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먼다오(金門島)에서
    국군, 해방군을 섬멸하다
    [국공내전-63] 후롄, 해방군의 자만심에 일격···타이완의 최전방 기지
        2021년 02월 24일 03: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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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진먼다오 고수를 결심하다

    진먼다오는 푸젠성 제2도시 샤먼과 붙어있는 섬이다. 샤먼에서 진만다오, 그리고 타이완의 중앙부에 있는 도시 타이중까지 직선상에 놓여 있다. 샤먼과 진먼다오의 거리는 10여킬로미터, 대륙과 지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먼다오는 현재 타이완에 배속되어 있다. 타이완 정부는 21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섬을 어떻게 영유할 수 있었을까?

    1949년 10월,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군이 도처에서 패퇴하고 있을 때 이 섬에서 사흘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내친 김에 이 작은 섬을 단숨에 점령하려는 해방군과 대륙에 대한 반격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국군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혈전을 치른 것이다.

    해방군이 창장을 도하한 후 국군은 추풍낙엽처럼 밀리고 있었다. 인민 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항저우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각 야전군에 전국 해방명령을 내리고 각 지역에 대한 병력 배치를 완료하였다. 쑤위가 지휘하는 3야전군 부대는 푸젠성을 석권해가고 있었다. 1949년 10월 15일, 해방군은 상하이와 함께 남부의 최대도시인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17일에는 푸젠성에서 타이완과 마주보고 있는 도시 샤먼을 점령하였다. 장제스는 탕언보 집단군을 배치하여 샤먼을 수비하고자 하였으나 쉽게 내주고 말았다.

    해방군의 다음 목표는 진먼다오였다. 진먼다오 공격을 맡고 있는 부대는 3야전군 휘하 10병단이었다. 10병단 사령원 예페이는 1949년 7월부터 푸젠성으로 진격한 뒤 푸저우(福州), 핑탄다오(平潭岛), 장저우(漳州)를 차례로 떨어뜨리며 기세를 올렸다. 해방군은 장제스가 고수를 결심한 도시 샤먼까지 일격에 떨어뜨렸다.

    푸젠성의 상업도시 샤먼은 섬이다. 당시에는 연륙교가 없어 해방군은 목선을 타고 도하하여 수비군을 섬멸하였다. 그러자 10병단 사령원인 예페이를 비롯하여 지휘관들은 진먼다오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수비가 강한 샤먼을 점령하였으니 병력 2만명이 수비하는 진먼다오쯤은 문제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전국을 석권해가고 있을 때이니 해방군이 자신감을 가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49년 8월, 푸젠성에서 밀린 국군은 진먼다오 방어를 강화하였다. 국군 22병단이 진먼다오에 진주한 것을 비롯하여 섬 왼쪽에 있는 샤오진먼다오(小金門島)에도 방어병력을 배치하였다. 장제스는 타이완과 마주보고 있는 푸젠성을 어떻게든 보전하려고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푸젠성 대부분을 내준 장제스는 샤먼과 진먼다오를 방어하기 위해 골몰했다. 대륙에 바싹 붙어있는 두 섬을 장악하면 대륙 반격의 교두보로 쓸 수 있었다. 장제스는 탕언보에게 단단히 일렀다. “진먼다오를 잃으면 안된다. 현지에서 독전하라.” 동남 군정장관을 맡고 있던 천청도 진먼다오 수비강화를 고심했다. 그는 진먼다오 수비 주력을 22병단에서 12병단으로 교체했다.

    국군 지휘관 후롄

    12병단 사령관은 천청의 파벌인 토목계이자 국군에서 손꼽히는 지장 후롄이었다. 그는 산둥성 난마전투 때 해방군 화동 야전군의 겹겹 포위를 뚫고 포위망을 돌파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전멸 직전에 놓인 그의 사단은 갑자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해방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솽두이지 전투에서 황웨이 병단이 전멸될 때 부사령관이던 후롄은 홀로 전차에 올라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후롄은 포로가 되면 죽으려고 다량의 수면제까지 준비하였다. 그는 포위망을 탈출한 대신 탑승한 전차에 포탄이 명중하여 중상을 입었다. 여러 고비에서 불사신처럼 살아난 그가 진먼다오 수비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후롄의 12병단 병력이 진먼다오로 이동을 완료한 것이 10월 24일 밤이었다. 해방군이 상륙 날짜로 잡은 날이 10월 25일이었으니 바로 하루 전의 일이었다.

