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사람 눈에 비친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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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4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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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언론은 김연아, 박태환에 이은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뉴스와 인터넷은 두 번에 걸친 연장전 끝에 결승점에 이른 이 새 스타를 중심으로 술렁이고, 대중은 익숙한 언론의 천덕꾸러기였던 그가 갑작스런 칭송의 주인공이 된 상황에 잘 적응하며 언론과 손발을 맞춘다.

    "여기는 한미FTA 타이틀매치 현장?"-스포츠 중계의 착각에 빠진 언론

    마치 긴 마라톤 경기의 최종 승자라도 되는 것처럼, 와신상담 끝에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하루아침에 언론의 품에 금의환향하였다.

    다수당 한나라당의 전폭적 지지를 한 몸에 받고, 그의 일생에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던 지지율 상승의 감격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드디어 대한민국이 공식적인 미국의 속국이 되는 협정을 맺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 반FTA 촛불시위장에서 칼리와 엄마
     

    미래공상과학소설 같은 대한민국 

    희완이 종종 말하는 “미래공상과학 소설 같은 한국”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요즘이다. 그 어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 연일 펼쳐지는 이 사회에 소설이 안 팔리는 건 너무 당연하다.

    10년 전 외환위기를 맞을 땐, 어쩔 수 없이 IMF에 의해 우리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기에 이를 악물고 극복하려 했지만, 이번엔 대통령이 나서서 저지른 자발적 선택이기에, 이 기약없는 경제적 구속이 이토록 흥겹단 말인가?

    하긴 신용불량자가 되고, 영원히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못 헤어나도 뉴스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외환보유고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하면, 우린 각자의 못남을 탓하면 그만일 게다.

    언론은 그리고 이 흥분되는 나날들에 ‘불편한 진실’들을 전하는 자들을 슬며시 제쳐놓고 있다. 타결이 되기 직전, 협상장 앞에서 분신을 한 허세욱 당원은 숯덩이가 된 육신을 여전히 힘겹게 보듬으며 세상에 이 위선적 협상의 진실을 전하려 애쓰고 있으나, 언론은 이미 그의 근황에 관심을 잃고 있다.

    시청앞 광장에서 만난 허세욱 당원

    2007년 3월 30일 밤, 예정대로라면 이 밤은 1세기 만에 다시 이 나라 관료들에 의해 이 나라의 주권이 남의 손에 넘어가기 전 마지막 밤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이 아쉬운 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보내고 싶어 희완, 칼리와 함께 시청 앞 집회장을 찾았다.

    태어나서 세 번째로 집회에 참석하는 칼리. 이슈는 늘 같았다. 앞서 열리고 있는 대학생들의 등록금집회. 긴박한 이 나라의 운명과는 상반되는 경쾌한 축제의 분위기의 집회장을 칼리는 깔깔대며 질주한다.

    반 FTA 집회가 시작되기 전, 엉거주춤 서서 동분서주한 칼리를 감시하고 있을 때, 반백의 머리를 짧게 깎은 50대 남자분이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신다. 관악 지역위 당원들과 인사를 나누신다. 그 지역 당원인 것이 분명하다.

    손으로 직접 쓰신 푯말을 드신 수척한 어깨, 차분하고도 다소 무거운 눈빛, 한없이 낮은 몸가짐.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치열하면서도 겸허하게 삶을 마주해온 사람이 지니는 미지의 경건함이 순간, 시선을 압도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집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우리는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으러 떠났다. 이틀 뒤에 그를 다시 보았던 것은 인터넷에서다. 바로 그 침착한 눈빛, 낮은 자세의 성자같은 분위기의 남자는 허세욱 당원이었다.

