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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틴 2기(2004~2008)
    푸틴과 러시아의 현대사
    대통령 대행에서 크림합병까지-③
        2022년 06월 23일 0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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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푸틴 대통령 1기”

    푸틴 2기에 들어 정부 핵심요직의 인적 구성에 변화가 나타났다. 대선 직전 카시야노프가 전격 해임되고 후임으로 무명의 미하일 프라드코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무색무취하고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대통령실장으로는 볼로신이 물러난 후, (다음 번에 푸틴 총리의 지휘를 받는 대통령이 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로 교체했다. 그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자유주의파에 속했던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분류는 이미 퇴색했고, 그 역시 독립적이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관료 그레프와 쿠드린이 장관으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실로비키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푸틴 취임 후, 2004년 9월 1일 북오세티야공화국의 소도시 베슬란에서 체첸의 테러집단이 학교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3일째 총격전이 벌어져 186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인질 334명이 사망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푸틴은 이 비극을 계기로 강력한 개혁을 약속했다.

    그런데 며칠 후 푸틴의 발표를 보면, 그 개혁이란 앞으로 주지사를 선출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질극 사태가 벌어진 후에도, 푸틴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권력 때문에 오히려 누구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관련 지역의 주지사들도 사태에 대한 개입을 주저했는데, 푸틴은 사태의 책임을 주지사에게 전가한 셈이었다. 이와 동시에 두마의 450석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구 선거도 폐지했다. 2003년 총선 이후 야당이 약화되면서, 무소속이나 민주파는 지역구를 통해서만 의회에 진출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는데, 이 경로마저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2003년 총선 이후 개헌도 가능한 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푸틴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옐친마저 언론 인터뷰에서 푸틴의 조치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인 권리를 축소”한다고 비판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푸틴 집권 4년 만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으나, 두마 내에서는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거의 없었다.

    1)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 개입의 실패

    2004년 10월 우크라이나에서는 10년간 대통령을 했던 쿠치마(1994~2005년 재임)를 이를 새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다. 1980년대 말, 소련 공산당 내에서 개혁파로 부상했던 쿠치마는 여러 면에서 옐친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후, 2000년 12월 이른바 카세트 스캔들이 터졌다. 야당이던 사회당 쪽에서 쿠치마의 목소리가 담긴 50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공개했는데, 31세의 저널리스트 곤가제의 납치, 살해에 대통령 본인이 개입한 정황이 담겼다. 또한, 쿠치마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하고 후세인 이라크 정부에 스텔스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사일을 몰래 수출한 사실이나, 이 밖에 다양한 불법·비리의 정황이 담겼다. 다음 해까지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쿠치마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쿠치마는 2002년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발탁하고, 정치적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의 대선 후보 빅토르 유셴코의 상승 기세가 매우 강력했고, 쿠치마와 야누코비치는 점차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1) 대선을 3개월 앞둔 7월,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로 가서 쿠치마와 야누코비치를 만났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쿠치마와 야누코비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2)

    쿠치마 대통령은 전임자 크라우추크 대통령(1992~1994년 재임)의 고립적 비동맹노선과 비교할 때, 서방과 러시아, 양자 모두와 적극적 협력 관계를 맺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쿠치마 본인은 이를 ‘전방위 외교’라고 불렀다. 1996년 재선에 성공한 러시아의 옐친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완전히 인정하고,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어떤 강압적 수단도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클린턴도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폐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고,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로 규정했다. 따라서 쿠치마 정부는 서방-러시아와 전방위 외교를 펼칠 우호적 분위기에서 출발했다.(3) 집권 1기, 쿠치마는 여러 외교적 성과를 냈다.

    먼저, 쿠치마는 1996년 4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에서 유럽연합 가입이 우크라이나의 목표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은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둘째, 1997년 5월 28일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총리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항과 흑해함대 처리 방안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대통령이 서명하는 조약이 아니라 총리가 서명하는 협정 형식을 취한 이유는 러시아 의회 내에 영향력이 큰 극우 세력이 비준을 방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흑해함대는 일단 양분하고, 일부를 러시아가 다시 사들여 결국 82 대 18의 비율로 나누기로 했다. 세바스토폴항은 2017년까지 20년간 러시아가 임차하기로 하되, 러시아의 가스공급 채무와 상계되어 실제적인 경화 지불은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5월 31일에 양국은 우호협력조약도 체결했는데, 양국의 영토적 통합성을 인정한다는 게 핵심으로, 크림반도의 영토 귀속 문제가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 우호협력조약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각각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셋째, 2개월 후, 1997년 7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나토 문제에 관해서도 합의를 이루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관한 어떤 구상도 반대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와 나토 회원국도 만장일치로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 대신 ‘특수한 동반자관계’(distinctive partenership)에 관한 나토-우크라이나 헌장이 채택되고, 이에 따라 양자가 안보문제에 관한 공동관심사를 협의할 포럼으로 나토-우크라이나 위원회(NUC)가 구성되었다.

