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파선에서 뛰어내린 다음엔?
        2008년 02월 04일 11: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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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정 비대위 혁신안이 부결된 이후, 민주노동당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이런 질문은 부적절하거나 불충분하게 됐다. 대신 혁신안 부결 이후 진보정치 진영의 재편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 이런 질문이 더 현실과 부합된다.

       
    ▲ 퇴장하는 심상정 대표를 취재하는 기자들. 심 대표를 비롯한 민주노동당 혁신파의 진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진=진보정치)
     

    대선 이후 치명적 위기에 빠진 민주노동당이 스스로 최선의 또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고 만들어낸 심상정 비대위가 당 대회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 이후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정교하게 수를 읽으면서 둔 ‘바둑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해체 수순에 들어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기와 그 폭의 문제는 남아 있겠지만, 당원과 주요 지도부들이 떠난 당은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주파 정당’이 될 것이고, 상대방은 이름이 뭐가 됐든, 몇 개가 됐든 ‘평등파 정당’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정부와 맞설 강력하고 대안이 있는 진보정당의 위상은 사라졌다. 복원되기도 어렵고 복원된다 해도 짧은 시간 내에는 힘들 것이라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비관적 전망이다. 

    하지만 혁신안 부결 이후 모든 정파와 세력들은 새로운 판에 맞는 계산을 하면서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행보를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새롭고 낯선 지형의 형성에 따른 조심스러움과 총선 일정의 촉박함으로 인한 신속함이 모두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

    이날의 표결 결과는 비대위를 출범시킨 1월 12일 중앙위의 결과가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 당시 비대위 출범 찬성률은 59%로 40%의 중앙위원들은 ‘비상한 대책기구’ 자체를 거부했으며, 심상정 대표에 대해서는 30%의 중앙위원이 반대했다.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당내에서는 이처럼 완강한 반대파가 40%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다 ‘혁신안’이 발표되자 대선 평가와 일심회 관련 내용에 대한 자주파 중심 대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이 덧붙여져서 61%의 반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실상 자주파의 대다수는 ‘강경파’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반면 자주파에 대한 강경 그룹이 이미 ‘탈당’을 한 상태인 평등파와 소수의 온건 자주파들은 안건 내용에 대한 찬반 토론보다는 혁신을 통한 민주노동당의 재탄생을  위한 단합에 보다 큰 가치를 두면서 혁신안 지지를 호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야심차게 출발했던 심상정 비대위 체제는 출범 20여 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설마’와 ‘혹시나’ 하는 주변의 기대는 깨졌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민주노동당, 공백과 공황

    우선 민주노동당은 당분간 ‘공백과 공황’ 상태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대위 사퇴로 지도부는 공백 상태를 맞을 것이며, 당원들의 예견된 집단 탈당을 막을 방안도 없다. 심상정 대표를 비롯 노회찬 단병호 의원 등 대중적인 영향력이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거취 문제도 불투명한 상태다.

    당장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굴러갈 것인가? 이와 관련 자주파의 한 관계자는 “심상정 대표가 사퇴야 하겠지만 당을 깨는 행보를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면서 “심 대표가 사퇴하면서 책임 있게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당은 이제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시간이 촉박한 만큼 혁신안이 아니라 총선안에 논의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해 자주파의 향후 행보를 짐작케 했다. 그의 말은 총선을 앞두고 대표적인 대중 정치인들이 당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심상정 비대위는 당의 혼란이 없도록 후속 조치를 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 후 사퇴하겠다는 방침이지만, 난파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배가 중심을 잡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창현 전 민주노동당 총장은 부결 직후 “혁신안이 60% 이상의 대의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비대위가 당의 단결과 혁신에 부합하지 못한 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라며 이는 자주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혁신안 부결 책임을 특정 정파의 반대가 아니라 반통합적인 비대위 혁신안 내용에 떠넘기려는 자주파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비대위 혁신파 신당 참여 쉽지 않아

