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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 총리(08~12)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④
        2022년 07월 02일 04: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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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③ 푸틴 2기(2004~2008)”

    4. 두 번째 총리 (2008~2012)

    1) 신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조지아 남오세티야 전쟁

    2008년 8월 남오세티야(조지아) 전쟁은 메드베데프 신임 대통령의 첫 번째 시험무대였다. 남오세티야 전쟁은 무엇이었나?

    조지아 영토 내의 남오세티야와 압하자야는 소연방이 해체된 후, 1990년대 초반 짧은 기간 조지아와 무력충돌을 벌이고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외교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조지아의 일부로 남아 있으면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공화국 지위를 요구하고 있었다. 2008년 2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푸틴은 두 지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주둔하는 러시아 평화유지군 병력을 증강했다. 2008년 5월, 나토 정상회담에서 조지아가 나토의 ‘행동계획 멤버’ 자격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조지아의 사카쉬빌리 대통령은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해결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실 러시아는 조지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개입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2006년 말에 세워놓은 상태였다. 2008년 여름 러시아군 지휘부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와 가까운 코카서스 북부에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대규모 병력을 집결해 놓았다.

    그러던 중, 8월 초부터 남오세티야에서 폭발물, 총격, 포격과 같은 충돌이 발생하고, 8일 조지아군은 분리주의자를 진압하기 위해 남오세티야로 전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고 있던 푸틴과 부시가 동시에 이 소식을 들었다. 다음 날, 푸틴 총리는 북오세티야로 떠났고, 야전에서 전투복 차림으로 작전 브리핑을 받는 장면이 TV로 방송되었다. 러시아군 탱크가 츠한빌리에 도착했고, 곧 오세티아 지역을 넘어 스탈린의 출생지인 조지아 고리시로 진격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파견되었던 조지아 군인 2천 명을 조지아로 공수해주는 도움을 줬지만,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조지아에 파견된 미국 군사고문단도 아예 철수하여 미국이 관여한다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했다. 조지아 측은 러시아군이 직접 개입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속수무책이었다. 12일 조지아는 사실상 항복했고,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로 15일에 양측이 평화안에 서명했다. 26일 메드베데프는 두 자치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세계에서 이들을 독립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러시아를 포함해 5개국이다.)

    조지아 전쟁은 러시아 내에서 민족주의 감정을 크게 부추겼고, 그 중심에는 메드베데프가 아니라 푸틴이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창백한 얼굴로 크렘린에서 전쟁명령을 내릴 때, 푸틴은 야전에서 군을 지휘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메드베데프는 형식적으로 국가수반이었으나, 그의 입장은 항상 오락가락 해보였는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총리 푸틴의 ‘재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지아 전쟁은 러시아가 군사적 행동을 할 때, 나토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러시아 측에 교훈으로 남겼다. 사실 유럽의 나토 회원국 중에는 러시아의 막강한 육군력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나라는 없다. 영국, 프랑스, 독일 정도가 해외파병이 가능한 규모의 군을 보유하고 있으나, 그들도 자국 밖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일 능력은 없다.(1) (미국의 도움 없이는) 대규모 군대를 역외로 수송할 수단도 없고, 러시아군과 같은 막강한 군대를 적으로 상정한 작전계획과 준비도 없다. 탈냉전 이후 나토가 상정한 시나리오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모형이었다. 즉 인종학살, 민족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 나토가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가 초점이었지, 남오세티야 전쟁처럼 러시아 육군이 아무런 예고 없이 기동군, 자동화사단, 여단전투단을 동원해 진격하는 상황은 애초에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나토는 남오세아티야 전쟁과 러시아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면 남오세티야 전쟁 후 나토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나. ① 2009년 3~4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나토 복귀를 선언했다. 프랑스는 1966년 나토 탈퇴를 선언하며, 나토의 정책과 전략이 프랑스의 정체성과 이익이 반한다고 밝혔으나, 조지아 사태를 계기로 공식적 입장을 바꿨다. ② 2009년 발표된 나토 과업의 우선순위에 첫 번째로 “침략거부·방위와 국경 안전보장‘이 올라갔다. 그 이전에 중요 항목으로 있던 치안위기 대응, 자연재해 복구, 수송·통신·의료를 아예 삭제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제는 군대가 여유로운 평시가 아니라는 인식이 반영된 셈이었다. ③ 나토군 사령관에게 나토대응군에 대한 전시·평시 작전지휘권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는 회원국 전체의 동의를 받아 해외파병이 가능한 복잡한 절차를 단순화하자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또 하나는 회원국의 요청에 따라 나토군의 일부를 평시에도 주둔하자는 제안도 나왔는데, 이는 나토대응군이 아무리 빨리 출동해도 러시아 육군이 동유럽국 수도에 도착하는 것보다 빠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안은 말로만 이뤄질 뿐 현실에서 강하게 추진되지는 못했다. 가장 큰 장애는 예산 부족이었다. 계획상으로는 나토 회원국 군대의 일부로 구성된 나토대응군의 인원을 증강하자고 했으나 실제로는 현재원이 감소했다. 나토는 뚜렷한 결실도 없는 상태에서 2014년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2)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개헌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과 함께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러시아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러시아 기업이 외국은행에 대규모 부채를 지고 있었고, 국제유가는 급락하기 시작해 10월에 이르면 배럴당 34달러로 떨어졌다.

