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농민들이
    ‘파리 봉쇄’ 시위에 나섰다
    [국제] 유럽 전체로 확산도 우려돼
        2024년 01월 31일 09:4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프랑스의 농민 집회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트랙터로 파리를 봉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시위의 원인은?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농지를 가진 국가입니다.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비롯해 밀, 보리, 감자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땅이죠. 농업 뿐 아니라 축산업도 발달했습니다. 소나 양을 많이 기르고 있죠.

    프랑스 중남부 지역은 풍부한 일조량과 넓은 국토를 기반으로 ‘농업 대국’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농업 생산력은 그간 프랑스의 경제와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프랑스 국토 중 53%가 농지입니다. 유럽 농업 생산액의 18%를 프랑스가 차지합니다.

    프랑스가 국제적인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던 데에도, 식량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량 안보’가 기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서유럽의 식량 안보에도 프랑스는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농업인의 생활은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프랑스 농민들은 최저임금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 셈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최근에는 환경 규제도 강화됐습니다. 유럽연합은 회원국의 농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강제하고 있죠. 농약이나 분뇨 등, 농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도 관리되지 않으면 심각한 영역이니까요.

    농지의 최소 4%를 휴경지로 두어, 자연의 지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규제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포함해 여러 요건을 충족한 농가에만 EU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농민들의 행정업무도 당연히 늘어났습니다.

    값싼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도 최근 프랑스 농업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불만은 꾸준히 누적되어 왔습니다.

    불만이 폭발한 계기는 지난 18일 발표된 정부 방침이었습니다. 농업용 경유에 대한 면세 혜택을 폐지하기로 한 것이죠. 세수 확보와 함께 환경오염 억제 효과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반발하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농업용 경유 면세 유지, EU 농업 보조금의 즉시 지급, 농업인 보험금 지급 보장, 유기농 농가 지원 등을 요구했죠.

    농민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결국 농업용 경유에 대한 과세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정부의 명확한 약속이 필요하다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다. 더 강력하고 구체적인 약속이 필요하다.” (전국농민연맹 일드프랑스지부 다미앵 사무총장)

    농민들은 환경오염 억제를 위해 EU의 규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프랑스 정부의 독자적인 규제는 과도하다는 입장입니다.

    외국에서 환경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값싸게 생산된 농산물을 저관세로 수입하면서, 자국 농민에게만 환경 규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시위는 지금?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 전국농민연맹은 29일 오후 2시부터 파리를 ‘봉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수도에 대한 무기한 포위를 시작한다. 수도로 이어지는 모든 주요 도로는 농부들이 차지한다.” (프랑스 전국농민연맹)

    전국농민연맹은 트랙터를 이용해 파리로 향하는 주요 간선도로를 모두 점거했습니다. 파리 근교 렁지스의 도매시장도 봉쇄를 시도했습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도로에 배치했고, 짚 더미를 이용해 간이 벽을 만들었습니다. 수도 파리로 향하는 고속도로 8곳이 점거됐습니다.

    시위에는 최대 1만여 명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속도로를 점거한 농민들은 필요하다면 파리 시내까지 진입해 도심 교통을 마비시키겠다는 계획입니다.

    농민들은 봉쇄한 고속도로에 천막을 설치했습니다. 정부가 적절한 농가 지원 정책을 마련하고 서면으로 약속하기 전까지는 도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농업 중심지인 남서부 지방에서 출발한 트랙터 시위는 이제 수도 파리의 코앞까지 닿았습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은 경찰과 헌병대 1만 5천여 명을 투입해 시위대의 파리 진입을 저지할 방침입니다. 일부 지역에는 장갑차도 배치됐습니다.

    파리로 향하는 주요 고속도로가 폐쇄되면서 프랑스 수도권 일대에는 교통 혼잡이 빚어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여론은 대부분 농민 시위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24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9%가 농민 시위를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고속도로 봉쇄 하루 전인 28일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 리자>에 수프를 끼얹는 시위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농업 정책의 전환을 요구했습니다.

    유명한 명화을 수프나 페인트 등으로 훼손하는 ‘반달리즘’ 시위는 최근 환경운동 진영에서 자주 사용하는 시위 방법입니다.

    이런 시위는 환경 문제의 시급성을 강조하기 위한 기법이죠. <모나 리자>는 강화 유리로 덮여 있어, 작품에 영구적인 손상은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농장을 방문해 농가 지원책을 발표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외국산 농산물과의 불공정 경쟁을 해소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회의를 소집해 시위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요구사항 가운데 해결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며, 시위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유럽의 농업 위기인가?

    문제는 이 상황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농업 문제는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공유하고 있는 문제니까요.

    독일이나 벨기에 등 인접 국가의 농민들도 시위에 나설 조짐이 보고 있습니다. 농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동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특히 민감합니다.

    이미 폴란드는 농업 문제로 전국적인 몸살을 겪은 바 있었죠.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문제였습니다.

    막대한 농업 생산력을 자랑하던 우크라이나는 원래 흑해를 통해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농산물을 수출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이후 흑해 루트는 막히고 말았죠. 한동안은 ‘흑해 곡물 협정’을 맺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용인했지만, 협정은 지난해 7월 종료됐습니다.

    이에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동유럽을 통해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공급 증가로 곡물 가격의 하락을 우려한 동유럽 농민들은 반발했죠.

    당시 폴란드 정부는 농산물 문제로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하게 반응했습니다. 이후 총선으로 정권은 교체되었으나, 농민들의 불만은 여전합니다.

    이미 지난 24일부터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습니다.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다음달 1일 EU 특별정상회의를 계기로 농업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르줄라 폰디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 농민들의 불만을 전달하고, EU의 농업 지원안 마련을 촉구할 계획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시위가 6년 전 임기 초에 촉발됐던 ‘노란 조끼‘ 운동의 재현이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당시 노란 조끼 운동도 환경오염 억제를 위해 유류세를 인상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최대 28만 명이 참여한 시위를 마크롱 정부는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11명의 시위대가 사망했습니다.

    특히 유럽 전역을 농업 관련 시위가 강타한다면, 위기에 몰린 극우 세력에게는 호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환경오염 규제, EU의 관여,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까지 이번 시위에는 극우 정당이 관여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합니다.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을 이끄는 마린 르펜도 농가에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시위를 격화시키려 하고 있죠.

    물론 지금으로서는 농민 시위가 극우 세력과 밀접히 결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위를 확대시키려 하는 극우정당의 노림수도 모두들 모르는 바가 아니고요.

    그러나 시위가 장기화되고 처음의 의제가 흐려지고 나면, 어느 세력이 끝까지 남아있느냐가 운동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기도 합니다. 이 농민 시위를 눈여겨 봐야 할 이유는 여전히 많습니다.

    —-

    프랑스의 농민 시위를 심상치 않게 보는 것은, 이 시위가 단순히 유류세 부과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란 조끼‘ 운동이 단지 유류세 인상에 따른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그에 따른 농민들의 피해, 유럽연합의 일률적인 규제, 엄격해지는 환경오염 기준까지.

    지금 유럽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제들이 이 시위에 엉켜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연합의 행보를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지원도, 환경 규제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연합은 필요한 조치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피해는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제하는 것 역시, 유럽연합이라는 국가 연합이 수행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역할입니다.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옳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그 틈에서 극단주의의 힘은 자라납니다. 지난 십여 년 유럽에서 보았던 비극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위 글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연재되는 <세계의 소식들>을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과 다른 소식들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앞 회의 ‘국제’ 칼럼 링크

    필자소개
    자유기고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