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아일랜드 최초의
    민족주의자 정부수반 탄생
    [세계]폭력의 땅에서 합의의 땅으로
        2024년 02월 06일 04: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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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여의 지방정부 공백을 겪었던 북아일랜드가 정부 구성을 완료했습니다. 최초의 민족주의자 총리가 탄생했습니다.

    민족주의자와 연방주의자?

    북아일랜드는 영국(United Kingdom)을 구성하는 지역입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모인 ‘연합 왕국’이죠. 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위치는 독특합니다. 나머지 세 지역과 달리, 북아일랜드는 브리튼 섬이 아니라 아일랜드 섬에 있으니까요.

    잉글랜드는 12세기부터 아일랜드를 지배했고, 1801년에는 공식적으로 아일랜드가 영국에 합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에 끝없이 저항했습니다. 특히 영국은 성공회를 믿게 되고, 아일랜드인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 갈등은 커졌죠.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보여준 영국의 무능과,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의 물결으로 아일랜드인 독립의 목소리를 더 높이기 시작합니다.

    1918년, 아일랜드인은 결국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죠. 영국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지만, 아일랜드인은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영국군을 괴롭혔습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영국인 사이에는 전쟁 피로가 막심했죠.

    결국 영국은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만들어 사실상 독립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만들어졌고, 폭넓은 자치권이 보장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북부의 6개 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에 포함되지 않고, 영국에 잔류하게 된 것이죠. 이 땅이 바로 ‘북아일랜드’였습니다.

    북아일랜드는 원래 인구가 적은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영국은 긴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영국인을 이곳에 많이 이주시켰죠. 결국 독립 시점에서 북아일랜드는 성공회 신자인 영국인이,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인보다 다수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영국은 이것을 빌미로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잔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아일랜드 안에서도 의견은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결국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땅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죠. 인구 60%를 차지하는 영국인은 지방정부의 권력을 쥐고 아일랜드인을 탄압했습니다. 인구 40% 아일랜드인은 반군을 조직하고, 테러를 벌였죠.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라는 이름의 아일랜드인 조직은 1990년대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영국 주요 요인 암살을 벌이기도 했죠. 반대로 영국군도 북아일랜드인에 대한 탄압을 벌였습니다.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는 영국군의 발포로 시민 1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의 정치세력은 크게 나누면 ‘연방주의자(Unionist)’와 ‘민족주의자(Nationalist)’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연방주의자는 영국이라는 연방에 잔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면 민족주의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주장하죠.

    북아일랜드 정치의 구조는?

    물론 지금까지 북아일랜드가 테러와 탄압의 현장인 것은 아닙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정치세력은 1998년 4월 ‘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북아일랜드에는 자치의회가 설치됐습니다. 자치의회는 농업, 재무, 교육, 보건, 건설 등 중요한 권한을 영국 정부에서 위임받았습니다. 자치의회의 의원들은 모두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을 등록해야 합니다. ‘연방주의자’와 ‘민족주의자’ 혹은 ‘기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죠.

    자치의회에서 중요한 안건은 연방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통과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과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안건을 통과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자치정부의 수반인 ‘제1장관(First Minister)’은 다수파에서 임명하되, 그 아래의 ‘제1부장관(Deputy First Minister)’는 반대편에서 임명해야 합니다.

    제1장관과 제1부장관의 권한도 사실상 동등하게 두었습니다. 법무장관은 양 파벌의 합의로 임명하고, 나머지 장관도 반드시 의석 비율대로 임명합니다. 그러니 제도적으로 대연정이 강제되어 있는 체제라고 할 수 있겠죠. 성 금요일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북아일랜드 정치의 독특한 현장입니다.

    이 협정에 따라 무장 단체였던 IRA는 무장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북아일랜드 갈등은 이제 자치의회라는 제도 안으로 편입됐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의회가 늘 제대로 작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 파벌 사이 의견이 갈리면, 오랜 기간 정부가 구성되지 못하기도 하죠.

    이번 의회가 그랬습니다. 지난번 선거가 치러진 것이 벌써 2년 전인 2022년 5월이었으니까요.모두 90석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는 민족주의자인 신 페인(Sinn Fein)이 27석을 얻었습니다. 기존 여당인 민주연방당(DUP)이 얻은 의석은 25석이었습니다.

