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모두 '서태지의 아이들'이다
        2007년 12월 06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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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이다. 되짚어 보니 지금껏 12월 31일 밤을 보낸 방법은 딱 세 가지였다. 그 외에는 전혀 없다.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자면…

    1. 10대 가수상(~1998)

       
      ▲서태지는 최근 15주년 기념 각종 이벤트에서 마케팅의 귀재다운 모습을 보여줬다.(사진=뉴시스)
     

    ‘TV 키드’이던 시절. 한 주의 마무리를 주말의 명화 오프닝 송 ‘영광의 탈출(Exodus)’로 했다면, 한 해의 마무리는 MBC 10대 가수였다.

    그해 최고의 가수 10명이 나와 쿵짝쿵짝 그해의 히트곡을 부르고 나면 11시 56분쯤. 사회자 이덕화는 여느 때와 같이 카메라를 보신각으로 돌리곤 했다.

    5, 4, 3, 2, 1. 종이 울리고 나면 “OO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사다난 했던 00해가 가고 어쩌고저쩌고, 희망의 00해가 왔습니다, 어쩌고저쩌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어쩌고저쩌고“하고 나면 그해 최고가수 선정이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10대 가수 선정사상 가장 충격적인 일은 88년쯤에 일어났다. 바로 현철의 10대 가수 수상. 당시 10살쯤 되던 나는 10대 가수상을 10대들한테만 주는 건 줄 알았다.

    조용필, 주현미 등등까지는, 10살짜리가 보기엔, 얼추 10대로 봐줄 수 있었지만, 현철이 10대였다니!!!!)

    2. 송구영신투쟁(1999, 2000)

    대학시절 중 몇 년은 이덕화가 카메라를 돌렸던 보신각 현장에 있었다. 송구영신투쟁, <레디앙> 독자라면 이게 뭔지 아는 사람들 꽤 있을 거다. 한 마디로 보신각 인파 틈에서 데모하는 거다. 얼마 전까지도 보신각 현장으로 카메라 돌리면 깃발이 펄럭거리는 걸 몇 번 봤는데 요즘도 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무지하게 쪽팔렸다. 남들 잔치하는데 상 엎는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밖에 안들었다. 게다가, 문제는 거기에 라엘리안도 와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우주인이 신이고, UFO가 신의 사자라고 주장하는 애들 옆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면 사람들이 "쟤네는 미친 놈이고, 얘네는 훌륭한 애들"이라고 생각해주겠는가? 아니다.

    사람들 눈에는 라엘리안이나 우리나 똑같이 보였을 거다. 한 마디로 권 후보가 허경영 후보와 공동유세를 한 격이다. 나는 ‘뭐든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주의자인데, 딱 하나 말리고 싶은 게 바로 송구영신투쟁이다.

    3. 일출보기(2001~현재)

    동해안. 호미곶. 정동진. 이따우 로맨틱한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새벽까지 술 먹고 해 뜬 다음에 집에 들어가는 거. 술 중년이 되가는 이 시점에 연말을 보내는 방법이다. 이상 끝.

    서태지 얘기를 한다 해놓고 연말을 보내는 방법을 꺼낸 이유는 10대 가수상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술 청년이 됐지만, 지난날 ‘TV 키드’였던 나로서는 마음의 고향이 사라져 버렸으니! – MBC는 66년부터 이어져 오던 10대 가수상을, KBS는 84년에 시작된 가요대상을 각각 작년에 폐지해버렸다.

    게다가, 올해 SBS마저 시상식을 열지 말지 아직까지 밝히지 않은 상황이다 – 이런!! 다시 송구영신 투쟁이라도 가야하는 건가 ㅜㅜ

    대형기획사 소속 가수 학예회 된 TV 연말 시상식

    사실 술 아니었어도 어차피 연말시상식 볼 생각이 없었다. 시상식이 주는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 어느날 부턴가 연말시상식이 방송국의 시상식이 아닌, 대형기획사 소속 가수들의 학예회가 되어버렸다.

