦게 개봉된 영화들이다.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라고도 하는데 아마 2006년에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만이 정상이라는 단혼제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나타난걸 보면 이 사회가 ‘정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그 즈음부터 표면화되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세편의 영화 중 가장 보수적인 건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일 것이다. 학생운동권 출신의 금융계 엘리트 직원 예준이 미국 이민을 꿈꾸는 요리사 재문과 군대에서 맺은 우정은 꽤나 돈독해 보인다.

    원래 ‘민증 까는 것’보다 더 엄격하게 따진다는 군번과 계급을 넘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며 맺은 우정이니 군대를 벗어나 각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사회에 복귀해서도 그 계급의 차이에 흔들리지 않는 친구 사이다.

    계급과 우정

    재문은 결혼식 사진에서도 아내인 지숙보다 예준과의 거리가 더 가깝고, 신혼여행을 가서도 새 신부인 지숙의 소근거림보다 예준과의 통화가 더 살갑고, 아내인 지숙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려다가도 예준과의 술자리가 더 중요해서 바지 주워 입고 나가는 남자다.

    물론 예준도 재문의 우정에 화답해서 신혼여행지를 수배해주고, 이민준비를 도와 영어도 가르쳐주고, 네 아내 지숙씨가 최고의 여자라고 부추겨준다.

    그러나 아무리 사나이끼리의 우정이 대단하기로서니 비록 실수라 하더라도 자기 아이를 죽게 만든 친구의 죄를 대신 덮어쓰고 아내와의 결별을 감당하면서까지 지킬만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자기 죄를 대신 짊어진 친구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걸로 죄갚음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우정의 비틀림이 사실은 지숙을 향한 두 남자의 욕망 때문이며, 사실은 자기 욕망을 가진 지숙은 그 두 남자보다 더 지독한 죄인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세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불륜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맞는 낡은 도덕적 심판의 틀 안에 갇히고, 그래서 결국 지숙은 재문과 다시 살 수 밖에 없는 치욕을 감당해야 한다. 영 뒷맛이 쓰다.

    사랑과 몸에 대한 질투 

    김태식 감독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불륜에 대한 도덕적 단죄 대신 사랑에 대한 질투의 치졸함을 까발린다. 도장 파는 일을 하는 태한이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래서 나름 덫을 놓고 두 연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계획을 세우고는 제일 먼저 한 일이라는 게 도장에 ‘씨팔’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길을 나서는 거였다.

    막상 개인택시를 모는 아내의 애인 중식을 만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겨우겨우 덫으로 끌어들여 질탕한 정사의 현장을 확인하고도 태한이 정작 한 일이라고는 중식의 택시를 훔쳐 타고 그 놈의 아내를 만나러 가서 술잔이나 홀짝거리는 정도다.

    아니, 거기서 좀더 진도를 나가 바람난 연놈을 배우자로 둔 사람끼리 위로를 주고받으며 알몸으로 눕기는 한다. 마침 그 장면을 중식이 보도록까지 만들었으니 나름 복수가 되기는 했겠다. 그러나 복수가 제대로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이 치졸한 수컷들끼리 확인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이 아니라 고작 ‘했느냐 안했느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니라 몸에 대한 질투는 두 남자의 한심스러움을 확인하게 만들고, 영화는 치정복수극의 함정을 벗어나 코미디의 헛헛한 웃음을 남긴다.

    정윤수 감독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과연 남녀관계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 안에서만 정상적인가,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럿을 사랑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가장 상업적인 기획의 틀에 갇혀 원작 소설의 발칙함을 뭉뚱그려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만들고, 그 무덤을 확실히 지키기 위해 여자에게 자기 아이를 낳도록 하려는 남자 덕훈의 안간힘은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여전하다. 그런데 그런 소유욕이 제도화되는 결혼이라는 게 ‘사랑’과 ‘믿음’ 앞에서는 부질없을 수 있다는 여자, 인아의 저항은 영화로 옮겨지면서 심하게 탈색되어 버린다.

    원작이 심하게 탈색된 <아내가 결혼했다>

    제도로서의 결혼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보듬는 사랑 자체가 서로의 관계를 더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아의 주장은 참으로 도발적이다.

    자신도 태중의 아이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아야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치사스럽게 인아의 입을 빌어 굳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히고야 만다.

    제도로서의 결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아름다운 육체를 과시하는 여배우의 몸으로 도발의 지점이 바뀌어버린다. 김새는 일이다.

       
      ▲ <사랑의 찬가>

    이런 문제가 어디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 역시 2007년 작품 <사랑의 찬가>에서 일대일 함수 관계로 머무르지 못하는 관계를 다룬다.

    근사한 남자 이스마엘과 사랑스러운 여자 줄리 사이에는 ‘둘 사이를 잇는 다리’를 자처하는 앨리스가 있다. 한 침대에 누운 세 남녀가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는 것이 민망하지 않은 까닭은 워낙 배우들의 인물이 그림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시각적 자극 대신 노래를 통해 마음을 내보이는 뮤지컬 장르의 미덕 때문이기도 하다.

    이스마엘과 앨리스만큼 서로의 관계에 대해 느긋한 여유를 갖지 못한 줄리가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렸다. 심장이 막혀서. 줄리는 이스마엘에게 앨리스와 자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이스마엘 앞에서 앨리스가 사준 반지를 끼고 ‘둘’이 아니라 ‘셋’이라는 관계를 거부하지 못한다.

    이스마엘은 앨리스에게 ‘내 아내’인 줄리한테 반지를 주는 것은 반칙이라고 항의한다. 셋이 이렇게 티격태격하려는 순간 불현듯 닥친 줄리의 죽음은 갈등이 제대로 불거지기도 전에 쟁점을 흩뜨려버린다.

    줄리의 빈자리는 모두를 방황하게 한다. 이스마엘과 앨리스, 이스마엘과 줄리의 가족들, 앨리스와 줄리의 가족들, 앨리스와 새 애인, 앨리스의 새 애인의 남동생과 이스마엘. 이들은 모두 줄리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상심의 고통을 서로 어떻게 위로하고, 치유할 것인지 고민한다. 서로서로 위로하려하지만 고통은 여전하고, 외로움은 절절하다.

    사랑의 부재가 만들어낸 상처는 그 상처를 앓을 만큼 앓아야 치유되는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파리의 풍경과 샹송의 음률에 실어 읊조리는 영화 제목으로 <사랑의 찬가 Les Chansons D’Amour>라는 제목이 딱 제격이다.

    이런 영화들을 통해 혹시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모든 관계가 다 존중받아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편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중요한 건 어떤 관계든 진심을 다해 사랑할 때 정상, 비정상을 떠나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며,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관계의 정상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지금 이 시점에 하필 ‘아내’라는 이름을 빌어 나오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니까.

    (마침 연말 각기 다른 두 영화제에서 <사랑의 찬가>를 프로그램에 올렸으니, 극장에서 봐야 참맛을 누릴 수 있는 뮤지컬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다. 시네마 상상마당 음악 영화제에서는 음악에 방점을 두고, 여배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프랑스 영화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불여우 열전에서는 줄리 역의 뤼디빈 사니에르에 방점을 두고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노래한 영화에 걸맞는 스크리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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