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티, 폭력집단 준동
    결국 국가비상사태 선포돼
    [세계] 흑인들이 건국···최빈국 전락
        2024년 03월 06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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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심한 치안 공백을 겪고 있는 아이티에, 결국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아이티에는 무슨 일이?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 최빈국입니다. 특히나 최근 들어 심각한 치안 문제를 겪고 있었죠.

    사태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할 정도로 커진 것은, 지난 2일에 벌어진 교도소 습격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2일, 아이티의 폭력집단이 포르토프랭스의 국립교도소를 습격하면서, 3,800여 명의 재소자를 모두 탈옥시키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 폭력집단은 국립교도소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공격했고, 경찰은 이에 응전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직원과 수감자를 포함, 최소 1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교도소의 문은 열렸습니다.

    이들이 교도소를 습격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교도소에 여러 폭력집단의 두목이 수감되어 있기 때문이었죠.

    이번 폭력 사태의 배후는 아이티 폭력집단의 연합체인 ‘G9’을 이끄는 지미 셰리지에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흔히 ‘바베큐’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죠.

    아이티 경찰 역시 이들이 교도소를 습격한 사실을 인정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수감자들이 탈출하면 우리는 끝이다. 아무도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이티 경찰노조)

    현재 국립교도소에는 100여 명의 재소자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 아이티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아이티 서부 지역 전역에서 소방관과 보건 요원 등을 제외하고는 72시간 동안 야간 통행금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상사태가 선포된 직후 무장한 폭력집단이 포르토프랭스의 투생 뤼베르튀르 국제공항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정부의 치안 능력이 부재한 것을 중명한 셈이죠.

    미국 대사관은 아이티에 거주 중인 자국민들에게 대피를 권고했습니다. 프랑스 대사관 역시 비자 업무의 잠정 중단을 선언했고, 캐나다 대사관도 완전 폐쇄됐습니다.

    이미 포르토프랭스 영토의 80%는 폭력집단이 장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군대의 진입을 막고 있습니다.

    공공 서비스가 붕괴하며 학교와 기업은 문을 닫았고, 치안 부재로 인한 약탈과 폭력 사건에 대한 보고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태에 난민이 된 이들도 많았습니다. 현지 구호단체에 따르면, 이미 15,000여 명의 시민들이 집을 잃고 구호시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의 공백?

    이렇게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이티가 현재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있지만,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아이티는 2010년 대지진을 겪었습니다. 아이티 인구 5분의 1이 이재민이 된 재앙이었죠.

    지진 이후 아이티의 경제적 몰락은 가속화됐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활개치고 있던 폭력집단의 활동은 더 기승을 부렸죠.

    사건은 2021년 절정을 맞았습니다.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이 무장 괴한의 습격으로 암살당한 것입니다.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역시 임기 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았던 상황이었습니다. 2017년 취임한 그는 아이티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정국의 혼란은 계속됐습니다.

    2021년 4월 14일, 아이티 총리였던 조세프 주트가 사임했습니다. 모이즈 대통령은 임시 총리로 클로드 조세프 외무장관을 임명했죠.

    아이티 헌법상 총리의 임명을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클로드 조세프는 국회 동의 없이 급히 선임된 인물이었고, 그러니 ‘임시 총리’에 불과했습니다.

    모이즈 대통령은 차기 총리 후보를 물색했습니다. 그리고 7월 5일, 아리엘 앙리를 총리 후보에 지명했습니다.

    이틀 뒤인 7월 7일,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현직 총리는 임시 총리에 불과하고, 차기 총리는 아직 취임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죠. 이제 정부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임시 총리였던 클로드 조세프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습니다. 아리엘 앙리는 7월 20일에야 공식 취임했습니다. 그 뒤로는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죠.

    대통령의 자리가 비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대통령선거를 다시 치르는 것이 우리에게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아리엘 앙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도 2022년 9월이면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엘 앙리는 이 선거를 정국 혼란을 이유로 11월로 미뤘습니다.