    종합해보면, 쿠치마 1기는 미국·서방과 러시아(클린턴-옐친) 사이의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배경으로 미국·서방과 러시아, 각각과 여러 외교적 성과를 낸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영토 문제를 최종적으로 매듭지은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그렇지만 쿠치마 2기, 특히 카세트 스캔들이 터진 후, 쿠치마 정부의 외교정책은 좌충우돌을 겪는다. 언론인과 정적을 암살했다는 매우 강한 의혹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과 만나줄 서방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라크 무기판매가 폭로된 후, 미국 의회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역제재 문제마저 논의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궁지에 몰릴수록 쿠치마 대통령은 무리한 행동을 이어갔다. 2002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 초청도 받지 않았지만 참가하여 나토에 가입할 의사를 밝혔다. 또한, 2003년에는 이라크에 파병국 중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쿠치마 대통령은 서방의 지도자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푸틴이 손을 내밀었다. 쿠치마는 불과 한 달 전에도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푸틴과의 회담 직후 그 입장을 정반대로 뒤집어엎었다. 유럽국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만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 대신 푸틴이 제안한 것처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4개국이 참여하는 공동경제구역(CES)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나아가 푸틴은 우크라이나 선거에 은밀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기업인들은 푸틴의 압력에 따라 야누코비치의 선거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야누코비치가 쓴 6억 달러의 선거비용 중 3억 달러를 러시아 기업인이 낸 것으로 알려졌다. 6억 달러는 당시 우크라이나 GDP의 1%에 해당했다. 또한, 대통령 행정실장 메드베데프가 우크라이나 선거 지원 책임자가 되고, 8월에는 그의 최측근 보좌관들이 수도 키예프에 비밀리에 선거 지원 사무실을 열었다. 그들은 러시아 선거와 똑같은 수법을 활용했다. 관영TV는 야누코비치를 선전하고, 야당 유셴코 후보를 서방 첩자라고 악랄하게 공격했다.

    선거운동이 점점 더 뜨거워질 때,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9월 초, 유셴코가 독극물에 중독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쿠치마 세력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보았다. 그는 점점 더 승기를 잡아갔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푸틴도 선거 3일 전, 우크라이나 해방기념일 참석을 명분으로 키예프를 방문했다. 푸틴은 TV에 출현해 시청자의 전화 질문을 받는다는 형식으로 야누코비치가 총리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고 거듭 칭찬했다. 다음 날에는 쿠치마, 야누코비치와 나란히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10월 31일 투표 결과 야누코비치는 39.2%를, 유셴코는 39.87%를 얻어서, 3주 후에 2차 결선투표가 벌어지게 되었다. 푸틴은 다시 우크라이나를 방문했고, 야누코비치에게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라고 쿠치마를 압박했다. 선관위 직원들은 유령 유권자 명부를 만들었고, 지방 투표자들이 버스를 타고 키예프에 와서 다시 투표를 하는 장면이 현장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야누코비치의 지지자가 많은 동부에서는 1차에 비해 2차에서 투표율이 갑자기 20%p 상승해 96.7%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미국과 유럽의 NGO가 실시한 출구조사는 유셴코가 11%p 승리한 것으로 나왔지만, 선관위는 야누코비치가 3%p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오렌지 혁명’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약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쿠치마의 회상에 따르면, “푸틴은 강경한 사람이지만 대단히 약아서 자기 입으로 시위 현장에 탱크를 투입하라고 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해보라는 식으로 힌트를 계속 던졌다.” 결국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투표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재선거 결과, 유셴코는 52%, 야누코비치는 44%를 얻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치욕스럽게 패했고, 그 원한을 깊이 새겼다. 이는 먼저 러시아 국내 정책으로 나타났다.

    2) 우크라이나에서 실패 이후, 권위주의를 향해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전후에도 러시아 주변국에서 ‘색깔 혁명’이 벌어졌다. 2003년 11월에는 조지아(그루지야)에서 ‘장미 혁명’이 벌어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하야했다. 2005년 2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레몬 혁명’(또는 ‘튤립 혁명’)으로 아카예프 대통령이 물러났다.