    단식에도 분신에도 꿈쩍 않는 배포 있는 지도자

    집회도 단식도 그리고 분신도 그 어느 것에도 꿈쩍 않는 배포 있는 대통령, 최신 뉴스들만을 속속 발굴, 가공해서 전해주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포스트모던한 언론으로부터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이 남자.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체코의 소련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분신한 두 청년을 유럽사회는 수십년 동안 기억해 왔다고 희완은 전한다. 유럽인들에게 이 두 청년을 세상에서 분신을 한 유일한 인물들이었고 영원히 이 두 사람을 기억할 것처럼 언론은 이들의 죽음을 신화화했다. 서방언론들에게 반공산주의를 선전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완은 급히 프랑스의 여동생에게 전화해 프랑스 언론이 이 분신을 이야기 하는지 묻는다. 물론 AFP는 신자유주의에 항거해 분신을 한 택시운전사의 이름 따위는 전하지 않았다. 한국언론의 흥분을, 승리로 포장되고 있는 이 이상한 국제 스포츠경기의 결과를 전달할 뿐이다.

    그러더니 이번엔 또 관악지역위에 전화하라고 조른다. 치료비를 위해 성금을 내고 싶다고. 화상을 치료하는 데는 정말 많은 돈이 든다고. 아직 성금을 걷고 있지 않다고 답하니 언론 대신 이젠 매일 출근한 내게 전화를 걸어 그의 근황을 묻는다.

    분신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투쟁의 한 장면이다. 전태일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투쟁을 점화하기 위한 불쏘시개로 바쳐왔다. 그러나 언론은 우리에게 그것을 금방 잊을 것을, 바로 그보다 더 볼만한 주목할 만한 스펙타클이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학습시켜 왔고, 투쟁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조차 그들의 학습에 쉽게 길들여져 왔다.

    허세욱 당원이 숯덩이가 된 육신을 다시 추슬러 아름답게 일어서 함께 손을 맞잡고, 다시 광장에 나서서 이 죽음의 협정을 걷어차고 삶을 위한 행진을 함께 하길 간절히 바란다.

    저들은 정말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담화 속에서 전략적 반대를 해왔던 사람들이 협상에 도움을 많이 주었고, 이젠 안 그래도 된다고 한 노무현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전하자, 희완은 심각하게 그가 ‘의학적’인 정신착란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 와서 처음으로 TV를 며칠째 보고 있는 희완이 미국 협상 대표인 웬디 커틀러를 보더니 냉동고에 자신의 아이를 넣어 살해한 프랑스 여자와 너무 닮았다고 했다. 처음엔 ‘왜 갑자기 그 여자가 저기 나오지?’ 했다는 것이다.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야.” 나의 대답에 그럼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녀 역시 미국의 초국적 자본만을 위해 이익을 가져다 줄 뿐, 미국 민중의 삶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임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 한 사람 위험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자가 있었다며 그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야말로, 내면의 완전한 착란상태를 표면의 침착한 표정으로 덮고 있는 자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그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어린 시절의 조지부시 (사진 위),  입술이 거의없어진 오늘의 조지 부시
     

    희완에 따르면 예술가는 손이 아니라 눈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이미지를 정교한 수작업으로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적절한 이미지를 식별해내고 선택하고 배치하는 것이 예술가에게 더 앞서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우리의 최초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그의 프로젝트, 세상을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비디오 작업 역시, 그 눈빛과 입술 모양에서 그 두 종류의 인류가 확연히 구분됨을 보여주고자 했던 시도였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얇은 입술을 가진 종족은 50~60대의 백인 남성들이라 한다. 수세기 동안 전 인류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도맡아왔던 그들이 반인류적 행위를 반복할 때마다 입술을 앙다무는 동안 입술이 그토록 얇아졌다는 주장이다.