    보아와 강타가 듀엣곡을 부르다, 소녀떼들의 괴성과 함께 뒤에서 플라이투더스카이가 등장하고, 곡의 클라이막스에서 이수만의 첫작품 현진영이 등장해서 이들 5명과 훈훈한 무대를 만드는거 – ‘SM 연말결산’이 아니고 뭐냔 말인가? 시상식의 권위가 말이 아니다.

    잠깐, 이장면. 15년 전 내가 원하지 않던 서태지 컴백쇼를 보고 있었어야 했던 장면과 어딘가 비슷하지 않은가? 서태지가 평범한 토요일 한시간을 차지한 거라면, SM은 방송국의 40년 된 큰 잔치상의 주인자리를 떡하고 차지하고 앉은 스케일의 차이는 있지만 그 본질은 차이가 없다. 바로, 힘의 이동.

    서태지가 데뷔한 1992년부터 은퇴한 1996년도. 그리고 SM의 첫 번째 대형 히트작 H.O.T가 데뷔한 1996년 그리고 2007년까지 – 이들 연예 컨텐츠를 유통시키는 유통망은 MBC, SBS 꼴랑 두 개 에서 1991년 12월 SBS 개국, 1995년 케이블 TV방송 시작, 그리고 이후의 위성방송, 인터넷방송,  DMB, UCC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유통채널 뿐인가? 생활수준의 향상 등으로 연예인에 대한 수요도 무섭게 늘고만 있다. 수 많은 지자체 행사, 기업, 각종 단체, 학교들, 신규 브랜드 런칭쇼, 홈쇼핑, 각종 패션쇼, 새 클럽 오픈파티, 쇼핑몰 오픈행사, 영화산업. 연예인들을 불러주는 곳은 방송 말고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미용업만 하더라도 옛날엔 연예인들 오면 반 정도 깎아주는 정도였는데, 몇해 전 부터는 공짜로 해주는 곳이 나타나더니, 최근에는 반대로 미용실에서 연예인이 올 때마다 돈을 주는 곳까지 등장을 했다.(세상에)

    연예인은 힘이 세다

    서태지가 등장해서 전 시기의 선배들이 누리지 못했던-컴백 시기를 맘대로 설정하고, 활동기간을 맘대로 결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쇼를 만들어 컴백쇼를 펼칠 수 있었던-호사를 누리게 된 때가 SBS개국 이후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SM같은 대형기획사들이 연말 시상식을 소속 가수 연말 결산으로 만드는 것부터 소속 가수들을 출연시키네 안 시키네 하며 감히 방송국을 상대로 ‘으름장’을 놓을 수 있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안 나가고 싶을 때 안 나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호사냐? 라고 하실 분을 위해 잠시 카메라를 가수 A군에게로 돌려보겠다. 독실한 B교 신자인 A군은 실력이나 인기 면에서 우리나라 최정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가수지만, 방송 활동을 안 한다.

    어느 날 B교에서 운영하는 라디오의 한 PD가, B교에 관한 프로에 혹 A군이 출연할 맘이 없느냐 물었다. B교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나서서 하는 A군이었지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한참의 고민 끝이었다.

    “한 군데 나가면, 다른 데서 또 섭외가 들어오는데. 한 군데만 나가고 다른 곳을 거절할 수도 없을 뿐더러, 거절하면 우리 노래를 안 틀어줘. 차라리 아예 방송 안 한다는 소문나는 게 나아” 잘 나가는 가수인 A군도 이럴 정도다.)

    힘을 내자, 민주노동당

    딴따라. PD가 한밤중에 전화해서 나오라 부르면 나오던 신세에 불과했던 연예인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방송국과 감히 협상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서태지였고, 서태지가 시작한 협상의 판을 키운 것이 SM이었다.

    힘을 내자. 힘의 균형은 언제든 변한다. 적어도 지금 민주노동당의 처지는 당시의 딴따라보다는 높지는 않나?(밤에 전화해서 나오라는 PD가 있는것도 아니고) 좋은 가사, 좋은 곡이 다가 아니다. 통기타를 들고 ‘난 알아요’를 불렀다면 서태지가 지금의 서태지였을까? 상표 달린 옷이 아닌 면바지의 잠바 입은 옷을 입었다면 서태지가 지금의 서태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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