    어떤 연구자는 세 나라에서 색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조건으로, ① 반(半)권위주의적 체제, ② 인기 없는 구체제 정치인, ③ 강하고 잘 조직된 야당, ④ 조작된 선거결과에 대한 빠른 인지능력, ⑤ 투표조작을 시민에게 알리는 독립 미디어, ⑥ 선거조작에 대항하는 시위자를 조직할 수 있는 야당의 능력, ⑦ 정보기관, 군대, 경찰 내부에서 (정치적 태도의) 분기를 꼽았다.(4)

    푸틴은 이런 요소들이 러시아 내부에서도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 듯. 이러한 위험요인을 차례로 분쇄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외국 스파이를 찾아낸다는 명분으로 수색을 강화하면서 러시아 내에서 활동하는 NGO 단체를 탄압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NGO 활동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또한, 2005년 1월 친정부 청년운동단체인 나시(Nashi)를 결성해, 이를 앞세워 반정부단체에 제약을 가했다.

    [그림] 2007년 12월 3일, 친푸틴 성향의 청년단체 나시(Nashi) 소속 회원 5천여 명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모여 통합러시아당의 압승을 축하하는 집회를 열고 있는 장면. 정식 명칭은 ‘청년 민주주의 반파시스트 운동, 우리들!’이다. 17세에서 25세까지 연령의 청년이 참여할 수 있는데, 2007년 말 회원이 12만 명으로 성장했다. 2012년 ‘스마트 러시아’라는 정당을 창당하며 활동태를 전환했다.

    https://www.rferl.org/a/1079228.html

    2005년 4월, 푸틴은 두마, 연방위원회 합동 연설에서 “국내외적으로 러시아에 도전하는 세력”에 맞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자고 호소했다. 또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 법치와 같은 가치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소연방의 붕괴야말로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겪은 가장 큰 재앙이었습니다. 수천만 명에 달하는 우리 국민과 동포가 러시아 영토 바깥으로 내몰렸습니다”, “해체의 바람은 전염병처럼 러시아 영토 안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그의 연설은 모든 면에서 불길했다. 첫째, 러시아가 더는 서구 방식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법치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밝힌 셈이기 때문이다. 둘째, ‘러시아의 영토 밖으로 내몰린 동포’라는 표현은 과거 소련의 영토에 속했던 독립국을 향한 팽창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국내외 도전세력’이라는 표현도 매우 불길했는데, ‘외부의 적과 그들이 국내에 침투시킨 스파이, 파괴자’라는 스탈린 시대의 도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푸틴은 반(半)권위주의를 2기에 들어서 완전한 권위주의로 바꾸겠다고 단호히 결심한 듯했다.

    이때부터 푸틴은 철학자이자 종교지도자였던 이반 일린(1883~1954)이라는 이름을 자주 꺼내곤 했다. 러시아 밖의 정보기관과 언론은 러시아 안팎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반 일린이 어떤 사람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혁명 당시 백군 장군, 표트르 브란겔이 세운 ‘러시아 전군(全軍)연합’의 이데올로그였다. 그는 한편으로 러시아 정교와 애국주의, 법치와 사유재산제를 국가의 토대로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혁명 후 내전기, 백군 영웅을 찬미하는 글을 남겼다. 푸틴은 러시아 정교와 애국주의, 영웅주의에서 서방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적 원천을 찾고자 했다.

    3) 우크라이나에서 실패 이후, 대외정책의 전환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대외관계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는 전환점이 되었다. 푸틴은 집권 초기에는 서방과 긴밀한 협력을 원했다. 그러나 러시아 경제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푸틴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면서,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줄어들기 시작했다.

    집권 초 푸틴의 대외정책을 회고해 보면, 푸틴은 러시아 내부의 체첸이나 북코카서스의 이슬람 독립세력과 대결하는 데에도 힘이 부쳤고, 서방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원했다. (2000년 3월 대선에서 그는 러시아가 언젠가는 나토에 가입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푸틴은 6월 클린턴과 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 옵션을 한 번 고려해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푸틴의 회상에 따르면, 클린턴은 “안 될 게 뭐 있겠냐”고 답했지만, 허를 찔린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2001년 그는 소련 시절 운영했던 해외 군사기지도 폐쇄했는데, 쿠바의 감청기지, 베트남의 해군기지도 포함되었다.

    2차 체첸전쟁이 잔혹하다는 비판에 직면했을 때, 푸틴은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오히려 러시아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즉 이슬람 테러리즘의 위험성을 부각해 체첸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푸틴은 9·11 테러 직후, 러시아의 예정된 군사훈련을 취소해 버리고, 콘돌리자 라이스 군가안보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도울 일이 더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10월 미국이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러시아는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제공했고,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미군 군수기지가 들어서는 것도 묵인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옛 소련 영토에 미군이 들어왔다.

