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은 사라지고 추문으로 남은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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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7월 13일 09: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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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항쟁 20주년을 맞아 당대비평 편집위원들이 책을 한 권 내놓았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은 두 개의 좌담과 1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레디앙>은 당대비평 편집위원회와 공동기획 형식으로 책 내용 가운데 일부를 나눠 싣는다. 이 글의 필자인 소설가 방현석은 자신을 ‘그’로 객관화시키면서 기억해낸다. 필자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85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인천으로 가서 14년 동안 현장 활동을 했다. <편집자 주>

    무엇이 그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했을까

    그는 용감한 편이 아니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고, 군대도 그 방법의 하나일 수 있었다. 군대에 다녀왔을 때 대학은 새로운 국면, 이른바 유화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강경 일변도의 대 저항세력 정책을 수정하여 학내시위를 허용하는 유화책을 썼다.

    이것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되고 대규모 국제행사인 88올림픽이 임박함에 따라 국제적 상식에 부합하는 수준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3저 호황과 올림픽 유치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미 역량이 커진 ‘언더’에서는 유화 국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일부 구성원을 공개 공간으로 내보내서 학도호국단 철폐 투쟁을 수행하게 했다. 후배들의 후견인으로 이 과정에 관여했던 그는 결국 이듬해 실시된 직선제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야만 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첫 직선제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득표에 가장 유리한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우려와 달리 학생들은 ‘파쇼의 거리에 민주주의 바리케이드를!’이란 구호를 내건 그의 후보조에게 몰표를 던졌다.

    학생 대표로 뽑힌 그는 집회와 시위가 끝나면 붙들려가 유치장 생활을 했다. 그가 학교를 떠나 공장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유치장에서 만난 여성 노동자들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서울지법 남부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유치장으로 넘어온 제과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온몸이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재판을 받는 내내 자신들을 엉망이 되도록 때린 자들은 왜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맞은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고 소리치며 따졌지만 판사는 녹음기처럼 그녀들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유치장에 있는 동안에도 그 여성 노동자들은 면회 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오는 사람이 있어도 면회를 시켜주지 않은 것인지는 모른다. 유치장 근무자들은 같은 시국사범이라도 학생과 노동자들을 같이 대우하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하면 ‘공순이’라고 모욕을 주었다. “공순이 주제에, 니들이 학생이라도 되는 줄 알고 설치는 거야?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더니.”

    그래도 학생대표였던 그는 조사 과정에서야 떡이 되도록 얻어 맞았지만 일단 유치장으로 넘어간 다음에는 대접을 받았다. 독방에서 맘대로 누울 수도 있었고, 삼국지 따위를 읽다가 졸리면 낮잠을 잘 수도 있었다. 가끔 정보과장이 불러서 담배도 한 대씩 권했다. 학교에서 보직 교수들이 면회도 오고 영치금과 사식도 넣어주었다.

    그러나 일체의 면회가 없는 여성 노동자들은 관식으로 일관해야 했다. 새카만 보리밥에 맛이 거의 간 짠지 몇 쪽을 담은 누런 양은 도시락이 관식이었다. 학교에서 면회를 와 사식을 신청했다고 해서 그는 함께 들어온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사식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그가, 아니 그의 학교에서 넣어준 사식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아마 그녀들은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녀들이 관식도 먹지 못하게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녀들과 눈길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가 학생 대표의 자격으로 마이크를 잡고 떠들었던 민족과 민중, 자유와 민주주의, 이 말들이 모두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말들인지에 생각이 미쳤고, 힘이 들기 시작했다. 의분에 차서 목소리를 높였던 그의 말들은 얼마나 사치스럽고 무책임한 것이었던가.

    85년 말 그는 인천으로 갔다. 스스로 했던 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을 져야 했다. 노동운동은 쉽지 않았다. 운동도 힘이 들었지만 노동은 더욱 힘이 들었다. 하루종일 보일러를 조립하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자문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시간이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노동운동가가 되기 전에 먼저 노동자가 되어야 했고, 조직가가 되기 전에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했다. 노동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견딜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노동자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 87년 6월 민주항생 당시 시청앞 광장을 가득메운 인파.
     

