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진적 상상력으로, 천천히 가자
        2008년 10월 28일 05: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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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화탄소의 방출 증가는 굴, 홍합 등 연체동물을 위험하게 한다고 한다. 수많은 어민들에게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갈수록 꿀벌도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콩, 면화, 옥수수에 이어 사탕수수도 유전자 조작으로 경작될 것이라고 한다. 점점 더 신선한 식품을 먹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정부가 생태, 환경, 그린을 정치적 수사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이클 파렌티가 지적하듯이 ‘비즈니스의 세계적 거인들에 의한 쿠데타’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세계무역기구는 일본에게 수입식품의 농약 잔류성분의 허용한도 수치를 높게 하도록 강요하였고 여러 나라의 석면사용 금지조처를 제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자연과 생태를 중시하는 태도는 당연히 농업을 중시하게 된다. 볼프강 삭스에 의하면 인류 미래의 삶의 지속을 담보해주는 영역이 농업이라고 한다. 물, 생물 다양성, 토지의 비옥화, 사막화 등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 70%가 농촌에 산다

    삭스는 사회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의 70%가 농촌에 살고 있으므로 일반 주민 전체의 생존권적 기본권의 시각에서 보아도 농업정책은 중요하다고 한다. 삭스는 또한 현재의 생태위기 대안으로 가족농(소농)과 소기업을 중시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방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 헌법제127조에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환경과 삶을 즐길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환경, 생물다양성, 유전자원, 생태적 과정, 국립공원, 천연기념물, 기타 생태적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베네수엘라에서는 생태와 환경에 대한 권리가 헌법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으며 유전자 조작 식품의 수입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또한 전통적(원주민적) 방식의 소농을 중시하여 비야 깜페시나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생태농업 대학’을 설립한 바 있다.

    그리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각각의 동네에까지 뿌리를 내리는 소기업 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소기업 조합운동이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차별과 억압에 근거하는 데 반해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의 ‘연대적 경제’의 전략 사업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기업 조합운동은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서도 활성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생태 위기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경제 위기, 두 가지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므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소농과 소기업’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디아나 까리보니에 의하면,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철학에 기대고 있는 사회적 생태주의(Ecologismo social)는 전통적인 방식의 환경보존운동을 비판하면서 지배와 차별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를 지구가 겪고 있는 사회 경제적 위기, 생태적 위기라는 이중 위기의 원인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이 크게 작동한다. 무정부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비슷하나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주 다르다.

    중요한 것은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상은, 토지는 땀흘려 일하는 사람의 것이고 물, 자연자원, 땅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 본래적인 의미의 생태주의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 남미의 한 바나나 농장
     

    무정부주의에 대한 노암 촘스키의 견해는 현재의 남미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촘스키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맹아를 계몽운동과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남미의 최근 흐름을 이해하는 방향과는 번지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이론적 탐구보다 중요한 것은 남미의 변화하는 현실이다. 남미에서 좌파 사상의 두 축 중 하나로 사회주의와 강력하게 작동했던 무정부주의 운동의 오랜 역사를 이해한다면 현재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공동경영 기업’과 ‘파산한 기업들을 사장 없이 노동자가 운영하는 조합운동’ 모델의 맥락의 깊이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생태주의는 방법론적으로는 철학, 역사, 인류학, 생물학, 생태학을 아우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가로지르는 범학제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 ‘라틴 아메리카 사회 생태 연구소(Instituto Latinoamericano de Ecologia Social)’가 있다.

    사회적 생태주의는 단순히 환경보존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게 가하는 착취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차별과 억압이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좌파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태의 문제의식을 자본주의 사회 비판과 연결시키는 것은, 최근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상당수 논자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까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라틴 아메리카 학계의 특징이다.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의 나라들을 안디노 협약 가입 국가들이라고 하여 안디노 국가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현재 남미 신자유주의 극복의 좌파적 변혁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원주민과 혼혈 메스티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남미에서도 가장 남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남미 안디노 국가들의 인문, 사회과학자들이 1990년대 이후 철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문학, 언어학 등의 범학제적 방식으로 중남미 사회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보편적 역사 흐름에 대해 비판적 인식론을 새롭게 정립한 것을 ‘근대성/식민성’ 담론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콜롬비아 출신의 미국 문화인류학자인 아르뚜로 에스꼬바르, 페루의 사회학자인 아니발 끼하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기점을 콜럼버스가 남미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정복에서부터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성, 자본주의, 식민성은 서로 출발점이 같은 것이다.