    10월에는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부시와 따로 만나서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 조약(ABM)을 개정해 미국이 미사일방어망(MD) 시스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때 푸틴은 ABM을 개정하되,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미국의 MD를 무력화할 수 있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지만, 3주 뒤, 부시는 푸틴에게 전화를 걸어, 더 시간을 끌지 않고, 러시아가 반대하더라도 미국은 12월 중순 ABM에서 탈퇴를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알렸다.

    푸틴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발트3국)의 나토 가입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낮췄고, 2002년 5월에는 나토-러시아 평의회(NRC)를 구성하기로 했다. 나토-러시아 평의회는 ‘공동결정과 행동’을 합의했는데 특히, △ 테러리즘에 대한 공동 대처, △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협력, △ 군사협력(합동군사훈련 포함)이 핵심 초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002년 11월 나토 정상회담은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7개국의 나토 가입을 승인했다. (7개국의 공식 가입은 2004년 6월에 이뤄졌다.) 이때 러시아도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 푸틴이 나토 정상회담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이바노프 외무장관이 나토 회원국 외무장관들과 회의를 열었다. 그는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나토 측 확인에 환영을 표하고, 평화유지와 대(對) 테러활동에서 나토와 협력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때 나토 정상회담에서는 이라크에 유엔 결의 준수를 촉구하는 강력한 성명을 냈으나,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이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은 하지 않았다. 이는 유엔안보리 논의 때 미국의 자동적인 이라크 공격을 반대했던 유럽 측 입장에 따른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러시아로 날아가 푸틴과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때 푸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나토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나토 관계가 앞으로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즉 7개국의 나토 가입에 공식적,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겠다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이날 푸틴과 부시의 공동성명은 나토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의 유엔결의안 준수를 촉구하는 간단한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별도로 미국이 단독으로 이라크 전쟁을 수행해서는 안 되며 유엔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2002년 부시는 7개국의 나토 가입이라는 성과는 얻었으나, 나토와 러시아의 이라크 전쟁 지지라는 그에게는 더 중요한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푸틴과 부시 모두,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다지기 위해 서로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2004년 러시아의 노골적인 우크라이나 대선 개입 이후, 푸틴과 부시의 관계에 긴장이 돌기 시작했다. 부시 정부는 2005년 1월, 두 번째 임기에 돌입했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이어, ‘민주주의의 신장’을 외교목표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푸틴과 정상회담 직전 기자회견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시민혁명에 박수를 보낸다고 말해 푸틴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후, 2005년 1월에 치러질 의회, 주지사 선거를 언급하면서, 1989년 체코의 벨벳혁명 후 민주주의 발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이라며 자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유코스의 호도르코프스키를 체포한 사건이나, 러시아의 여러 언론탄압 사례를 언급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우려를 표했고, 푸틴은 미국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언급하며 부시에게 조롱과 야유를 던졌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두 정상 간 매우 불편한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러시아 기자는 (마치 미리 준비한 듯) 푸틴에게 왜 미국의 인권침해 사례를 지적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그 이후로도 양 정상은 자주 만났고, 여전히 상대방을 잘 예우한다는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푸틴의 태도는 확실히 첫 번째 임기 때와는 달라졌다.