    사실 북아일랜드 의회에서 다수파가 제1장관을, 소수파가 제1부장관을 맡는다고 했지만, 이제까지 제1장관은 모두 연방주의자의 몫이었습니다. 인구 구성상 당연한 일이었죠. 북아일랜드는 애초에 아일랜드계보다 영국계가 많기 때문에 영국에 남은 땅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선거는 이변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정당이 처음으로 1당을 차지했으니까요. 그러니 예상대로라면 민족주의자가 제1장관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각 정당의 결과가 그랬을 뿐, 의회 전체에서 연방주의자는 여전히 다수파였습니다. 중도파인 동맹당이 17석을 가져가며 둘 모두 과반을 차지하는 못했지만, 언급했듯 북아일랜드 정치에서 과반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강제적인 대연정이 제도화되어 있으니까요.

    관례대로라면 1당인 신 페인이 제1장관을 가져가는 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 이변 앞에서, 정부 구성은 한없이 미뤄졌습니다.

    이번 자치정부 구성은?

    연방주의자인 민주연방당이 걸고 넘어진 것은 영국과의 무역장벽 문제였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서, 북아일랜드와 영국 사이 무역 장벽이 설치되는 문제가 있었죠. 이 문제를 두고 연방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갈등했습니다. 2년간의 정부 구성 협상도 이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두고 있었죠.

    결국 영국과의 연방을 강화하는 내용의 합의안이 발표되면서, 북아일랜드 연방주의자도 정부에 복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2년 만에 정부는 다시 세워졌습니다.

    미셸 오닐 북아일랜드 제1장관/신페인당 부대표

    이번 정부의 제1장관은 신 페인 부대표 미셸 오닐이 맡았습니다. 민족주의자로서는 최초로 제1장관직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신 페인의 대표는 메리 루 맥도날드 대표입니다. 하지만 신 페인은 아일랜드 통합을 주장하는 당답게,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모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메리 루 맥도날드 대표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의원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신 페인은 부대표 미셸 오닐이 사실상 이끌고 있죠. 따라서 미셸 오닐이 제1장관직에 올랐습니다. 제1부장관에는 소수파인 민주연방당의 에마 리틀펜겔리가 임명됐습니다.

    “국가 정체성과 전통을 존중하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섬기는 총리가 되겠다.” (미셸 오닐 / 북아일랜드 제1장관)

    오닐 장관의 임명은 최초의 민족주의자 정권의 등장이라는 면에서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오닐 장관은 신 페인의 1세대 정치인과는 다른 면이 많거든요. 신 페인의 1세대 정치인은, 성 금요일 협정 이전에 IRA에서 활동하거나 IRA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인사들이었습니다. IRA와 가까운 인사들인 만큼, 과거의 테러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30여 년 동안 신 페인을 이끈 게리 애덤스는 2014년 과거의 살인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오닐 장관은 성 금요일 협정 이후에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무장 대신 평화를 강조하고, 민족주의자이지만 영국과의 화해도 추진하죠. 오닐 장관은 202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당시 조의를 표했고, 찰스 3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과거의 신 페인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닐 장관은 2007년 처음으로 북아일랜드 자치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농림부 장관, 보건부 장관 등을 역임하다 2017년부터 당대표를 맡았습니다. 그가 당대표를 맡은 뒤 신 페인은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신 페인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됐죠. 이번 선거 승리 역시 그의 공이 컸습니다.

    오닐 장관은 아버지가 IRA 대원 출신이고, 사촌은 IRA 활동 중 영국군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장 노선보다는 평화 노선을 추구하고 있죠.

    “과거의 불의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오직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오닐 장관의 임명에 아일랜드계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축하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지난 수십년 간의 진보를 이어가는 연립정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한다.” (조 바이든 / 미국 대통령)

    하지만 한편으로 오닐 장관은 민족주의자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제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세대는 민족주의자가 총리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미셸 오닐 / 북아일랜드 제1장관)

    오닐 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가 ‘기회의 10년’이라 언급하며, 아일랜드 통일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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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일랜드는 유럽 제1세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분쟁의 장이었습니다. 폭력과 탄압의 땅이었죠. 하지만 이제 북아일랜드는 그 폭력을 극복한 합의의 땅이 되었습니다. 신뢰와 협력으로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명이 되었습니다.

    2년의 진통 끝에 탄생한 민족주의자 정부는 그 능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세대를 달리해 연방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갈등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은 이제 의회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도 다시 총을 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 점이 북아일랜드의 정치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닐 제1장관의 임기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가, 다른 분쟁의 땅에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위 글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연재되는 <세계의 소식들>을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과 다른 소식들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앞 회의 ‘국제’ 칼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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