    6월에서 7, 8월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그는 사출공장에서 야근조로 일하고 있었다. 아침 퇴근길에 주워본 신문에, ‘탁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해명이 실려 있었다. 공장 안에서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어제와 같은 노동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벌어지는 일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 무관하던 일이 어느 날부터는 무관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부평역과 주안역, 동인천역에서 벌어진 시위로 퇴근길이 막히고, 최루가스를 맡고 온 노동자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노조를 만들 목적으로 만든 친목모임의 회원들과 함께 시위 ‘구경’을 다녔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모양새를 갖춰야 했던 그 ‘구경’을 매일 조직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 날에는 따로 움직였다.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행동을 함께 할 활동가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인천의 운동본부는 동인천에 있는 답동 성당이었다. 부평역과 동인천역 일대는 퇴근시간 무렵부터 매일같이 시위대가 도로를 장악했고, 돌과 최루탄이 오가는 격전지로 변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격전은 자정이 가까워야 잦아들었다.

    대로변에 접한 답동 성당의 가톨릭회관 빌딩의 5층인가의 농성장에는 방송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전국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 인원과 각계의 민주화 선언, 해외의 반응을 알리고 시위대를 고무하는 방송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여러 날, 퇴근 뒤에 방송을 담당했던 그는 그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진출했다. 인천에 있으면 신원이 드러날 위험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신원이 드러나면 우선 공장에서 해고될 것이 자명했다.

    종로와 을지로, 청계천. 전철역 어디에서 내려도 시위대와 결합할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은 시위를 뒤로 하고 출근을 위해 전철을 타고, 선 채로 조는 것으로 수면을 대신한 것이 며칠인지 모른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졸다가 몇 번이나 무릎을 꺾고, 놀라 몸을 가누곤 했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더 끔찍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대형 금형이 초단위로 여닫히는 사출기에 손을 밀어넣어 제품을 뽑아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손이 금형에 찍히지 않고 무사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거리가 거의 혁명적으로 들끓어 올랐던 그 무렵에는 공장에서의 조직화 활동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면 공장 구석에 종이박스를 깔고 처박혀 눈을 붙이기에 바빴다.

    그가 시위현장에서 체포된 곳은 청계천이었다. 낙원상가 근처였는데,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사복 경찰이 시위대 한 명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이단 옆차기를 날린 다음이었다. 바로 그 옆의 골목 안에 빼곡하게 대기하고 있던 백골단을 그는 미처 보지 못한 채 용맹을 과시한 것이다.

    그는 닭장차에 실려 서초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가 다닌 대학의 관할 경찰서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자신의 경솔함과 재수 없음을 함께 탓하면서, 단순 시위 행위 이상으로 문제가 확대되지 않도록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사를 담당할 형사들이 몰려왔다. 버스 한 대 분의 연행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과와 대공과 형사들이 총출동한 모양이었다. 그들을 외면하며 벽을 쳐다보고 앉았는데 한 형사가 아는 체를 했다.

    “야, 너 아직도 이거하고 있냐?”
    이런, 대학시절의 담당형사였다. 난감했다. 그의 관할 경찰서에 잡혀가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자취를 감췄다가 맞을 것 다 맞고 나면 연고와 파스, 담배를 사들고 나타나던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가 하필 여기로 와 있을 게 무엇인가.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셈이었다. 그를 따라 대공과로 올라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담배 한 대 피우고 하면 안 돼요?” 그가 불쑥 물었다. 그의 옛 담당 형사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와.”
    그의 옛 담당은 그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워갈 무렵 옛 담당이 물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냐?”

    그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분은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건데요?”
    옛 담당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그에게 권하고, 자신도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세상이 어떻게 될 거 같으냐?”
    “그걸 저한테 물어요?”

    담당이었던 그 형사는 그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를 다루면서 자주 호기를 부렸다. 야, 임마. 니들이 말하는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아? 그런 세상 오면 그때는 내가 니들한테 당해줄게.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일을 계속했다.

    육체가 정신보다 약한 것이어서 언제나 정신을 배신하고 그의 육체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일이 끝나고 나면 그의 담당은 안티푸라민과 담배를 들고 나타나서 말하곤 했다. “권력은 한 번 잡으면 20년은 가는 거야.”