    한편 2005년 말 러시아 가스프롬은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천연가스 가격을 1천 입방미터 당 50달러에서 230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푸틴은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을 앞두고 당시 총리 야누코비치의 당선을 돕기 위해 낮은 가격으로 천연가스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친서방 성향의 유셴코가 당선되자 입장을 바꿔버렸다. 유셴코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2005년 1월 러시아로 가서 푸틴 대통령과 만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밝히고, 푸틴과 러시아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쿠치마 정부에 이어,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추진했다. 마땅한 다른 압력수단이 없던 러시아는 가스공급을 무기로 삼았다. 푸틴은 유셴코의 친서방정책을 두고 “왜 그런 정책을 우리 돈으로 지원해 주어야 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양국 간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2006년 1월 가스프롬은 전격적으로 가스공급을 중단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는 자국을 통해 유럽 각국으로 가는 가스를 막고, 자신이 필요한 양을 뽑아서 쓰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수출되는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중 80%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했다.) 그러자 한겨울에 어려움을 겪게 된 여러 유럽국가가 강력히 반발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그래서 가스공급 중단은 푸틴이 양보를 했는데, 유럽에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훼손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적 협상 결과, 가스프롬이 지분 절반을 지닌 ‘로스우크로 에네르고’라는 중개회사가 끼어들게 되었고, 따라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가스공급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5) (이 중개회사는 2004년 얄타에서 푸틴과 쿠치마가 만날 때 합의하여 세운 곳인데, 가스프롬가 지닌 지분 이외의 지분을 누가 갖고 있는지가 비밀이었다. 비밀 지분의 수익이 누구에게 가느냐가 쟁점이었는데, 놀랍게도 유셴코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2007년 2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에 푸틴은 소련-러시아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이때 푸틴의 연설은 대외정책의 전환을 분명히 선언하는 자리였다. 푸틴은 서두에 외교적 언사를 모두 생략하겠으니 자신의 말에 화를 내지 말라고 주문한 후, 이례적으로 미국을 직접 거명해 가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세계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하나의 주인, 하나의 주권, 단극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 이라크 전쟁을 들어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무력이 절제 없이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나토의 동진은 나토의 현대화와 무관하다”며 “누구에게 대항하기 위해 확장하는가 물을 권리가 러시아에게 있다”고 하여,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토 가입국의 확대에 강력히 제동을 걸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다. 그리고 “미국이 OSCE의 성격을 자국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주장했는데, OSCE가 구소련지역에 국제 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데 불만을 표한 셈이었다. 또 ‘전략핵무기감축조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베개 속에 여분의 탄두를 감추었을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만일 미국이 본토를 방어하는 미사일방어체계(MD)가 개발된다면 이는 냉전기의 상호확증파괴(MAD), 즉 공멸 체계를 흔드는 것이라 경고하면서 넌지시 러시아의 새 탄도미사일 ‘Topol-M’이 어느 정도는 이에 대한 응대라고도 밝혔다.(6)

    이 자리에 푸틴을 초청한 사람은 바로 독일의 메르켈 총리였는데, 푸틴의 예상 밖 연설은 그녀를 포함해 참가자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푸틴은 집권 이후, 능력 있는 외교가이자 중재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는데, 참석자들은 푸틴의 연설이 냉전의 언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다음 날 연설에서 “냉전은 한 번으로 족하다”며 우회적으로 푸틴의 연설에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푸틴의 연설은, ‘테러와의 전쟁’ 이후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에 질린 세계 여론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중도좌파 성향의 신문 《쥐드도이체 차이퉁》도 푸틴의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며, “냉전의 승자가 패자를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다룬 것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고 적었다. 푸틴으로서는 직전 해에 발생한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바로 뒤에서 다룬다)이나 국내에서 권위주의적 통치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빠졌으나, 이 연설을 통해 분위기를 얼마간 반전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푸틴은 뮌헨 연설 이후 더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2007년 5월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정부와 상업은행에 사이버 공격을 감행했다. 2008년 이후 러시아는 군비지출을 늘리고 군대, 하드웨어와 전술을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정보, 반란 대처, 역정보(허위정보), 사이버전을 강조했다.

    뮌헨 연설 다음 해, 2008년 5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은 또다시 대결의 장이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8년 1월, 갑작스럽게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캠페인을 개시했다. 부시는 정상회담 전 4월에도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그러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국의 계획은 부시 행정부 임기 안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 준회원에 해당하는 ‘행동계획 멤버’(MAP)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상회담 전까지 다른 나토 회원국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푸틴도 나토 정상회담에 초청을 받았다. 푸틴은 비공개회의에서 극히 전투적인 발언을 했는데, 주권국으로 우크라이나의 지위와 그 영토보전(territorial integrity)을 부정했다. “만약 나토 문제가 더해진다면, 우크라이나는 주권국으로서 생존의 벼랑에 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1954년 크림이 우크라이나에 귀속된 것도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영토보전’이란 국제법의 원리 중 하나로 주권국이 자신의 국경과 모든 영토를 방어할 권리를 부여하며, 무력으로 영토를 변경하려는 시도는 침략행위로 간주한다.)

    회담 결과, 정상회담 성명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환영한다”고 표현했으나, 독일과 프랑스가 반대하여 ‘행동계획 멤버’ 자격 부여는 무산되었다. 즉 부시 행정부의 계획이 좌절되었다. 나토 정상회담에서 푸틴의 발언은 거의 전쟁 선언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정상회담 후 부시는 소치의 푸틴 별장을 찾았다. 푸틴은 부시가 자신의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