    다만 1998년 금융위기 당시와 달리 러시아는 대규모 외환준비금을 지니고 있었는데, 2008년 8월 시점에 약 5980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규모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외환준비금을 믿고, 극단적인 케인스주의 정책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즉 G20 국가 중에서 최대 규모의 재정을 동원한 경기부양책을 펼쳤다. 2008년에 GDP의 4.1%에 달하는 재정흑자는 2009년 GDP의 –6.0%의 재정적자로 반전되었다. 정부는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VEB)을 통해서 국유기업과 민간기업에 5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2008년 9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준비금에서 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1040억 달러를 썼다. 또한, 과대평가된 루블화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2000억 달러를 지출했다.

    이러한 케인스주의 정책은 합리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결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GDP는 2009년 –7.8%를 기록해 G20 국가 중 가장 많이 하락했고, 러시아의 미래 생산성은 더 악화되었다. 주입된 자본 중 상당량이 러시아 밖으로 빠져나갔다. IMF는 러시아의 2008년 자본도피가 1190억 달러에 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국가와 올리가르히가 소유한 비효율적인 거대기업을 구제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기업을 몰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전략적’ 국유기업이라고 지목된 481개 국유기업 중에서 79개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즉 수익성이 떨어져서 위기 이전에 더 많은 부채를 쌓은 기업이 위기 동안에 정부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더 컸다. 정부 지원을 받은 기업은 구제금융 이후 생산성은 하락했지만, 규모는 더 커졌다. 즉 정부는 최악의 기업에 돈을 썼고, 이는 그들의 실적을 더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 꼴이 되었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은 외부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고, 2010~12년 러시아의 경제성장은 정체 상태에 빠진 유로존 국가들에 비해서는 괜찮아 보였다. 거시경제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경제구조가 더 악화되고 개혁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심지어 유가가 높은 상태에도 경제성장률이 점차 하락했다.

    한편, 금융위기가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던 2008년 11월,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개헌을 제안했다.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자는 제안이었다. 왜 개헌을 해야 하는지 뚜렷한 설명은 없었다. 푸틴은 선거를 자주 실시하는 게 과거 소련 소속 국가들에서 벌어졌던 ‘색깔 혁명’의 빌미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9일이 안 걸려 개헌안이 두마에 회부되었고, 공산당만 반대했다. 곧 두마와 상원을 통과했고, 12월 30일 메드베데프는 개정헌법에 서명했다.

    3) 오바마 대통령과 러시아

    2009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시 말기 최악의 상황에 접어든 미국-러시아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마바 행정부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푸틴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바마와 메데베데프는 부시-푸틴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대체할 후속 협정, 뉴 스타트를 개시했다. 이란의 비밀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에 대해 러시아도 미국과 함께 유엔안보리 제재안에 동의했다. 오바마는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방어망을 배치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계획을 보류했다. 또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국내정치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도 자제하기로 했다.

    실제로 2010년 1~2월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에서는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 지역당)가 티모셴코(전우크라이나연합 조국)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얄타에서 푸틴과 회담을 열고 푸틴의 거대한 공식적, 비공식적 지원을 받았으나, 부정선거 시비로 재선거 끝에 떨어졌던 인물이었다.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된 후, 경쟁자였던 티모셴코는 배임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럽연합, 나토 가입을 백지화하고 친러시아 정책을 펼쳤다.

    한편, 2010년 4월에는 FBI가 위장 신분으로 활동 중인 러시아 정보요원 11명을 적발했지만, 백악관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다루기도 했다. (이들은 푸틴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활동했던 요원들이었다.)