    당연히 11월에도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아리엘 앙리는 직권으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을 해임했고, 선거는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2022년 초에는 선거를 치르겠다는 약속도 유야무야 사라졌습니다. 2022년 말, 아리엘 앙리는 2023년까지는 선거를 치르겠다고 합의습니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2년 반을 집권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죠. 함께 치러졌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아이티의 하원의원 임기는 4년, 상원의원 임기는 6년입니다. 국회의원 선거는 2016년에 마지막으로 치러졌습니다.

    임기를 마친 의원들의 자리는 차츰 공석이 되었죠. 2022년을 기해 모든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되었고, 이제 아이티에는 국회의원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국회 자체가 모두 공석으로, 기능을 완전히 멈춘 것입니다.

    그러니 권한대행의 형태로 국회도 없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아리엘 앙리가, 전임 대통령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 암살 사건의 수사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51명의 관련 용의자가 기소되면서, 이 가운데 암살된 대통령의 부인 마르티네 모이즈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죠.

    지금 아이티는 사실상 무정부상태에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투표를 기반으로 정당성을 갖고, 총리는 국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정당성을 갖습니다. 아리엘 앙리는 대통령에 선출된 적도 없고, 그를 신임한 국회는 이제 기능을 완전히 정지했습니다.

    그러니 혼란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이티의 정국은 어디로?

    혼란의 틈을 통해 성장한 것이 폭력집단이었습니다. 현재 아이티에는 100여 개의 폭력집단이 난립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세력이 강한 9개 갱단은 ‘G9’이라는 연합체까지 만들었습니다.

    아리엘 앙리 총리는 치안 문제 해소를 위해 국제사회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케냐가 그 손을 잡았죠. 케냐는 UN의 적극적인 지원도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케냐 법원은 케냐 경찰을 아이티에 파견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문제가 불거지자, 아리엘 앙리 총리는 케냐로 향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자리를 비우자, 국내 사정은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폭력집단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죠. 이것이 교도소 습격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이들이 국가비상사태 선언에도 불구하고 공항으로 향한 것도, 아리엘 앙리의 귀국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폭력집단은 그의 총리직 사퇴를 요구하고 있죠.

    언급했듯 아이티에서는 이전부터 폭력집단이 준동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경찰관이 1만 명도 되지 않는 아이티 정부가 철저히 무장한 폭력집단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이들이 도시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이전부터 연료나 의약품, 식수의 공급도 어려워진 상황이었습니다. 폭력과 범죄도 당연히 늘어나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상대해야 할 정부가 충분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폭력집단은 단우너을 사면하고 자신들에게 내각 직책을 달라며, 스스로를 ‘혁명가’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주 적절한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아리엘 앙리 대통령은 다시 또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케냐의 지원마저 법원의 판결로 막힌 상황에서, 다른 국제사회가 섣불리 그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아이티에 대한 지원을 고민했지만, 그것이 아리엘 앙리의 집권 연장에만 도움을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죠.

    케냐에서 소식을 접한 아리엘 앙리의 행방조차 현재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이티의 치안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앞으로도 더 긴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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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티는 1791년 혁명을 통해 건국된 국가입니다. 흑인 노예들이 백인 농장주에게 일으킨 반란이 독립과 건국까지 이어진 최초의 사건이었죠.

    아이티는 혁명 끝에 1804년에 독립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였고, 흑인이 주도한 근대적 국가 건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땅은 곧 빈곤과 몰락의 땅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아이티가 독립하면서 프랑스인의 농장과 인력을 가져간 것이니, 아이티가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의 압박에 아이티는 굴복했고, 갓 독립한 아이티 앞에는 막대한 빚이 놓였습니다. 아이티가 이 빚을 다 갚은 것은 1947년의 일입니다.

    이후 아이티는 미국의 점령, 군부 독재, 그리고 다시 오늘까지 혼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정말 지금 국제사회의 책임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통성 없는 정부와, 국가를 장악한 폭력집단. 둘 중 어느 하나에게도 섣불리 지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한때 국제사회의 패권을 쥐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현상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은 있어야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것조차, 아이티 국민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 위 글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연재되는 <세계의 소식들>을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과 다른 소식들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앞 회의 ‘세계’ 칼럼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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