    임기 말, 라이스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방문해 ‘전략적 동반자 헌장’에 서명했는데, 우크라이나군의 훈련과 장비를 강화해 향후 나토 가입을 위한 여건을 조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2009년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훨씬 더 신중한 태도를 보여서,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의 모멘텀을 잃게 되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는 행동계획 멤버 자격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나토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우크라이나 기자가 나토 사무총장에게 “만약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초대를 받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종합해보면, 푸틴은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 매우 큰 공을 들여 노골적으로 개입했음에도 ‘오렌지 혁명’을 거치며 결국 실패했다. 이때 푸틴은 오히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러시아 동포가 방치되어 있는’ 구소련 영토를 분명한 영향권에 두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5년 우크라이나 가스공급 사건은 겉으로 보면 푸틴이 양보한 듯했지만, 사실 가스공급의 무기화가 성공을 거둔 사례로 볼 수 있다. 2007년 뮌헨 안보회의에서 부시 행정부를 비난하는 충격 발언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08년 나토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4) 이어지는 추문: 리트비넨코 독살

    푸틴이 집권한 후, 그 전모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 올리가르히의 구속, 망명, 투옥뿐만 아니라 FSB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산 의심스러운 사건이나 정치적 경쟁자, 언론인의 ‘의문사’가 이어졌다.

    몇 가지 대표적 사례를 들면, 자유러시아당의 세르게이 유셴코프 의원은 2003년 4월 모스크바 교외 자택 근처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를 비판하고, 체첸전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인물이었다. 또한, 런던으로 망명한 베레조프스키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2006년 10월,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의 기자, 안나 폴리코프스카야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는데, 그녀는 수년간 협박과 폭력을 당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저널리스트 보호위원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살해를 당하거나 의심쩍은 죽음을 맞이한 러시아 저널리스트가 수십여 명에 이른다. 모든 살인사건이 러시아 정부와 연관된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정부가 비판적 저널리즘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인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부추기는 효과를 발휘한다.

    2006년 11월에는 러시아 밖, 런던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전 KGB, FSB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FSB 요원 2명과 차를 마시고 돌아온 뒤 쓰러져 약 3주 후 숨졌다. 그의 체내에선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 ‘폴로늄-210’이 다량 발견됐다. (그래서 ‘방사능 홍차’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의 정적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고, 1999년 300명의 희생자를 낸 러시아 아파트 폭발 테러가 체첸 반군 소행이 아닌 FSB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의 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2014년 영국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2016년 6월 조사위는 “리트비넨코의 독살은 러시아 정부 소행이며, 푸틴 대통령이 독살 계획을 최종 승인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꼽아보면, 영국으로 망명했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2013년 3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2018년 3월에는 베레조프스키의 친구이자, 그의 타살설을 꾸준히 제기했던 니콜라이 그루쉬코프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2015년 2월에는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가 모스크바에서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넴초프는 크림반도의 합병과 전쟁을 비판하는 소수의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이고 러시아의 합병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체첸인 다섯 명이 1500만 루블(20만 달러)을 받고 청부살인을 저지른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넴초프의 딸 잔나 넴초바는 푸틴이 직접 아버지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2017년 2월에는 넴초프의 보좌관이고, 호도르코프스키가 설립한 시민단체 ‘열린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블라디미르 카라-무르자가 미확인 물질에 의해 중독되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2017년 3월에는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러시아 전 두마의원, 데니스 보로넨코프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 역시 크림반도 합병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림] 보리스 넴초프가 피살된 현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켜진 촛불. 넴초프는 러시아의 경제난과 돈바스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2015년 3월 1일, 반정부집회 ‘베스나’(계절 봄을 뜻한다)를 준비하고 있다가, 하루 전 총격으로 사망했다. 넴초프는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한 푸틴의 지원정책으로 인해 살해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살해범으로 기소된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모두 체첸 출신이었고, 그들은 돈을 받고 살해를 했다고 밝혔다. 넴초프의 가족들은 푸틴 대통령에 충성하는 체첸 자치공화국 수장 람잔 카디로프가 암살 지시 배후라고 주장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re_are_flowers_and_candles_near_the_site_of_the_murder_of_Boris_Nemtsov.jpg

    2018년 3월에는 전직 러시아군 정보총국(GRU) 요원이자 영국 정보국에 협조했던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개발된 군사용 신경가스 노비촉에 중독되었다. 범인은 러시아 GRU 소속 요원이었다. 영국 테레사 메이 총리는 보복 조치로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했는데, 이들은 영국에 있는 러시아 스파이 네트워크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2020년 8월에는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노비촉과 유사한 신경가스에 중독되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발니는 노비촉의 사용을 지시할 수 있는 인물은 FSB 국장, 해외정보국 국장, GRU 국장 셋인데, 이들도 푸틴의 직접적 승인 없이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므로, 자신에 대한 공격의 배후에 푸틴이 있다고 단언했다. 나발니는 독일에서 치료를 마친 후, 2021년 1월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집행유예 의무를 어기고 해외로 출국한 죄로 출입국 관리소에서 구금되었다. 그는 2022년 3월 사기와 법정모독죄로 9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추가 혐의가 덧붙여져 수형 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다.