    기존의 인식이 근대성의 기점을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에서부터 찾고 있는 데 반해 이와 같은 인식은 기존의 유럽 중심,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 담론에서도 잘 제시되지 않는 문제의식이다.

    특히 근대성 담론이 가지는 식민성 은닉에 대한 비판이란 시각에서 사회적 생태주의와 근대성/식민성 담론은 그 철학적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서 식민성이란 우리가 흔히 아는 ‘식민주의’와는 달리 근대성과 자본주의가 가지는 차별성, 억압성과 약탈과 배제의 의미를 가리킨다.

    근대화,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사막

    유럽(문명)에 의한 자연(야만)의 착취와 지배는 당연한 일이라는 근대성의 인식 속에는 처음부터 반생태적 속성이 내장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세계 어느 지역보다 식민성을 처절하게 경험한 지역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이다. 반면, 우리 사회는 유럽과 미국의 문명에 대한 숭배가 거의 신화화 또는 내면화되어 있다.

    근대성/식민성 담론 그룹의 문제제기가 1990년대 이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근대성에 기반한 민족국가의 당위성이 민주주의와 사회적 공공성에 의존해 왔는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이런 가치들이 크게 위축되어 왔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은 “국가가 가지는 사회부조적인 정책들, 연금제도, 사회복지, 지방정부의 사회 인프라 정책의 예산들과 노조의 조직력, 임금협상의 발전된 시스템, 공공지출, ‘과세 정의’를 위한 조세제도 이런 것들이 세계화의 사막의 태양 아래 녹아 버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이 투자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노동, 사회복지, 재정, 환경, 생태적 규범들의 제거로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즉, 자본주의가 그동안 안에 내장하고 있던 식민성이 전면에 나서면서 민족국가의 주권이 약화되고 사회적 생태적 공공성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20 대 80 또는 10 대 90의 사회를 만들어내는 차별과 억압의 식민성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이를 개방화와 선진성으로 기만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근대성 속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속성 즉 발전성/식민성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식민성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의 비서구지역에서 불충분한 것은 ‘지식의 유럽 중심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서구지역의 전통적 지식만이 최고라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이 지식의 유럽 중심성의 경로를 통해 지식과 권력과 상상력까지도 식민화시킨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하여 이들 학자들은 현재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발한 새로운 성격의 원주민 운동과 사회운동이 민주주의의 재정의와 정치, 사회 체제의 변화의 새로운 상상력과 비전을 태동시키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대성/식민성 담론 그룹의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생태주의의 ‘소농, 소기업 조합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물, 땅, 숲에 근거해 사는 소농을 희생시켜서는 안되고 소농, 소기업, 소규모 가게(예: 가난한 사람들의 무허가 노점상들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해 특혜적 금융을 제공하는 전문은행의 설립 등)를 살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재생을 위한 전략이 된다는 말이다.

    ‘지속가능’이 아니라 ‘탈성장’으로

    아르뚜로 에스꼬바르는 앞으로 바람직한 비전은 생태주의와 탈성장 또는 저성장주의이라 한다. 어정쩡한 ‘지속가능한 개발’의 철학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탈성장주의의 대안은 ‘내발적 발전 이론’으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방향이 아닌가 한다. 아르뚜로 에스꼬바르는 ‘공간, 자본, 근대성’의 헤게모니적 지배에 반대하는 ‘장소, 비-자본주의, 지역 문화’를 강하게 긍정해야 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비전이 추상적, 관념적 주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많은 나라들에서 현실적으로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출발점은 안디노 국가들의 경우 새로운 헌법 제정에 있고, 현재 볼리비아에서는 새로운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가 의회 통과를 거쳐 결정되었다.

