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 총선,
    과반 확보 정당 없이 종료
    [세계] 정의운동-인민당-무술림연맹
        2024년 02월 13일 04:5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파키스탄에서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과반을 확보한 정당은 없었습니다.

    선거의 배경은?

    이번 선거의 핵심 인물은 역시 파키스탄의 전임 총리 임란 칸이었습니다. 임란 칸은 1980-90년대 파키스탄을 휩쓴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1992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우승을 이끌며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죠.

    크리켓 선수에서 은퇴한 뒤 임란 칸은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파키스탄 정의운동(PTI)’이라는 신당을 창당하고 선거에 출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계 입문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총선에서 35석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2018년에는 의외의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2018년 총선에서 PTI는 342석 중 149석을 얻어 1당이 되었습니다. PTI의 대표 임란 칸은 기타 소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총리직에 올랐죠.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인민당(PPP)과 파키스탄 무슬림연맹(PML)이 번갈아 집권했고, 그게 아니라면 군부 정권이 서 있었거든요.

    그러니 거대 양당이 아닌 새로운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정치 구도가 변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임란 칸의 집권기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군부 세력의 부패와 정치 개입을 비판하고, 기존 양당의 정권 세습을 비판하던 그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외교 노선의 혼선이나, 경제적 문제도 이어졌습니다. 인접국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민주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죠.

    임란 칸의 정치적 인기가 국가적 자존심에 기댄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자주 나왔습니다. 결국 군부와 갈등을 빚던 임란 칸은 2022년 의회의 불신임 투표로 총리직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임란 칸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임란 칸은 지난해 8월 부패 혐의로 수감됐습니다. 총리 재임 시절 외국에서 받은 선물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였습니다. 한때 임란 칸의 체포를 막기 위해 지지자들이 그의 자택을 호위하기도 했지만, 임란 칸은 결국 체포됐습니다. 징역 3년을 선고받았죠.

    이후 그의 형량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도 징역 10년이 추가됐습니다. 자신의 축출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주미 파키스탄 대사가 보낸 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혐의입니다.

    총리 시절 받은 선물을 헐값에 개인이 구매한 혐의로도 징역 14년이 추가됐습니다. 여기에 부인인 부슈라 비비와의 결혼 과정에서, 비비가 이혼 이후 3개월의 숙려 기간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로 남편 임란 칸에게도 7년의 혐의가 추가됐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임란 칸 전 총리가 받은 형량은 총 징역 34년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혐의들이 있어, 형량은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선거 결과는?

    수감된 임란 칸 전 총리는 당연히 이번 총선에도 출마하지 못했습니다. 옥중 출마를 타진했지만, 결국 후보 등록을 거부당했죠.

    임란 칸이 이끌던 파키스탄 정의운동(PTI)도 정당 활동을 금지당했습니다. 정당의 상징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소속 정치인은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파키스탄 정의운동의 지지세는 견고했습니다. 임란 칸 전 총리는 옥중에서 AI 음성 합성 기술을 이용해 유세에 나설 정도로 선거에 깊게 관여했죠.

    이번 총선은 지난 8일 실시됐습니다. 개표 결과는 약 60시간이 지난 11일에야 공개되었죠.

    파키스탄 하원 336석 중 지역구에서 선출되는 의석은 266석입니다. 이 가운데 후보자의 사망이나 선거 연기 등으로 2개 지역구의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264석을 선출한 셈이죠. 나머지 70석은 비례대표 의석입니다. 이 가운데 60석은 여성에게 할당되어 있고, 10석은 무슬림이 아닌 소수 종교 신자에게 할당되어 있습니다.

    지역구 264석 가운데 가장 많은 의석은 무소속 후보들이 차지했습니다. 모두 101명이었고, 이 가운데 93명은 파키스탄 정의운동과 연관된 후보자였습니다. 파키스탄 정의운동 측은 이번 선거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국민 모두의 힘을 믿었다. 여러분은 그 신뢰를 존중해 주었다.” (임란 칸 / 파키스탄 전 총리)

    파키스탄 무슬림연맹은 7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특히 무슬림연맹이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적은 의석은 실망스러운 결과겠죠. 하지만 일단 제1당이 된 무슬림연맹은 선거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두 개 정당 모두가 승리를 선언한 셈입니다.