    5) 사이비 정권교체

    2007년 7월, 푸틴은 과테말라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 직접 참석해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 나섰다. 2차 결선투표에서 러시아 소치가 한국 평창을 4표 차이로 이기는 데 성공했다. 푸틴의 인기는 또다시 치솟았고, 개선장군처럼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2007년 12월에는 (5대) 두마 선거가, 2008년 3월에는 (5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개헌하지 않는 한, 푸틴이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푸틴은 권위주의 통치를 행했지만, 민주주의라는 겉모습을 원했다. 푸틴은 개헌 의사가 없다고 여러 차례 분명히 말했기 때문에, 어떻게 권력이 재편될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국방장관 세르게이 이바노프나 대통령 행정실장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이 유력해 보였으나, 푸틴은 제3의 인물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암시를 내놓기도 했다. 푸틴의 심복 간 차기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며, 이른바 ‘측근 전쟁’이 벌어졌다.

    12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지금까지 무소속을 지켰던 푸틴이 통합러시아당의 정당 명부 후보자 명단의 맨 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나더라도 당 대표직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12월 총선에서는 통합러시아당이 독주했다. 새로운 선거법, 즉 의원 전원을 전국단위 정당명부제로 뽑는 선거에서 64%를 득표하여 단독으로 개헌선을 넘는 315석을 획득했다. 무소속이나 민주파는 지역구를 통해서만 의회에 진출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는데, 우려했던 것처럼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권력당인 통합-러시아당을 정점으로, 1990년대에도 존재했던 보수적 민족주의적 성향의 공산당, 자유민주당과 푸틴 치하에서 등장한 관제 야당, 모두 4개 정당이 의석을 독차지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2003년 두마 선거에서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 400여 명의 선거모니터팀이 파견되었고, 선거의 불공정성을 지적한 바 있었다. 2007년에는 러시아가 팀의 규모를 70명으로 제한하자 OSCE가 아예 불참을 결정했다.

    * 2기 푸틴 정부에서 선거법이 개정되어 지역구 선출이 폐지되고, 의원 450명 전원이 전국단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선출되었다. 이전 선거법에서는 정당명부에서 5% 이상을 득표해야 의석이 배분되었으나, 새 선거법에서는 7%로 상향되었다. 4대 두마까지는 소수정당과 무소속 후보들도 상당히 당선되었으나, 새 선거법하에서 통합-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 정의러시아당 4개 정당만이 의원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고, 7% 미만 정당의 득표도 흡수하므로, 득표율에 비해 실제 의석은 더 많이 배분되었다. 우파연합이나 야블로코처럼 지역구에서 후보를 배출할 수 있었던 자유주의 정당은 5대 선거를 통해서 두마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정의러시아는 로디나의 후신으로 관제 야당의 성격을 띠었다.

    12월 10일, 의회 4당 대표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푸틴을 만나는 장면이 TV로 방영되었다. 이 자리에서 통합러시아당의 그리즐로프는 다른 당 대표들과 함께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모았다며, 메드베데프를 추천했다. 우연히 이 자리에 참여한 메드베데프도 사전에 상의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뻔히 연출된 장면이었으나, 푸틴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정당 대표들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후계자를 선택했다는 이미지를 전달하길 원했다. 2008년 대통령선거 결과 메드베데프가 71.2%, 공산당의 주가노프가 18.0%, 자유민주당의 지리노프스키가 9.5%를 얻었다. 메드베데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6) 푸틴은 유럽 최고의 부자인가

    한편, 야권의 보리스 넴초프와 블라디미르 밀로프는 대선 전날, 『푸틴: 업적』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냈다. 이는 푸틴 측근의 비즈니스를 낱낱이 파헤친 최초의 저술이 되었다.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관리로 지낼 때 인연을 맺은 은행가 유리 코발추크가 어떻게 자산을 키우고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소개했다. (이때부터 코발추크는 푸틴과 측근들의 자산을 관리하는 ‘개인 은행가’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또한 가스프롬의 자산이 어떻게 처분되었는지,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어떻게 축재했는지,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중개회사 로스우크로에네르고의 정체는 무엇인지, 스위스에 본사를 둔 원유중개업자 군보르의 설립자 겐나티 팀체코가 어떻게 유코스를 인수한 로스네프트의 석유물량을 거의 독점적으로 수출했는지 다루었다. 아브라모비치를 제외하고, 코발추크나 팀첸코는 언론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무명의 인사였으나, 이 팸플릿이 공개된 후 《포브스》는 두 사람의 이름을 억만장자 명단에 올렸다.