    우연과 필연

    사람의 일이 그렇듯 전쟁에도 우연이 뒤따른다.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나 불운이 겹쳐 전투의 승패가 바뀌는 일이 허다하다. 국군 지휘관 중 후롄은 운이 좋은 장군, 즉 운장이라고 할 만 하였다. 적수인 예페이가 진먼다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나 휘하 지휘관들이 진먼다오의 국군을 얕잡아 본 것이 전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군 지휘부는 진먼다오 수비병력을 2만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롄의 12병단이 증강되어 국군 수비병력은 총 4만명으로 늘어났다.

    처음 진먼다오에 배치되었던 22병단은 대부분 패잔병으로 구성된 형편없는 부대였다. 탕언보 집단군 주력이 수비하던 샤먼에 비하면 해방군이 경시할 만하였다. 탕언보는 샤먼에 진지공사를 튼튼하게 구축한 뒤 진먼다오를 시찰하였다. 그때 22병단은 진먼다오에 상륙하여 한참 하선하고 있었다. 탕언보가 보기에 병사들은 하나도 없고 일반 백성들만 배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탕언보는 의아해서 병단 사령관인 리량룽(李良荣)에게 물었다. “아니, 모두 인부들 아닌가 ? 전황이 급한데 어째서 전투병부터 태우지 않았나?” 그러자 리량룽은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저들이 모두 전투병들입니다.” 탕언보는 더욱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군복 입은 병사들이 어디에 있는가?” “아직 군복을 지급 받지 못하였습니다.” 탕언보는 기가 막혔다. “행색이 모두 거지꼴이로구나. 저래 가지고 전투할 수 있겠나?” 리량룽 휘하 22병단 병력은 장교와 병사들이 모두 등에 삿갓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 백성들이 22병단 부대들을 ‘삿갓군’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휘관인 리량룽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병단이 약세라는 것을 알았지만 해방군의 공격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리량룽은 해방군이 진먼다오 구닝터우(古寧頭)지역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10월 24일 구닝터우에서 상륙 저지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바로 몇 시간 후인 10월 25일 새벽 1시 30분에 해방군이 구닝터우에 상륙했던 것이다.

    해방군 지휘관들은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다. 도해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준비한 선박도 형편없이 부족했으나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창장을 도하할 때도 해방군은 목선을 타고 쉽게 건너갔다. 약졸들이 지키는 진먼다오는 속전속결로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해방군은 정보 확인에도 소홀하였다. 해방군은 진먼다오와 인접한 샤오덩다오(小嶝島)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국군 포로를 잡았다. 심문하여 보니 후롄 병단의 주력 사단인 11사단 소속이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중요한 정보로 취급하지 않았다. 후롄이 참전한 것도 그렇지만 진먼다오 병력이 증강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해방군은 조만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붉은원 푸저우, 샤먼, 진먼다오

    국군에게 행운이 겹치다

    장제스는 타이완을 반격의 본거지로 삼았을 때부터 이미 선박 문제를 중시하였다. 1949년 9월에 장제스는 탕언보에게 명령하였다. “적이 공격해 온다면 매월 만조 때가 될 것이다.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주위 선박을 수색하라. 바다와 바다로 통하는 강을 최소 백킬로 이상 수색하여 눈에 띄는 대로 폭격하여 파괴하라.” 이에 따라 국군 항공기가 푸젠, 저장, 장쑤성을 막론하고 연해와 주변 강을 이 잡듯 수색하였다. 배를 발견하면 무조건 폭격하여 파괴헸는데 심지어 상하이 조선소까지 날아가 폭격할 정도였다. 해방군은 도해에 충분한 배는 그만두고 한번 건너갈 배조차 구하기 어려워졌다. 진먼다오 공격을 맡은 해방군 10병단 28군은 간신히 목선 300척을 수집하여 물속에 감춰 두었다. 배에 물을 채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래도 해방군은 걱정하지 않았다. 배가 왕복하여 증원병력을 실어 나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49년 10월 24일 밤, 해방군 10병단 사령원 예페이는 진먼다오 공격을 명령하였다. 해방군은 간신히 확보한 목선 300척에 3개 연대 9,086(뱃사공 및 인부 350명 포함)명의 병력을 싣고 진먼다오로 향했다. 본래 공격군을 7개 연대로 편성했으나 한차례에 3개 연대만 승선할 수 있었다. 해방군은 샤오덩다오(小嶝岛)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일제히 배에 올랐다. 공격군은 처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대가 서로 엉키는 등 혼란이 빚어졌다. 대부분 목선에 엔진을 탑재하는 등 급조한 공격함대였다. 해방군은 이런 배로 창장을 도하하기도 하고 샤먼섬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진먼다오 공격부대는 서로 연락이 끊기기도 하여 선박에 탄 지휘자들은 각자 알아서 목표지역을 향해 가야 하였다.