    박정희 정권이 18년 갔으니까, 전두환 정권도 그만큼은 간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권불십년은 10년 가는 권세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한 번 잡은 권세는 최소한 10년은 간다는 뜻이었다. 그가 앞장서 내려가는데 옛 담당이 불렀다.

    “야, 옷 벗어라.”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를 외면하며 옛 담당이 말했다.
    “털자. 그 옷에 나는 냄새가 뭐냐.”
    옥상에서 겉옷을 모두 벗고, 둘이서 최루탄 냄새를 털어냈다.

    “버스 타고 청계천 지나가다가, 차가 막혀서 내렸다고 하자. 그냥 시위대를 지켜보던 중에 연행당한 거야.”
    다음날, 경찰서를 나서는 그에게 옛 담당이 말했다.
    “나, 너한테 감정 없다. 좋은 세상 오면 잘 봐주라.”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이 발표되고, 거리의 시위는 끝이 났다. 작업이 끝나면 자취방으로 돌아와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며칠 실컷 잠을 자고 정신을 차려 공장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승리라고 말하는 6월 항쟁이 노동자들에게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전히 퇴근시간 30분 전에 반장이 ‘오늘 9시 퇴근’이라고 말하면 9시에 퇴근해야 했고, ‘오늘 철야’라고 말하면 철야 근무를 해야 했다.

    태풍은 울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엔진에서 시작된 파업의 불길은 순식간에 울산을 휩쓸고 전국으로 번졌다. 중장비를 동원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시위는 6월 항쟁과는 전혀 다른 투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군대를 연상케 하는 울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며 노동자들은 전율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투쟁의 불길이 인천까지 북상하는 데는 몇 주가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친목모임 수준으로 꾸려오던 그의 공장 소모임은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으로 성격을 바꾸고 파업 준비에 돌입했다. 부평공단과 주안 5, 6공단에서 노조 결성과 함께 파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줄을 이었다.

    그의 공장도 전격적인 파업을 시작하며 임금 인상과 노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파업 이틀째 되던 날 파업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원들을 선출했다. 그는 교선부장을 맡았다.

    1주일 만에 노동조합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일당 1천 원 일괄 인상과 노조 인정. 일당 1천 원 인상을 요구하면서 노조 집행부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속으로 했다. 당시 그 공장 노동자들의 일당이 4천 원 안팎이었고 한 해 인상액이 1, 2백 원이었다. 그것을 올려주면서도 회사는 늘 어렵다고 해왔는데, 1천 원을 올려주고도 회사는 멀쩡했다.

    파업이 끝나고 현장에서는 반장이 사전에 잔업 여부를 물어보는 낯선 풍경이 벌어졌다. 관리자들이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신기한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2공장 2층에 ‘노동조합’이란 명패가 붙은 사무실도 생겼다.

    87년 그 후, 이름마저 지키지 못한 세대의 현주소

    1994년, 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부터 1994년까지, 14년의 시간, 스물이던 그가 서른넷이 될 때까지 그는 무엇을 위해 살며 싸웠던 것일까. 노동운동의 현장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며 그는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쳤다. 다만 한 시대가 지나가버렸다는 회한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80년대는 80년에 시작되어 94년에 완료되었다. 지나가버린 한 시대, 14년의 시간 한가운데 1987년이 자리 잡고 있다.

    80년에서 87년에 이르는 7년은 희망이 커가는 시간이었다면 87년에서 94년에 이르는 7년은 좌절이 깊어가는 시간이었다. 80년대의 절정이자 분기점이었던 87년은 그와 그의 세대에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87년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대투쟁은 80년 봄의 패배를 딛고 시작된 민주세력의 1차적인 승리임이 분명했다. 그 승리는 70년대 전태일의 분신 항거를 기점으로 한 민중들의 생존권과 시민적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긴 투쟁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더 멀리는 4·19를 통해 이루려고 했으나 5·16으로 좌절된 시민사회의 복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87년의 투쟁을 통하여 한국 사회는 반민주악법들을 철폐하고 정치적 자유를 회복했으며,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를 획득했다.

    그리고 그 후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으며,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결과물들은 70년대 이래로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요구, 80년 광주 민중들의 요구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승리다.