    얼마 후 《포브스》는 로텐베르크 형제(보리스와 아르카디)의 이름도 명단에 올렸는데, 그들은 어렸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삼보 클럽에서 푸틴과 함께 운동을 했던 친구들이다. 그들은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 보드카 사업으로 시작해, SMP 은행을 설립하고, 또 가스프롬에 막대한 양의 가스파이프를 공급하는 업체가 되었다.

    벨코프스키는 《국가와 올리가르히》에서 푸틴을 더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푸틴이 팀체코를 내세워 군보르, 가스프롬, 스르구트네프테가스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푸틴의 개인재산이 4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벨코프스키는 정보 출처가 크렘린 내부 소식통이라고 했으나, 문서화된 물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푸틴은 벨코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쓰레기 더미에서 주은 것’이라며 무시했다. 이때 어떤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유럽 최고의 부자입니까?”

    최근의 추정치는 훨씬 더 크다.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트폴리오 투자회사의 매니저 출신 빌 브라우더는 2017년 미국 의회 증언에서 푸틴이 불법으로 획득한 재산이 20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푸틴은 세계의 4대 부자, 즉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애플의 베르나르 아르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보다 돈이 더 많다.) 그는 푸틴의 이름으로 등록된 돈은 단 한 푼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푸틴의 친구인 전직 정육점 주인 피터 콜빈이 거대 석유중개회사의 대주주이고, 역시 푸틴의 친구인 첼로 연주자 세르게이 롤두긴은 서류상으로는 20억 달러 규모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자산의 실제 주인이 푸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

    <각주>

    1. 빅토르 유센코는 소련시절 국립은행 우크라이나 자사에서 경력을 시작해, 독립 후 1993년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총재를 맡으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새로운 화폐를 도입했으며, 1997년 러시아 금융위기 때도 통화가치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쿠치마 대통령은 1999년, 유센코를 총리로 발탁했다. 이때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통합에너지회사’(UESU)의 설립자 중 하나인, 율리야 티모셴코를 에너지담당 부총리로 임명했다. 그녀 역시 부패혐의를 받고 있었으나, 유센코는 흑막을 잘 알고 있는 티모셴코야말로 부패를 척결할 적임자라고 보았다. 당시 티모셴코는 사업과 거리를 두고 조국당을 창당하여 정치적 야심을 키우던 터라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정치적 연합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닥친 경제위기가 얼마간 잠잠해지자, 유센코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공산당과, 천연가스·석탄산업의 올리가르히와 연합한 중도파가 힘을 합쳐 의회 불신임투표로 유센코를 해임했다. 총리에서 해임된 후, 유셴코는 2002년 선거연합체인 ‘우리 우크라이나’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셴코의 신당은 총선에서 정당지지율 23.57%, 450석 중 112석을 차지해 1당으로 부상했다. 티모셴코의 티모셴코당도 정당지지율 7.3%, 22석을 차지해 야당 정파로서 존재감을 살렸다. (허승철, 『우크라이나 현대사 1914-2010』, 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2. 크림반도는 18세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크림한국으로부터 뺏은 땅이었다. (크림한국(Krym汗國)은 13세기 몽골족이 크림반도에 세운 왕국이다.) 1954년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바꿨는데, 그때는 누구도 우크라이나가 훗날 크림반도를 보유한 채로 독립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푸틴이 3자회동을 크림반도에서 연 것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염두에 두고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출발점이었다.

    3.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해, 1994년 1월에 우크라이나-러시아-미국이 3자 협정을 체결하고, 또 12월에는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3국과 러시아, 미국, 영국이 그 유명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그 결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2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1996년 6월 1일 전략핵무기가 러시아에 이전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실현되었고, 2000년 초에는 130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도 해체되었다.

    4. 안데쉬 오슬룬드, 위의 책, p. 458.

    5. 당시 러시아 가스프롬과 우크라이나 나프토가스의 공동기자회견에 따르면 “러시아는 에너지 무역회사인 로스우크레네르고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1000㎥당 230달러에 가스를 공급하며, 로스우크는 이를 우크라이나에 1000㎥당 95달러에 판매하는 데 합의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로스우크가 러시아산 가스에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로부터 사들인 저가의 가스를 혼합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는 구매하는 가스 가격을 2배 가까이 올리는 대신 자국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 사용료를 47% 인상하기로 했다.

    6. 정은숙, 「제43차 ‘뮌헨안보정책회의’와 미러관계」, 《코나스넷》, 2007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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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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