    “파키스탄 무슬림연맹은 선거 결과 가장 큰 단일 정당이 되었다. 국가를 혼란에서 벗어나게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나와즈 샤리프 / 파키스탄 전 총리(파키스탄 무슬림연맹))

    파키스탄 인민당은 54석을 확보했습니다. 세 세력 모두 과반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득표를 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 비례대표 의석의 배분은 남았습니다. 파키스탄 정의운동은 정당으로 출마하지 않고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기 때문에, 비례대표에서는 한 석도 배분받지 못합니다. 비례대표 의석은 상당수 파키스탄 무슬림연맹이 가져갈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반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앞으로의 전망은?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문제는 정부 구성입니다. 일단 파키스탄 정의운동은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무소속 후보들이기 때문에 정부 구성 권한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단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은 파키스탄 무슬림연맹에게 주어집니다. 무슬림연맹을 이끄는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소수정당의 지지를 끌어와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이들의 지지 없이 정부를 구성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노력에 모두를 초청한다.” (나와즈 샤리프 / 파키스탄 전 총리(파키스탄 무슬림연맹))

    하지만 임란 칸 전 총리의 입장은 다릅니다. 일단 선거관리위원회가 파키스탄 정의운동의 정당 자격을 회복시키면, 무소속 후보들이 모두 복당해 1당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파키스탄 정의운동이 소수정당의 지지를 끌어내 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임란 칸 전 총리도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에 복귀할 수도 있겠죠.

    “국민들이 임란 칸 전 총리를 선택한 것이다.” (파키스탄 정의운동)

    결국 양측 모두에서 정부 구성을 둘러싼 협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정부 구성에서는 무슬림연맹이 우위를 점하겠지만, 선거에서 사실상 승리한 정의운동의 역할을 배제하기에도 부담이 큽니다.

    전문가들은 임란 칸 전 총리 측의 인사들을 차기 정부에 참여시키지 않는다면, 정치적 혼란이 지속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로 정부의 정당성은 큰 의심을 받았다. 군부는 수용하지 않겠지만, 칸 전 총리가 참여해야만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샤히드 카칸 압바시 / 파키스탄 전 총리(파키스탄 무슬림연맹))

    물론 장외 투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죠. 특히 임란 칸 전 총리의 지지자들 측에서는 선거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선거 조작으로 인해 파키스탄 정의운동 소속 후보가 덜 당선됐다는 것이죠.

    이들은 군부와 그 지원을 받는 파키스탄 무슬림연맹이 선거 당일 인터넷을 차단하고, 개표도 조작을 위해 느리게 진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거 조작을 규탄하는 시위도 이슬라마바드와 라호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최루탄을 동원해 시위 강제 해산에 나섰습니다.

    파키스탄 정의운동은 지지자들에게 시위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전역에서 선거가 교묘히 조작되었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항의에 나서야 한다.” (고하르 알리 칸 / 파키스탄 정의운동 의장)

    미국 국무부와 영국 외무부 역시 이번 선거에 공정성이 부족했다며, 광범위한 수사를 촉구했습니다.

    “파키스탄 선거의 공정성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자유로운 정보 접근과 법치를 포함한 기본적인 인권을 지킬 것을 촉구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 영국 외무장관)

    ———

    파키스탄 하원의원의 임기는 5년입니다. 그러니 과반을 얻은 정당에서 총리를 선출하면, 5년 간은 임기를 수행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하지만 1947년 정부 수립 이후, 파키스탄 총리 가운데 5년의 임기를 채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나마 4년을 버틴 임란 칸이나 나와즈 샤리프는 아주 안정적인 임기를 치른 축에 들죠.

    그리고 파키스탄 정치에는 다시 한 번, 그런 혼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임란 칸의 축출과 체포라는 사건이 파키스탄 정치에 남긴 상처도 분명합니다.

    선거에 승리했지만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세력과, 패배했지만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정당.

    결국 양 세력의 합의 없이 이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둘 모두에게, 그 합의를 주도하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 위 글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연재되는 <세계의 소식들>을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과 다른 소식들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앞 회의 ‘세계’ 칼럼 링크

    필자소개
    자유기고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