    ‘공간’은 대도시나 소도시나 차이가 없는 획일적 중대형 매장, 프랜차이즈 점포 등의 확산과 최신 금융기법의 세계적 확산을 상징한다. 이에 반해 ‘장소’는 소농, 소점포 등이 가지는 지역의 다양한 고유문화와 인간적 삶의 결을 중시하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비-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폭력적 ‘안티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시장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생태적 소농과 주민들 또는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한 다양한 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자는 것이다. ‘경쟁과 차별, 지배와 억압’이 아닌 ‘연대와 협력’의 철학이 담긴 새로운 대안적 비전이라 하겠다.

    그 정반대 방향은 ‘외발적 발전’이 되겠는데, 우리의 경우 1970년대부터 저임 노동을 강도 높게 투입하는 방식으로 아주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끈 전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FTA, 대기업 위주의 수출지향 경제의 방향이, 역대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는 국가경쟁력의 확보 전략도 되지 않고 일반 대중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이 현재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중소기업, 소농, 조합, 지역을 중시해야 한다. 제대로 된 지방자치도 한 번 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주 낮춰보는 남미는 오래 전부터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복지를 경제 전문적 시각 즉, 성장과 분배의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 인권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복지를 국가 정책의 기본 축으로 삼는 현재의 남미 좌파 정부들의 방향은 기존의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로 설명할 수 없고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건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지난 2007년 ALBA 가입국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사회주의와도, 사민주의와도 다른 남미 복지

    기존의 무슨 무슨 주의와 연결시키기보다 급진적 상상력을 가지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점진적으로 천천히 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느린 식품, 건강한 농업, 느린 무역’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울리히 벡이 『세계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로 상극인 신자유주의와 맑스주의는 역설적으로 ‘경제의 최고 우위’라는 점에서 함께 닮아 있기도 하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경제의 문제로만 환원시켜 보려는 파편화 경향이 강한 담론들이 언론 매체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력과 대안적 비전을 만들어내려면 ‘지금, 여기’의 우리 국면에 대한 경제 전문적인 분석이 아니라 아주 복합적인 인식을, 지식인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90년대 이후 실제로 이 같은 인식의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남미의 변화를 밑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이끈 힘들 중의 하나가 지식인들에 의한 새로운 인식론적 문제 제기인 근대성/식민성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에 의해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맑스주의, 이 둘 모두를 지양하고자 하는 ‘생태와 비-자본주의’의 비전이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자들은 그동안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옥죄어온 ‘근대성/식민성’의 인식틀을 깨트리고 여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지식의 유럽 중심성 거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게 하고 있다.

    성장과 발전에 집착하며 소위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삶의 방식을 따라 갈수록 종속과 식민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꾸로 오래 전부터 이들에게 존재해왔던 생태적 삶의 방식 즉 상호 연대와 비대칭적, 증여적 교환의 틀(예: ALBA)을 새롭게 창의적으로 실험하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ALBA는 남미 일부 나라들에서 시행 중인 ‘남미 볼리바리안 대안 협정’의 약자로, 한 국가가 의료서비스 또는 문맹자 교육의 서비스를 금전적 보상 없이 제공하고, 다른 나라는 에너지 자원을 제공하는 식으로 정확한 화폐 교환을 매개하지 않고 우정에 바탕한 새로운 무역 거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화의 구체적 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 같은 흐름의 잠재적 노력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문화적 혼종성, 경계성’과 ‘정체성 탐구’의 화두를 가지고 195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혼종성이란 의미는 남미 문화는 유럽적이면서도 유럽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남미의 전통문화는 원주민 문화와 동시에 스페인(유럽) 문화가 함께 전통문화로 되어 있다. 애매한 경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획일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화와는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사회적 생태주의를 포함한 최근 남미의 새로운 좌파 비전도 이미 이 때부터 그 씨앗이 마련되고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특히 문학과 인문과학에서 그래왔다. 그 핵심적 흐름은 경계를 넘어서는 유연성이다. 도그마를 거부하는 유연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의 담론 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문화 속에 살아있는 곳이 라틴 아메리카이다.

    미국이 군사, 정치, 경제의 강대국이었으면서도 소비주의에만 중독된 문화적 획일성, 이념 지형의 협소함과 이로 인한 엘리트와 일반 대중의 엄청난 격차,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비판 담론의 부재 등으로 인해 현재의 엄청난 금융위기를 낳았다는 어느 네티즌의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중요한 분기점은 1950년대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오랫동안 남미를 억눌러온 어떤 힘이 이제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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