    2010년 12월 튀지니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시위는 2011년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렸고, 리비아에서는 카다피 정권을 위협했다. 이때 카다피가 공군을 동원해 민간인을 학살하자, 2011년 3월 18일 유엔안보리는 유엔헌장 42조에 따라 리비아 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치를 결의했다. 이때 거부권을 지닌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 비상임국인 독일, 브라질, 인도가 기권했다. 안보리 결의는 상임이사국 5개국의 반대가 없고, 15개 이사국 중 9개국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러시아의 기권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훈령에 따른 것이었는데, 기실 안보리 결의를 묵인한 셈이었다.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취임 후 3년간 오바마 행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메드베데프에게 민간인 대량학살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푸틴이 안보리 표결 전에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푸틴의 측근은 미리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는데, 푸틴은 메드베데프가 서방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확신했다. 안보리의 목표는 단순히 민간인 보호가 아니라 카다피 정권의 전복이며, 이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익에 반한다고 보았다. 리비아 문제는, 그 이전과 달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 간 분명한 이견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연임을 원하는지, 푸틴은 이를 용인할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오직 푸틴만이 둘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4) 2011년 총선과 2012년 대선

    2011년 9월,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둘의 미래가 밝혀졌다. 메드베데프는 자신이 당의 비례대표 1번이 되어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푸틴 총리를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이 2008년 개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푸틴이 당선되면 2018년까지 재임하고, 또 연임하면 2024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푸틴의 대통령 복귀가 뉴스에 나오면서 그의 인기는 2000년 이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푸틴을 야유하고 조롱하는 온갖 콘텐츠가 트위터, 유튜브, 페이스북, 브콘탁테(러시아판 페이스북)에 넘쳐났다. 이를 생산, 유통한 사람들은 인터넷 미디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육수준도 높고 금전적으로도 여유 있는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2011년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당이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연일 보도되었다. 여론 조사 결과 과반의석도 어렵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푸틴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득표율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2011년 총선은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부정이 벌어졌다. 특히 시민들이 부정선거 장면을 채집해 인터넷을 통해 유포했다. 노골적인 무더기 투표나, 같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투표소를 돌아다니며 투표하는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올렸다. 한 투표소에서는 선거관리자가 자기 손으로 투표용지 한 다발을 직접 손으로 찍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선거감시단은 투표소 3곳 중 1곳꼴로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1년에는 OSCE를 포함해 685명의 국제감시단이 파견되었다.)

    최종 결과, 푸틴의 통합-러시아가 49.32%를 득표해 과반에 육박하는 238석을 얻었다. 그러자 보리스 넴초프가 이끄는 야당 솔리다리티가 항의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알렉세이 나발니였다. (그 후 넴초프와 나발니가 겪게 된 운명에 대해서는 미리 앞에서 다뤘다.) 이 집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2월 24일 집회에는 거의 20만 명이 모였다. 1991년 8월 보수 쿠데타를 막기 위해 모였던 시위 이래 최대의 인파가 집결했다. 학자, 정치전략가, 관료, 러시아정교회 사제 등 항상 푸틴을 지지했던 엘리트 계층도 선거부정 의혹을 제기했다.

    [그림] 2012년 12월 10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에 한 참석자가 푯말을 들고 서있다. “나는 이 자들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통합러시아당을 조롱하는 로고. (통합러시아당의 상징은 곰인데, 곰이 돈주머니를 물고 있다.) 나는 다른 자들에게 투표했다. 야블로코, 정의러시아, 공산당의 로고. 나는 재검표를 원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Protests_Moscow_10-12_sign1.JPG

    메드베데프는 시위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몇 가지 양보안을 제시했다. 2004년에 폐지한 지역선거를 부활한다든가, 정당 창당 요건을 완화한다든가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푸틴은 강력한 반격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서방의 부패한 가치에 정면으로 맞서는 문명국이고, 시위 참여자들은 서방의 가치를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러시아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소련의 해체 후 혼란을 말하면서 푸틴 덕분에 끔찍한 체제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며, 푸틴에 대한 일종의 ‘충성 서약’을 발표했다.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12월 1월 여론 조사에서는 푸틴의 과반 득표가 어렵다고 나왔으나, 2월에 들어 지지율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3월 4일 대통령선거에서 푸틴은 63%를 득표했다. 과거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대승이었다. 역시 여러 부정투표의 증거가 나왔으나, 푸틴의 압도적 승리를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시위 주도 세력은 대선 후 크게 낙담했다. 대선 다음 날 2만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으나, 앞으로의 방향성을 두고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계속>

    <각주>

    1. 남보람, 「러시아의 영토확장 행동에 대한 나토와 미국의 군사적 대응 연구: 2008년 러시아-조지아 전쟁,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한국과 국제정치》 37권, 2021.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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