    공격군에게 또 다른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25일 1시 30분경, 진먼다오를 수비하던 국군 부대에서 순찰을 돌던 병사가 지뢰를 밟았다. 폭음이 울리고 탐조등이 해상을 비추자 접근하던 해방군 상륙정들이 발각되었다. 몰래 기습하려던 계획이 처음부터 파탄이 났다. 해방군은 즉시 강공을 시작했다. 샤오덩다오에 배치한 해방군 포병 부대가 진먼다오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해방군 상륙정들은 포격의 엄호 아래 해안으로 접근했다.

    진먼다오 수비군들은 이미 화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상륙 저지 훈련을 받은 국군 병사들은 상륙하는 해방군을 맹공했다. 상륙하며 국군의 집중사격을 받은 해방군 제1제대 3개 연대는 상륙 중에 병력 삼분의 일을 잃었다. 해방군은 간난신고 끝에 상륙에 성공하여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해방군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본래 1제대가 상륙한 후 배들이 돌아가 제2제대 병력을 싣고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군이 갯벌에 설치한 장애물에 걸린 데다 썰물에 갇혀 배들이 모두 해안에 좌초하였다. 25일 6시, 날이 밝을 때까지 공격군 선박 삼백여 척 중 한 척도 되돌아가지 못하였다. 낮이 되자 국군 항공기나 나타나 남은 배를 모조리 때려 부쉈다.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자 원래 계획하였던 작전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남은 배가 없어 편성한 공격군조차 증원하지 못한 것이다. 공격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예페이 등 병단 지휘부는 소식을 듣고 초조하게 바다 건너 진먼다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강 건너 불을 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국군에게는 우연의 행운이 또 겹쳤다. 국군이 보유한 상륙정 LST-210 중룽함(中榮艦)이 마침 진먼다오에 정박해 있었다. 중룽함은 탱크 상륙정으로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본래 함장인 마옌헝(馬炎衡)이 배에 설탕을 싣고 저장성 딩하이(定海)로 가서 팔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옌헝은 진먼다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어 그곳에서 낙화생유를 구매하려 하였다. 뜻밖에 그때까지 땅콩 생산이 적어 진먼다오에 남게 된 것이었다. 그후 중룽함은 진먼다오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함장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중롱함이 전투가 벌어진 구닝터우 해협에 파견되어 대안의 해방군 포병진지에 맹폭을 가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 국군 함정 여러 척이 가세하였으며 진먼다오 해안을 봉쇄하여 해방군 상륙부대 2제대의 상륙을 막았다. 그밖에 국군 B-24 폭격기 25대, FB-26 전투기 60대, 미제탱크 21대를 동원하여 한꺼번에 해방군을 두들겼다. 병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해방군은 국군 육해공군의 입체작전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25일 날이 밝은 뒤 고립되어 고투하던 3개 연대는 점점 몰리기 시작했다. 진먼다오에서 해방군을 공격하는 국군 병력은 4만명으로 증강되었다. 육해공군의 입체작전 아래 이틀 동안 악전고투하던 공격군은 전원 섬멸되었다. 해방군은 전사 3,873명, 포로 5,175명, 실종 50명 이상(해방군 쪽 전사자료)을 기록하며 완전히 참패하였다. 국군쪽 피해는 전사 4,500명, 부상 5,000여명(해방군 전사자료)이다.

    진먼다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해방군

    전투에서 투항하는 해방군

    해방군의 실책은 또 있었다. 나중에 국군에 포로로 잡힌 지휘관들 면면을 보면 최고위급이 연대장이다. 공격군에 사단장 이상 고위 지휘관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군의 통일지휘가 불가능하게 되어 각 연대는 각자도생하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후롄 등 병단 사령관이 직접 전선에서 독전한 국군과 대비되는 항목이다. 후롄은 당시 푸젠성 주석 겸 진먼다오 수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투 이틀째 진먼다오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후롄은 총탄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지휘하며 이렇게 외쳤다. “솽두이지에서 당한 치욕을 잊었는가?” 그는 술과 안주를 들고 부상병에게 먹이며 격려하였다. 국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해방군의 진지에 다시 돌격하였다.