    그런데 왜 그의 세대는 회한 없이 87년 이후의 시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87년의 승리가 절반의 승리에 그쳤기 때문일 것이다. 70년대 전태일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80년 이후 지배 권력에 도전했던 저항세력의 투쟁 과정에서 키워왔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은 87년 이후 빠르게 폐기 처분되었다.

    자기 민족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보유하고,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한 꿈, 그 꿈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감옥과 공장을 마다않고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이상은 냉소의 대상으로 바뀌고, 강자 독식의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질서가 한국 사회에 포진했다.

    결국 한국 사회는 세계자본주의 질서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민주주의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으로부터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셈이다. 그 결과 민주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정부가 한미 FTA를 필사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미국이 관리하는 세계자본주의의 21세기 전략인 신자유주의는 약자 배제, 강자 독식의 질서다. 여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꿈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아직도 절대 궁핍에 시달리는 지구의 3분의 1에 대한 어떠한 동정도 없이 강자 독식의 논리로 무장한 세계자본은 자기증식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도 이것을 넘어서려는 이상, 80년대가 키워냈던 그 이상은 변화된 시대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무력해져버렸다. 이상은 사라지고 대신 그의 세대는 추문이 된 이름으로 남았다. 386.

    그는 ‘386세대’란 용어를 승인한 순간 80년대 세대는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386이란 30대(이미 많이 지나버렸지만),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자를 지칭한다. 여기에는 80년대의 시대정신과 정체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60년대 출생과 30대, 80년대 학번은 동일한 조건을 규정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 이름 안에는 배제조건이 하나 더 포함되어 있다. ‘80학번’ 조건항은 ‘60년대 출생’과 ‘30대’라는 조건항과 중복되는 동시에 그 조건항에서 배제되어야 할 대상을 규정하는 단서 조항이기도 하다. 학번을 보유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대학생이 아니었던 자는 ‘386세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동료들이 학원에 주둔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개처럼 끌려갈 때도 잔디밭에서 포커만 치고 있었건, 최루탄 냄새를 끌어들였다고 짜증을 내며 고시에 몰두했건, 공안기관과 보조를 맞춰 총학생회 무력화 활동을 벌였건 상관없이 80년대 학번이기만 하면 다 ‘386세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신문에서는 386세대 파워그룹이란 제하에 ‘법조계 386’ ‘경찰 내 386’ ‘군대 내 386’들을 시리즈물로 다루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386세대란 용어를 거부하지 않고 승인했다. 《한겨레신문》과 《말》지, 민주노동당까지도.

    그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한다고 해도 지워버릴 수 없는 80년대 세대가 지닌 아름다움이 하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한 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그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지켰던 광주의 희생자들, 하루종일 일하고도 설렁탕 세 그릇 값을 받지 못하고 혹사당해야 했던 노동자들에 대한 부채감을 80년대 세대들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달고 있던 대학 배지를 떼어냈던 세대다.

    그토록 많은 대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노동자들에게 배우려고 했던 세대가 세계 역사에서 80년대 한국 말고 달리 있었던가. 지방대학 출신의 전대협의장을 지키겠다고 서울대 의대생이 각목을 들고 사수대로 나설 수 있었던 세대가 80년대 아닌 어떤 시대에 있었던가.

    그런데 ‘386세대’라니. 그 이름을 승인하는 것은 80년대 정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386’이란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욕감을 느낀다.

    민중과 분리를 의미하는 ‘운동권’이란 이름을 승인하면서 ‘운동권’이 실패하기 시작한 것처럼 80년대 세대는 ‘386세대’란 이름을 승인한 순간 실패했다. 모욕당하는 자들은 남이 모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모욕하는 법이다. 80년대는 자신의 정신을 잃었기에 이름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광주항쟁 세대도 아니고 6월 항쟁 세대도 아니고, 80년대 세대조차 되지 못한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386’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그의 세대가 도달해 있는 뼈아픈 현주소다. 6월 항쟁 20주년이 ‘기념’될 모양이다. 이름 하나 건사하지 못한 그의 세대가 기념할 80년대는, 그 정점이었던 ‘6월 항쟁’은 과연 오늘 무엇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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