    부시의 경우, 입술을 거의 다 먹어버려서 거의 입술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젊은 날, 방종하긴 할 지언정, 전쟁광이 되기엔 훨씬 인간적이었던 그는 다른 모습이었다. 반면 어린아이들 중에 입술 선이 뾰족하게 살아 있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 말도 대충 맞는 것 같다.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빌헬름 라이히

    20세기의 저주받은 천재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저작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통해 "대중들은 어째서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기 보다, 가볍게 믿고 맹목적이고 싶어하는 -사자에게는 더 넓은 들판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고, 내심 내가 사자가 된 사실만을 기뻐하는 오늘의 한국 사람들 심리와 일치하는- 대중의 비합리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이 파시즘 적인 정치 지도자를 불러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아픈 민중들이 정신착란적인 지도자를 불러왔다는 논리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해법은 아주 단순하다. 즐거움에 근거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은 삶과 노동의 적대관계를 자연스럽게 해소하며, 생물학적 활동욕구가 최대한 발전할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런 성욕구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경직된 성격구조의 형성을 방지한다는….

    어쩌면 상식적이기 까지한 논리를 내세웠던 라이히는 미치광이로 낙인 찍혀 학계로부터 추방당하고 미국의 감옥에서 죽어갔다. 사랑과 노동과 지식이 우리 생활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미쳐가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세 가지는 바로 사랑과 노동과 지식인 것을.

    내가 좋아하는 일?

       
      ▲ 빌헬름 라이히 (1897-1957)
     

    라이히의 말대로 인류가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 이건가?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내가 누구인지, 그것을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고, 모난 돌 옆에 있으면 정 맞을 뿐 아니라, 성적이 학과를 결정하고, 연봉이 행복을 측정하는 도구인 사회에서 그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는 일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조작되고, 개인이 지닌 자발적 의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옷, 반찬, 영화, 작가, 혹은 길, 동네, 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일일이 묻고, 그 좋아함의 목록을 다 모으다 보면, 일관된 색깔이 드러나게 된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한우물’ 이데올로기로부터 반드시 탈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행히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을 잘 파악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숲에서 호흡이 맞는 나무들과 어울려 커갈 수 있었다면 더없는 행운이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과 능력의 지점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르는 것 같다.

    대부분은 특히나 우리처럼 사지선다의 선택만을 오래 훈련받아온 사회에선,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욕망과 기호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귀에 대고 너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강요하던 박정희 독재자서부터, 오늘날 간판을 노골적으로 교육인적자원부로 달고 있는 이 나라 교육부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이 사회구성원들을 거대한 기계를 잘 굴려줄 나사 하나 쯤으로 줄곧 여겨왔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최고가 되라…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이런 저런 그럴듯한 수사들을 동원, 결국 모두에게 한우물만 파서 거기서 끝장을 볼 것을 강요해 왔다. 이 숲 저 숲을 유랑하며 세상의 이러 저러한 즐거움을 두루 맛보고 다니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정착을 못해요. 정착을… 한 우물을 파야지’ 하는 손가락질이 뒤따라 다녔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국영기업체에서 축제담당을 하다가, 공연기획자가 되어 대학로를 한동안 누빈 후, 잠시 사진을 찍는 일에 홀려 시간을 쏟다가, 8년만에 다시 학생이 되어 이번엔 문화정책을 공부하고… 그리고 지금은 정당에서 일하는 나는 자신의 욕망을 열심히 쫓아갔고, 그러다가 결국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많은 시간을 들인 여정이었다.

    언제나 이 긴 여정의 골목 골목에서 난 스스로에겐 절박했던 욕구에 답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았지만, 자신에겐 떳떳하고 분명히 설득력 있는 이 흐름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부담은 나의 일관성 없어 보이는 삶에 대한 변명을 늘 준비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문학과 지질학,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교수였고, 무대미술가, 무대의상 디자이너였으며, 지금 현재 설치미술과 회화, 조각, 사진을 두루두루 왕성하게 하고 있는, 나보다 한참 더 정신없는 삶의 여정을 매우 평안하고 자연스럽게 누려온 희완을 만나고, 모든 하고 싶은 일을 다 누리는 삶이 인간을 원자화 하는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길임을 확고히 믿는 그의 생각을 접하고서, 비로소 머리 속까지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후… (이제서야 말했다. 그가 종목 안 가리는 예술가란 사실. 희완은 사진작가로 불리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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