    진먼다오에서 해방군이 섬멸될 무렵인 10월 26일, 장징궈가 진먼다오로 왔다. 장제스가 큰아들에게 독전하라고 보낸 것이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에게 진먼다오 전투 승리는 그만큼 값진 일이었다. 그날 장징궈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11시 반에 진먼다오 상공에 도착하였다. 섬을 바라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착륙한 뒤 지프를 타고 탕언보군 사령부로 갔다. 연도에 부상병과 포로가 가득하였다. 최전선에 가서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곳곳에 시체가 쌓여 있는데 피와 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장징궈 총통 저술집’

    진먼다오, 타이완의 최전방 기지로 남다

    진먼다오에서 해방군이 전멸당한 소식은 전국을 강타하였다. 주공을 맡았던 해방군 28군 부군단장 샤오펑(萧锋)과 정치부 주임 리완춘(李曼村)은 창백한 얼굴로 통곡하며 병단 사령원인 예페이의 집무실로 갔다. 예페이는 “모두 내 책임이다. 진먼다오는 다시 공격하면 된다. 울지 말고 돌아가라.”하며 달랬다. 예페이는 3야전군 사령원인 쑤위와 중앙군사위에 패전을 보고하고 자신을 처분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격군 사령관 예페이 진먼다오에서 참패를 당했다.

    마오쩌둥은 예페이 등 패전 책임자들을 문책하지 않았다. “진먼다오 실패는 처분할 문제가 아니다. 교훈으로 받아들일 문제이다. 후속 증원군을 보내지 못하여 모두 섬멸당했다. 해방전쟁 삼년 이래 있어서는 안되는 첫 실패였다.” 마오쩌둥은 어째서 예페이와 공격군 지휘관들을 문책하지 않았을까? 예페이 등 10병단이 그동안 쌓아 온 공적이 너무도 뚜렷하였기 때문이었을까? 기실 해방군의 도하작전은 모두 모험이었다. 1947년에 황허 등 수많은 강과 하천을 건너 따베산으로 진격한 것도 그렇고 목선 만여 척으로 창장을 도하한 일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마오쩌둥이 펼친 작전 대부분이 이런 모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공산당 중앙군사위는 예페이에게 경험에서 교훈을 찾고 다시 진먼다오 공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에 미국이 참전하자 마오쩌둥은 진먼다오 공격중지를 결정하였다.

    장제스에게 진먼다오 전투의 승리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기쁜 일이었다. 그는 즉시 후롄을 진먼다오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1952년10월 8일, 후롄은 해방군 소수병력이 수비하는 난일다오(南日島)를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예페이는 진먼다오에서 당한 것과 똑같은 패배를 다시 겪었다. 그는 국군 9,000여명이 기습 점령한 난일다오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두 차례에 걸쳐 1,300여명의 증원군을 보냈다. 중과부족인 해방군은 모두 섬멸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베이징에서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이번에는 탁자를 치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당장 난일다오를 수복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에 푸젠성의 인민해방군은 10월 14일 대병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난일다오가 대병을 수용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데다 대규모 회전을 꺼린 장제스의 결정으로 국군 주력은 섬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서로 자존심을 겨룬 싸움이었을 뿐 그렇게 가치가 있는 섬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제스가 진먼다오를 시찰하고 있다. 가운데 망토입은 이

    그 후에도 장제스는 후롄에게 “푸젠성 연해 섬들을 더 공격하여 대륙 반격의 교두보로 삼으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소규모 유격대를 푸젠성에 보내어 해방군의 방어태세를 정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는 해방군에게 발각되어 보내는 즉시 모두 섬멸되었다. 그래도 진먼다오의 승리는 장제스에게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 후 타이완은 진먼다오 전체를 요새로 만들어 대륙을 단검처럼 겨누는 형국을 만들었다. 후롄은 패배를 거듭하는 가운데 국군과 장제스를 가뭄의 단비 같은 승리를 안겨 주었다. 마오쩌둥은 후롄을 가리켜 “교활하기는 여우와 같고 용맹하기는 사자 같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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