    혁신안 부결 이후 심상정 대표와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비대위 혁신파들의 움직임이 가장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이 신당파들과 합류할 것인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인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물론 당내 잔류 가능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리 높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비대위 주변의 관계자들은 이들의 신당파 합류 가능성을 그다지 높게 보고 있지 않다. 신당파에 대한 이들의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은 게 그 이유다. 특히 민주노총 내부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심상정 혁신안을 지지했던 주요 인사들은 신당파가 노동 현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총 내 한 산별연맹 위원장은 “개인적으로 2년 전부터 분당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정책 경쟁 없이 소모적 논쟁으로 지새우며, 내부 권력투쟁에 매몰돼선 전망이 없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신당파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 문제와 당을 혁신시키기 위한 긴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대중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신당 창당 과정에서도 준비가 거의 없는 상태”라며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민주노총 산별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탈당은 하겠지만 신당으로 가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라며 심상정 의원 등 다른 대중 정치인의 경우도 “무소속 출마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도 신당파에 대해 비판적이며,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부에선 무소속 출마 검토 주장도

    비대위 혁신안을 지지했던 적지 않은 수의 총선 예비후보들의 경우 자신들의 행보를 놓고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올 가능성은 적지만, 신당으로 갈 것인가, 다른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치적 선택과는 별도로 지역 위원장을 맡은 혁신 지지 인사들의 경우 선거 빚 정리, 세액공제 정리 등 지역위원회의 ‘뒷 일’을 실무적으로 정리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비대위 혁신파 움직임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이미 언급한 대로 심상정 대표와 노회찬, 단병호 등 총선 출마 예정자들의 움직임이다. 아직까지 이들이 자신들의 향후 행보에 대해 구체적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노회찬 의원은 이미 “혁신안 부결이면 파국”이라며 탈당도 시사한 바 있다.

    이들이 서로의 입장을 긴밀하게 조율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행보를 가져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또 노동조합 진영 등 이들을 지지하는 쪽에서도 이들이 따로 따로 가게 놔두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민주노총 주요 산별연맹 위원장은 “심상정, 노회찬 등 정치인들이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함께 해야 된다. 그들이 싫다고 해도 최대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설득되지 않을 경우 지지도 철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상정, 노회찬 등 혁신파에 속하는 의원들과 총선 출마 예정자들이 어떤 행보를 할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잔류와 신당 합류 그리고 무소속 출마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설 연휴 기간을 지나며-다른 정파들도 마찬가지겠지만-다양한 견해를 공유하면서 의견을 수렴해나가는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신당파, 불편한 관계 끊고 같이 하자

    신당 모임의 김형탁 대변인은 “혁신안의 부결은 더 이상 어중간한 봉합으로는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이제 낡은 과거와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진보정당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우리는 민주노동당 혁신을 위해 노력해왔던 동지들과 함께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며 “그간의 과정에서 생긴 불편했던 관계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진보정당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 가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당파의 이같은 간곡한 요청이 어떤 반향을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개별적으로 당원들이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은 있지만, 혁신파 내부의 주요 활동가들이 현재로선 이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평등파의 내상(內傷)이 이번 과정에서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3일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 결과는 민주노총 내부에도 커다란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노총 주요 산별의 한 활동가는 “이번 당 대회에서 일심회 사건 표결 결과는 그렇다 쳐도 대선 평가에서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깊은 분노를 느꼈다”며 민주노총 내부에서 “노동자 계급을 배반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심판”을 준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동자 계급 배반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산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이번 당 대회를 계기로 그 동안 견지해왔던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대한 이견이 터져나오게 될 것”이라며 “특정한 연맹과 노조들은 신속하게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좌파 진영의 다양한 정치 그룹들은 이미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철회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보고,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

    물론 배타적 지지 철회가 노조나 조합원들이 더 왼쪽에 있는 정당 쪽으로 향하는 계기가 될지 훨씬 오른쪽에 있는 정당을 향하게 될지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그 동안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단결됐던 민주노총에서 이제 정치적 분열의 싹도 돋아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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